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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일제강점기의 어용사학자들이 주장한 식민사학에 저항해 한민족의 기원을 밝혀내고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함으로써 한국역사의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발전을 강조한 역사학. 식민사학은 한민족의 부정적인 부분만을 부각하여 나아가 한국의 역사를 왜곡했던 학문인데, 이에 애국계몽기의 학자들이 주체적으로 행동했던 역사 영웅들의 업적을 널리 알려 대항했다. 또한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은식과 신채호 등이 이에 참여하면서 <한국통사>, <조선상고사> 등을 저술하여 민족사학이 단순히 일제에 대항하는 것을 떠나 기존의 역사관을 비판하고 독립운동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질 수 있게 했다. 하지만 민족사학은 학문의 특성상 일제강점기에는 탄압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광복 후에는 학자들이 학계를 떠나고 민족이 분단하면서 오랜 기간 계승되지 못했다.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면서 식민사학을 널리 유포시켰는데, 그 내용은 한민족의 타율성·사대주의·정체성 등 부정적인 측면만을 의도적으로 부각시켜 한국사를 왜곡시킨 것이다.
일본의 한반도 침략이 본격화되고 일본 어용학자들에 의한 한국사 왜곡이 확산되자, 애국계몽기의 학자들은 민족사를 바로잡고 주체적인 역사인식 체계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은 한국역사에서 외적을 물리친 민족 영웅의 업적을 찬양하여 식민사관에 대항하기도 했으며, 임태보(林泰輔)의 〈조선사〉를 번안한 현채(玄采)의 〈동국사략 東國史略〉은 초기의 식민사학이 강조한 한사군의 문제와 '임나일본부' 문제를 약화시키거나 부정하면서 실학자들의 연구를 이어받아 삼한정통론(三韓正統論)을 주장했다.
또 식민사학이 의도적으로 신화로 처리한 단군문제도 역사적인 사실로 강조했다. 그러나 이들의 역사의식은 충군(忠君)·충효를 기초로 하고 영웅·위인·호걸 등의 활동을 민족사 발전의 중요한 동인으로 인식하는 차원에 머물러 있었으며, 또 대부분의 역사서술은 전근대적인 편년체적 서술방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한일합병 이후 식민지 시기로 들어와서 일제 식민사학의 횡포가 더욱 심해지자, 이에 대항해 '민족사학'으로 불리는 뚜렷한 학풍의 형성을 보게 되었다.
박은식(朴殷植)은 직접 독립운동에 참가하면서 근대 이후 일본의 침략과정을 서술한 〈한국통사 韓國痛史〉와 침략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사로서 〈한국독립운동지혈사 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저술했다.
박은식은 식민사관에 대항하여 한국근대사를 주체적인 관점에서 서술하는 한편, 그 역사관에서는 충군주의적 한계를 넘어섰다. 그는 국가나 민족의 흥망은 국혼(國魂)의 존재 여부에 달려 있고, 이 국혼은 바로 역사에 담겨 있는 것이라 주장했다. 따라서 독립정신을 함양하고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체적인 역사서술과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비록 정신주의적·관념적 역사관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역사연구와 서술도 독립운동의 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신채호(申采浩)도 애국계몽기에 활약했고 독립운동전선에 직접 뛰어들어 활동하면서 역사연구에 있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주로 고대사 연구를 중시하여 〈조선사연구초 朝鮮史硏究草〉·〈조선상고사 朝鮮上古史〉 등을 저술했다.
여기서 그는 고구려를 비롯한 고대국가들은 독립성과 민족적 패기가 있었으나, 중세 이후로 오면서 그것이 없어지고 사대주의로 빠져들면서 쇠퇴해갔다는 견해를 폈다. 따라서 그는 식민지 아래서 민족적 패기를 되살리고 독립운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고대사 연구에 몰두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채호의 역사관은 단순한 고대사의 영광을 되살리는 데 한정되지 않았다. 그는 기존의 보수적 역사관을 비판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1923년에 쓴 〈조선혁명선언〉에서는 독립운동을 혁명으로 이해하고 민중은 이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며 민중의 직접혁명을 통해서만 혁명으로서의 독립이 가능하다고 했다. 또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본 이른바 투쟁사관을 내세웠다. 독립운동전선에 참가했던 박은식·신채호 등에 의해 성립 발전한 '민족사학'은 정인보(鄭寅普)·안재홍(安在鴻)·문일평(文一平) 등에게 계승되었다.
이들은 실학자들의 저술을 정리·출판하면서 민족의 학문적 자산을 계승하는 한편 식민사학에 대항하는 사론(史論)을 확립해나갔다. 정인보는 저서 〈조선사연구〉에 실린 〈오천 년 간 조선의 얼〉에서 역사의 본질을 '얼' 즉 민족정신에서 찾는 '얼사관'을 정립했다. 그는 일본 어용사학자들의 식민사학에 대항하기 위해 한국역사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민족혼을 찾아 체계화함으로써 식민지배 아래에서의 민족주의를 정립·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안재홍 역시 국사연구에 전념해 〈조선상고사감 朝鮮上古史鑑〉을 썼다. 단군조선에서 삼국시대까지 한국역사를 고조선 사회의 발전과정이라는 안목으로 정리하여 식민사학이 왜곡한 고대 한반도에서의 북방문화와 남방문화의 이중성을 부인했다.
또 문일평은 역사발전의 원동력으로서 민중의 역할을 평가하고 역사학의 대중화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고대사회에서의 민족문화권을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여 북으로는 만주까지, 남으로는 일본에까지 확대시킴으로써 식민사학론의 역사왜곡에 대항했다. 민족사학은 식민사학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학풍이었기 때문에 식민지 시기에는 탄압을 받아 발전하지 못했다. 8·15해방 후에는 그 연구자들이 학문생활을 떠나고 또 민족이 분단됨으로써 상당한 기간 동안 계승·발전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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