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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8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활동한 실학파 가운데 문학활동을 한 인물.
조선 후기에 들어와 성리학이 역사적 기능을 다하고 공리공론의 사변철학으로 떨어지자, 이를 비판하면서 현실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용적 학문인 실학이 등장했다.
근대지향의식과 민족의식을 공유한 실학자들은 당시 사회를 민본적 입장에서 개혁하려는 개혁방안을 모색하는 한편, 실학의 세계관에 입각한 문필활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문학을 도(道)의 실현수단이나 성정을 순화하는 도구로 인식하던 성리학적 문학관을 비판하고, 당시 사회의 여러 문제와 민중들의 생활감정을 문학작품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백성의 경제적 안정이 국부(國富)의 기초가 된다는 공리주의적인 사고방식과 사실주의적인 문학관을 가졌던 이들은 토속어와 민족어를 사용하여 봉건사회 해체기의 사회와 민중의 모습을 사실적인 필치로 그렸다.
실학파 문인들은 그들의 학문적 지향에 따라 경세치용파(經世致用派)·이용후생파(利用厚生派)·실사구시파(實事求是派)로 나눌 수 있다.
경세치용파는 토지제도 및 행정기구, 기타 제도상의 개혁에 치중한 문인들로서 이익(李瀷)을 중심으로 했다. 이익은 유형원(柳馨遠)의 학문을 이어받아 토지의 균등한 분배를 통해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는 개혁방안을 마련하는 한편 입신출세를 목적으로 하는 과거(科擧)를 비판했다. 그는 바람직한 문학이란 기존의 규범을 벗어나서 스스로 창의성을 발휘해 삶의 실상을 드러내고 세상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익의 작품 중에는 우리나라 역사를 노래한 〈해동악부 海東樂府〉 119수가 가장 주목받을 만하다. 여기에서 그는 주체적인 역사인식과 민중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이익의 학문은 안정복(安鼎福)·권철신(權哲身)에게, 그의 문학은 이용휴(李用休)·이가환(李家煥)에게 계승되었으나 사실상 정약용(丁若鏞)에게서 집대성되었다. 정약용은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학자일 뿐만 아니라 2,500여 수의 뛰어난 한시를 남긴 시인이기도 했다.
그는 시를 짓되 까다로운 규범을 버리고 느낌이 떠오르는 대로 표현해야만 진실을 얻을 수 있다고 하면서, "나는 조선인이므로 즐겨 조선시를 짓겠노라"고 선언했다. 헐벗고 굶주린 농민의 모습을 그린 〈기민시 飢民詩〉·〈전간기사 田間紀事〉, 민요를 수용한 〈탐진촌요 耽津村謠〉·〈탐진어가 耽津漁歌〉, 당시 관리들의 횡포를 그린 〈시랑 豺狼〉 등의 작품에서 토속적인 방언과 일상어를 구사하여 당시 현실을 사실적으로 담았다. 보릿고개를 맥령(麥嶺)이라고 하고, 높새바람은 고조풍(高鳥風)으로 표현한 데서 볼 수 있듯이 토속적인 우리말을 한자화해 사용함으로써 시를 실감나게 지었다.
정약용의 후배로서 정약용의 시에 많은 영향을 받은 시인 이학규(李學逵)도 유배지에서 본 농민들의 가난한 생활을 한시에 담았다. 그는 정약용의 〈전간기사〉에 차운(次韻)한 〈기경기사 己庚紀事〉 같은 장편서사시를 짓고,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김해의 풍속을 그린 〈금관죽지사 金官竹枝詞〉 같은 작품에서는 사투리를 구사해 김해지방의 풍속도를 비장하게 그렸다.
홍대용(洪大容)과 박지원(朴趾源)을 중심으로 한 이용후생파 문인들은 상공업의 유통 및 생산기구 일반의 기술혁신을 목표로 삼았다.
이들은 명분론에 사로잡혀 있던 지배층들의 북벌론이 허구임을 지적하면서 조선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발달한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북학론(北學論)을 주장했다. 박지원은 산문작품을 통해 상공업의 발달과 점차 활기를 띠던 도시 주위의 시정생활을 그리면서 당시의 세태와 고루한 양반들을 풍자했다. 초기에 씌어진 단편작품들에서는 봉건시대 지배이념인 충효 대신 새로운 윤리로서 우도(友道)를 강조하고, 당시에 새롭게 나타난 신흥부자와 수공업자들의 모습을 등장시켰다. 그뒤 중국에 다녀온 여행체험을 표현한 〈열하일기 熱河日記〉에는 그의 주체적인 세계인식과 이용후생의 사상이 총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여기에 실린 〈허생전 許生傳〉은 그의 대표적인 소설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상공업의 유통문제 등 당시 사회의 여러 문제가 문제해결형의 지식인 허생을 통해 형상화되어 있다. 그밖에 〈전가 田家〉·〈해인사 海印寺〉 같은 사실주의적인 시 작품도 40여 수 남아 있다.
박지원의 후배인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의 시는 청(淸)나라 문인들에게도 알려져 명성을 얻었다.
이서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서얼의 신분이었지만, 탁월한 시적 재능과 학문을 좋아하는 자세로 인해 정조(正祖)의 총애를 받고 왕립도서관인 규장각의 검서관(檢書官)으로 제수되기도 했다. 이덕무의 시는 조선인의 풍요(風謠)로 평가되었고, 민족사의 재인식에 관심을 가졌던 유득공은 〈이십일도회고시 二十一都懷古詩〉·〈유우춘전 柳遇春傳〉을 남겼으며, 〈북학의 北學議〉로 유명한 박제가는 함경도 귀양생활과 연경체험을 〈수주객사 愁州客詞〉·〈연경잡절 燕京雜絶〉에 담았고, 이서구는 관조적인 자세로 주위의 사물을 바라보는 시들을 남겼다.
경서(經書)·금석(金石)·전고(典故)의 고증을 위주로 하는 실사구시파는 김정희(金正喜)로 대표된다.
김정희는 박제가에게서 배운 뒤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고증학적 방법으로 사실을 밝히는 데 주력했다. 그는 서적과 문자를 통한 고증을 위주로 하여 금석학을 개척하고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창출했다. 그는 시인이란 각자 자기의 성령(性靈)에 따라 시를 지어야 하며, 어느 한 가지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는 불교에도 관심을 가졌으나, 선비다운 문학세계를 견지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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