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생 | 1368. 12. 3, 프랑스 파리 |
---|---|
사망 | 1422. 10. 21, 파리 |
국적 | 프랑스 |
요약
프랑스의 왕(1380~1422 재위).
별칭은 친애왕 샤를(Charles le Bien-Aim), 광인왕 샤를(Charles l'Insens
).
즉위초에는 나이가 어렸고 나중에는 주기적으로 정신병 발작을 일으켰으므로 왕위에 오래 있었지만 이름뿐인 왕이었다.
1380년 10월 25일 11세의 나이로 랭스에서 즉위해 1388년 그가 친정(親政)을 선언하기까지 삼촌들이 섭정을 맡았다.
그동안에는 그의 삼촌들 및 그들이 만든 12인평의회라는 행정기구가 프랑스를 통치했다. 1382년부터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가 이 평의회를 이끌었다.
플랑드르 백작령을 물려받은 필리프는 잉글랜드의 플랑드르에 대한 개입을 막기 위해 독일과 동맹을 맺어야 했으므로 바이에른의 이자벨(이자보)과 샤를을 결혼시켰다(1385. 7. 17). 또한 필리프는 샤를에게 자기 아내의 숙모인 브라반트의 잔을 지원하도록 하고, 1388년 8월에는 헬데를란트의 빌렘 공작에 대한 원정에 나서도록 했다. 그러나 샤를은 곧 빌렘과 화평하게 되자 프랑스로 돌아왔다.
샤를이 친정하기로 결심한 것은 이때(1388. 11. 2)였다. 그의 삼촌들은 물러나고 아버지 샤를 5세의 신하들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정부 기구의 개편과 개혁이 시작되었으며, 1389년초에는 많은 법령이 공포되었다. 그해 겨울 그는 아비뇽에 있는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를 찾아가 클레멘스를 로마 교황에 앉힘으로써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의 세력을 증대시킬 계획을 논의했다.
이 계획이 알려지자, 1337년 이래 프랑스와 전쟁(백년전쟁) 상태에 있던 잉글랜드와 협상이 재개되었다. 잉글랜드 왕 리처드 2세는 로마 교황 보니파키우스 9세를 지지했다. 화평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던 1392년 샤를은 열병을 앓아 정신병 발작을 일으켰다.
이때를 시작으로 그는 평생 44번의 발작을 일으켰다. 그는 3~5개월 간격으로 발작을 일으켰는데, 한번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면 3~9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왕권은 쇠퇴하고 부르고뉴 공작과 오를레앙 공작이 권력을 잡기 위해 경쟁하기 시작했다. 부르고뉴 필리프의 후계자 장은 1407년 오를레앙 공작 루이를 죽이고, 잉글랜드 왕 헨리 5세와 손을 잡았다. 헨리는 아쟁쿠르 전투(1415)에서 프랑스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1418년 12월 15세 된 도팽(왕세자)은 스스로를 섭정으로 선포했으나, 샤를은 1420년 5월 이자벨의 영향을 받아 딸인 발루아의 카트린과 잉글랜드 왕 헨리 5세의 결혼을 위한 트루아 조약에 서명했다. 마치 도팽이 샤를의 친아들이 아닌듯이 헨리가 프랑스의 섭정이자 왕위계승자로 선포되었다. 1422년 샤를 6세가 죽은 뒤 루아르 강 북쪽의 프랑스 땅은 잉글랜드의 통치를 받게 되었고, 영국이 지배하던 아키텐을 제외한 남부 프랑스는 뒷날 샤를 7세가 된 왕세자가 통치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