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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한국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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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세종 때 천문역산학의 발달은 조선 전기의 과학 발달상을 대변한다. 앞에서의 설명처럼 삼국시대의 과학을 대표하는 분야가 첨성대로 상징되는 천문학이었다면, 조선 초기의 천문학은 천문학 자체보다 역산학의 발달로 보는 것이 무방하다. 특히 15세기 전반 동안 궁정에서는 세종의 직접적인 지휘 아래 많은 천문역산 연구와 함께 수많은 기구들이 제작되고 밤마다 하늘을 관측했다.

이 시기의 천문기상학 연구는 간의를 비롯한 천문기구의 제작과 사용, 측우기와 수표 등, 그리고 1442년에 완성된 칠정산(七政算) 등으로 대표된다. 세종 때의 과학기술 발달상을 보여주는 다른 예로는 〈농사직설 農事直說〉·〈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의방유취 醫方類聚〉·〈팔도지리지 八道地理志〉·〈총통등록 銃筒謄錄〉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기술에 관한 책이지만, 농업기술과 의약 지식, 박물학, 생물학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또 화기제조에 관한 기술은 여러 화학 분야의 지식을 전제한 것이며, 세종 때 발달한 인쇄기술 또한 화학 지식과 함께 물리학적 지식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 전기의 발달된 과학 분야 가운데 의학의 경우는 뒷날 허준에 의해 〈동의보감 東醫寶鑑〉으로 정리되었다.

후기

1601년 중국 베이징에 서양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정착해 그리스도교와 함께 서양의 새로운 과학 지식을 전파하기 시작하자 그 영향은 바로 조선에 미치기 시작했다. 특히 해마다 1번 이상 베이징에 파견된 조선 사신들을 통해 서양의 과학기술 지식이 전파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서양 과학의 영향은 실학자들 사이에서 강하게 나타난다.

이익은 공자가 다시 태어난다면 서양 천문학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면서 서양 과학의 새로운 지식을 인정했으며, 홍대용이 동양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지전설(地轉說)을 주장한 것도 사실은 서양 과학지식을 독창적으로 해석해 스스로 도달한 결론이었다(→ 서학). 18세기말부터는 박제가와 정약용 등이 중국에 와 있는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서양의 앞선 과학기술을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 일도 있었지만, 그리스도교의 위협을 피부로 느끼고 있던 양반 지배층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문에 불과했다. 서양 과학기술의 수용에 상당한 진전을 보이기 시작한 일본과 중국에 비해 조선은 이미 과학기술을 수용하는 국제 경쟁에서 뒤진 채 최한기 같은 극소수의 학자들은 중국에서 나온 과학기술서를 국내에 번안해 들여오고 있을 따름이었다. 중국에서의 아편전쟁과 그후의 참담한 실상, 그리고 미국에 의해 개국당한 일본의 경우는 조선의 지배층에게도 상당한 위기의식을 불어넣었다. 1860년대의 실권자 흥선대원군은 서양기술을 배워 서양을 물리치겠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의식이 제대로 근대 과학기술의 습득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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