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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고분이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분리된 후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우월한 정치·경제·종교상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일반민들과는 다른 형태로 만든 무덤을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분은 국가의 발생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때부터 많은 고분이 만들어졌다. 고구려의 경우 압록강 유역에 분포하고 있는 돌무지무덤이 이른 시기의 고분에 해당된다. 백제의 경우는 한강 하류에 분포하는 돌무지무덤, 신라와 가야는 영남지방 각지에 분포하는 덧널무덤 단계부터를 고분이라고 할 수 있다.
4, 5세기에는 외형으로 볼 때 커다란 분구를 갖춘 대형고분들이 나타나는데, 이러한 고분들을 고총고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고분들은 그 규모, 구조, 껴묻거리의 질과 양에서 피장자들의 사회적 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보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그것이 역사학적·고고학적으로 의미를 갖는 경우에 국한한다. 인간이 죽은 자를 위해 무덤을 만든 것은 구석기시대부터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구석기시대의 무덤이 발견된 예가 없고 신석기시대부터는 확실한 예가 나타난다.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초기 철기시대의 유적에는 다양한 종류의 무덤이 존재하나 이러한 선사시대의 무덤은 고분이라고 부를 수 없다.
고분이란 사회구성원간의 평등한 관계가 깨어져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분리된 후 지배계급들이 자신들의 우월한 정치, 경제, 혹은 종교상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하여 일반민들과는 다른 형태로 만든 무덤을 말한다. 따라서 계급이 발생하고 국가가 성립하기 이전의 무덤은 고분이라고 부르지 않고 단순히 분묘로 본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분은 국가의 발생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당시의 사회상을 복원하는 데 많은 자료를 제공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가 시작되면서 많은 고분을 만들었다.
고구려의 경우 압록강 유역에 분포하고 있는 돌무지무덤[積石塚]이 이른 시기의 고분에 해당되며 백제의 경우는 한강 하류에 분포하는 돌무지무덤, 신라와 가야는 영남지방 각지에 분포하는 덧널무덤[木槨墓] 단계부터를 고분이라고 부를 수 있다.
삼국의 국가체제가 정비되는 과정에 발맞추어 4, 5세기에는 외형으로 볼 때 커다란 분구(墳丘)를 갖춘 대형고분들이 나타나는데 이러한 고분들을 고총고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구려의 굴식[橫穴式] 돌방무덤[石室墳]이 여기에 해당되며, 백제의 공주·부여 지구의 굴식 돌방무덤도 고총고분에 해당된다. 신라는 경주평야에 자리잡은 거대한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 그 전형적인 예이며 6세기 이후에는 고구려와 백제 계통의 굴식 돌방무덤이 새로이 보급된다.
가야지역에서는 구덩식[竪穴式] 돌방[石室]에 대형 봉토를 씌운 무덤이 이 지역의 대표적인 고총고분에 해당된다. 이러한 고분들은 그 규모, 구조, 껴묻거리[副葬品]의 질과 양에서 피장자(被葬者)들의 사회적 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대형 고분에 다수의 껴묻거리를 묻는 후장(厚葬)의 풍습은 불교의 성행으로 말미암은 화장의 성행, 국가체제의 정비에 따른 순장(殉葬)의 금지와 박장 관념의 대두 등으로 인해 점차 사라진다.
그 결과 통일신라시대에는 빈약한 껴묻거리, 가족장 등의 특징을 갖는 굴식 돌방무덤이 유행하며 고려시대 이후로는 왕릉이나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고분의 축조가 사회적으로 그다지 큰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다.→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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