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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득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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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49(영조 25)
사망 미상
국적 조선, 한국

요약 실사구시의 방법으로 중국에서 문물을 수입하여 산업진흥에 힘쓸 것을 주장한 북학파 실학자이다. 또한 발해사를 한국사의 체계 안에서 파악·연구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규장각검서로 있었기 때문에 궁중에 비치된 국내외의 자료들을 접할 기회가 많아 다양한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저서를 남겼다. 그는 한국사의 독자적인 발전과 체계화를 위해 역사연구 대상을 확대했다. 〈발해고〉에서 한반도 중심의 역사서술 입장을 벗어나서 고구려의 옛 땅인 요동과 만주 일대를 민족사의 무대로 파악했으며 고구려의 역사 전통을 강조했다.

유득공

유득공의 글씨, 〈근묵〉에서,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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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사구시의 방법으로 중국에서 문물을 수입하여 산업진흥에 힘쓸 것을 주장한 북학파 실학자이다. 또한 발해사를 한국사의 체계 안에서 파악·연구했다. 본관은 문화. 자는 혜보·혜풍, 호는 영재. 아버지는 진사 관이다.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여 1779년(정조 3) 규장각검서가 되었으며 포천·제천·양근 등의 군수를 지냈다. 외직에 있으면서도 검서의 직함을 가져 이덕무(李德懋)·박제가·서이수 등과 함께 4검서라고 불렸다. 첨지중추부사에 승진한 뒤 만년에 풍천부사를 지낸 바 있으나, 죽은 해는 명확하지 않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규장각검서로 있었기 때문에 궁중에 비치된 국내외의 자료들을 접할 기회가 많아 다양한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저서를 남겼다. 그는 한국사의 독자적인 발전과 체계화를 위해 역사연구 대상을 확대했다. 〈발해고 渤海考〉에서 한반도 중심의 역사서술 입장을 벗어나서 고구려의 옛 땅인 요동과 만주 일대를 민족사의 무대로 파악했으며 고구려의 역사 전통을 강조했다. 또한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이를 한국사의 체계 안에 포함시켜야 함을 주장했고, 신라와 발해가 병존했던 시기를 남북국시대로 파악했다.

〈발해고〉는 군고·신고 등 9고(考)로 되어 있으나 권(卷)도 나누지 않은 단권의 간략한 내용으로 되어 있고, 내용도 세밀히 검토하면 잘못 기술된 부분이 많아 학문적 수준은 그다지 높지 않다. 그러나 발해사를 최초로 체계화시키고 이를 한국사의 체계 안에서 파악하려는 이론의 제시와 그 의도에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탈피하여 주체의식의 확립에 노력하던 실학파의 학풍이 엿보인다. 또한 〈이십일도회고시 二十一都懷古詩〉는 단군조선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이 세운 21개 도읍지의 전도 및 번영을 읊은 43편의 회고시로서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민족의 주체의식을 되새겨보려는 역사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경도잡지 京都雜志〉는 조선시대 서울의 생활과 풍속을 전하고 있는 민속학 연구의 필독서이다. 그밖의 저서로 〈영재집〉·〈고운당필기 古芸堂筆記〉·〈앙엽기 盎葉記〉·〈사군지 四郡志〉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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