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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기 신라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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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무지덧널무덤이 점차 사라지고 굴식 돌방무덤이 만들어진 시기이다. 굴식 돌방무덤은 대충 다듬은 돌로 장방형 또는 방형의 널방[玄室]을 만들고 한쪽 벽에는 널방과 통하는 널길[羨道]을 두는 구조이다. 널방은 돌문[石扉]으로 닫혀 있는 것이 정식이나 나무문을 두거나 그냥 두는 경우도 많다.

널길 바깥은 자연석으로 막혀 있으며, 부부합장 등의 추가장(追加葬)이 있을 때 널길 막음돌을 걷어내고 먼저 묻힌 시신 옆에 다시 피장자를 묻을 수 있다. 이러한 무덤구조는 고구려·백제에서 발달한 것으로 신라에는 6세기 후엽경 전파되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주된 묘제가 되었다. 돌무지덧널무덤이 밀집한 곳에도 몇 기 있으나 대체로 경주분지 외곽의 평지와 구릉지대에 분포한다. 노서동고분군 내 일부 고분과 경주 북천 이북의 용강동·황성동 일대의 고분군이 평지에 축조된 것이며, 구릉지대 고분군은 경주분지 외곽의 산록과 경주분지와 통하는 경주시 일대의 거의 모든 산맥의 사면에 있다. 수적으로 구릉지대 고분군이 많다. 그밖의 무덤구조로는 불교가 널리 전파되어 피장자를 화장한 후 유골을 단지에 넣어 매장하는 뼈단지무덤[骨壺墓]이 있으며, 제2기 이후의 돌덧널무덤과 독무덤도 계속 사용되었다.

돌무지덧널무덤에서 굴식 돌방무덤으로의 변화는 신라의 왕릉에서도 보인다. 제2기의 왕릉은 고분 내외에 왕릉임을 나타내는 명문이 없어 확정하기 곤란하나, 금관이 출토되는 평지의 초대형 또는 대형 돌무지덧널무덤이 왕릉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제3기의 왕릉은 문헌에 위치가 부정확하게 나타난 일부를 제외하고는 동양적 전제왕권이 확립된 일면을 보여주듯 대부분 독립된 구릉에 일정한 구역을 가지는 독립분(獨立墳)으로 조성되어 있다.

내부구조는 신문왕릉(神文王陵)으로 전하는 왕릉급 고분의 무덤둘레돌 남쪽에 "門"이라는 명문이 있어 굴식 돌방무덤으로 보인다. 왕릉의 외형은 제2·3기 전반의 태종무열왕릉(太宗武烈王陵)까지는 자연석으로 무덤둘레돌을 쌓았고, 이후에는 다듬은 돌을 사용하여 1m가량 높이로 둘러져 있다. 특히 성덕왕릉(聖德王陵) 이후의 왕릉은 무덤둘레돌이 판석으로 바뀌고 판석 사이에는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두거나 새겨놓았으며 주위에도 중국의 능묘와 같이 난간석·문인상·무인상·사자상·신도비(神道碑)를 일정하게 배치하여 왕릉으로서의 외모를 갖추고 있다. 또한 입지도 경주분지를 벗어나 있다. 그러나 신라 하대 왕릉들은 왕위쟁탈전으로 왕위가 불안정하고 재위기간이 짧았으므로 규모가 극히 축소되고 주위의 석물도 없는 단출한 형태이다. 현재 사적으로 지정된 신라왕릉들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변천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나, 일부 왕릉들은 조선 후기 이후에 자의적으로 왕릉이라 붙인 것이 많아 과학적인 조사를 통한 재구명(再究明)을 필요로 하고 있다.

경주시 신라고분

경북 경주시 황남동 신라고분 고분군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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