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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사육신에 비교해서 살아서 절개를 지킨 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을 가리키는 말이다.
계유정난에 의한 세조의 왕위찬탈은 집현전 출신의 학자들이 추구하는 유교정치와 상이하여 갈등으로 나타났으며 단종 복위운동으로 나타났다.
단종복위운동이 발각되어 이 때 죽음을 당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를 사육신이라 부르고,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유랑생활을 하며 초야에 묻힌 사람을 생육신이라 불렀다. 중종반정 이후 사림파가 득세하면서 이들의 절의 또한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되었다.
김시습(金時習:1435~95)·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南孝溫:1454~92)을 말한다. 단종복위운동의 실패로 죽음을 당한 사육신에 비해서 살아서 절개를 지켰다는 의미에서 생육신으로 불렀다.
세종은 정도전의 재상중심 정치운영론이나 태종의 왕권강화론을 절충하면서 유교적 이상국가를 세우고자 했다. 그리고 집현전의 설립·육성을 통해 왕권을 뒷받침할 수 있는 학문연구기관을 만들어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고자 했다. 그런데 유교의 정치론은 왕이 중심이 되는 정치론보다는 신하 중심의 정치운영론을 지향함으로써, 현실의 정치는 자연히 신하의 발언권이 강해지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말년에 세종이 병으로 정치운영에 참여하는 기회가 적어지자 신하의 발언권은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세종이 죽자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신하들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그런데 세종에 이어 즉위한 문종도 곧 죽자, 김종서·황보인 등 세종 이래의 유신들이 재상이 되어 정치운영을 독점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소수의 재상이 전권을 독단하는 현상을 초래하게 되어, 많은 신하의 의견을 존중하며 공론을 실현하는 신하 중심의 정치론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한편 태종 이래 강력해진 왕실은 소수의 재상에 의한 정치운영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특히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은 재상에 의한 권력독점에 반발하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결과 중앙정치에서 전권을 장악한 김종서·황보인 등에 반발한 수양대군의 왕실과 집현전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정치적 변란을 도모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계유정난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계유정난에 의한 김종서·황보인 등의 축출과 수양대군에 의한 왕위찬탈은 집현전 출신의 학자들이 추구하는 유교정치와 상이한 점이 많았다. 물론 집현전 학자들은 수양대군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과 뜻을 같이 하여 김종서·황보인 등 재상 중심의 정치운영 방식에 불만을 갖고 있었고, 그런 점에서 계유정난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조가 즉위하면서 왕권중심의 정치운영론을 지향하게 되었는데, 이는 집현전 출신의 유학자가 지향하는 신하 중심의 정치운영론과 다른 것이었다.
그 결과 이 두 세력은 충돌하게 되고, 권력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정변으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단종복위운동이다. 이 사건은 사전에 발각되어 많은 집현전 출신의 유학자가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되고 유학자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살기도 했다. 이 가운데 죽음을 당한 사람을 사육신이라 부르고,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유랑생활을 하며 초야에 묻힌 사람을 생육신이라고 불렀다.
중종반정 이후 사림파가 득세하면서 이들의 절의 또한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되었고, 그 후에 빚어진 정치운영상의 변화 속에서 그들의 위치가 자주 바뀌었다.→ 사육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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