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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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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미상 |
국적 | 고구려, 한국 |
요약 고구려의 왕족.
연정토(淵淨土)의 아들, 보장왕의 서자 또는 외손자라고도 전한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도 그 유민의 저항으로 당의 지배정책은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 그는 고구려가 멸망하자 서해안의 사야도(史冶島:지금의 덕적도)에 피신해 있었는데, 당군의 압박을 받은 검모잠(劍牟岑)이 한성으로 근거를 옮겨 그를 왕으로 삼고 신라의 원조 아래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던 중 두 사람 사이의 불화로 안승이 검모잠을 죽인 뒤 4,000여 호를 거느리고 신라로 망명하자, 신라는 670년(문무왕 10)에 그를 금마저(金馬渚:지금의 익산)에 있게 하고 고구려 왕으로 봉했다.
신라가 백제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한 뒤, 안승은 674년 신라로부터 다시 보덕국왕(報德國王)으로 봉해졌고, 680년에는 문무왕의 조카와 혼인했다. 683년(신문왕 3)에 신라의 신문왕은 그를 경주로 이주시켜 신라 관등의 제3등 소판(蘇判)을 주고 김씨 성을 내리는 한편 집과 토지를 주었다. 신라는 그를 금마저에서 격리시킨 뒤 그 지역에 대한 직접지배를 관철하려 했던 것이다.
684년 금마저에 남았던 안승의 족자(族子) 장군 대문(大文)이 모반을 꾀하다가 죽음을 당했고, 나머지 사람들이 신라의 관리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다. 신라는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그 무리를 남쪽으로 옮기고 금마저를 금마군(金馬郡)으로 편제했다.→ 보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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