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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79. 2. 21, 프랑크푸르트암마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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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61. 10. 25, 베를린 |
국적 | 독일 |
요약 당대에 영향력을 미쳤던 '역사법학파'의 창시자로서 그당시 법률체제의 의미와 내용을 그 역사적 기원과 변형 양식에 따라 조사·분석할 것을 주장했다. 자비니는 로렌에서 독일로 이민온 지주 귀족의 후손으로 괴팅겐대학교와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800년에 학위를 받고 곧 교편을 잡았다. 부유하고 사회적 지위도 높았으므로 그는 뛰어난 재능을 모두 학문에 바칠 수 있었다. 1803년에는 〈소유론〉으로 명성을 얻었는데, 이 책은 19세기 법학서의 선구가 되었다. 그는 법이 언어와 마찬가지로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의 느린 속도로 성장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입법과 법전은 현존하는 법체계를 문자로 표현한 데 지나지 않으며 그 의미와 내용은 주의 깊은 역사적 탐구를 통해서만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법과학이 역사적·체계적이어야 하며 따라서 역사적 사료에 담겨 전해오는 로마 법의 내적 일관성을 보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1826년에는 프로이센 법전개정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며 1842년에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새로 새워진 법령개정부의 장관이 되었다.
개요
당대에 영향력을 미쳤던 '역사법학파'의 창시자로서 그당시 법률체제의 의미와 내용을 그 역사적 기원과 변형 양식에 따라 조사·분석할 것을 주장했다.
교육과 초기활동
자비니는 로렌에서 독일로 이민온 지주 귀족의 후손으로 괴팅겐대학교와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800년에 학위를 받고 곧 교편을 잡았다.
부유하고 사회적 지위도 높았으므로 그는 뛰어난 재능을 모두 학문에 바칠 수 있었다. 1803년에는 〈소유론 Das Recht des Besitzes〉(6판, 1848)으로 명성을 얻었는데, 이 책은 19세기 법학서의 선구가 되었다. 1808년 자비니는 바이에른에 있는 란트슈트대학교의 로마 법 교수로 갔고, 1810년에는 당시 새로 세워진 베를린대학교에 초빙되었다.
곧 그는 베를린대학교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교수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으며 계속 이곳에서 가르쳤다.
법철학
1814년 나폴레옹에 대항한 해방전쟁으로 독일에 민족주의 물결이 밀려오자 하이델베르크의 법학교수 A.F.J. 티바우트는 모든 독일의 국가에 적용시킬 수 있는 통일된 민법전을 마련할 것을 요구했다.
자비니는 독일의 법을 성급히 법전으로 편찬하려는 이러한 요구에 반대하면서 법률사상이 새로운 길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유명한 소책자 〈입법 및 법률학에 대한 현대의 사명에 관하여 Vom Beruf unserer Zeit für Gesetzgebung und Rechtswissenschaft〉를 발표했다.
자비니에게 있어서 법전편찬 작업은 공동체 정신에 대한 깊고도 폭넓은 인식을 반드시 필요로 했기 때문에 성급한 법전화 시도는 피해야 되는 것이었다. 그의 법학관은 낭만주의 운동에서 영향받은 것이었다. 낭만주의는 독일에서 형성된 것으로 독일 민족의 가장 순수한 부족 기원, 그들의 민요와 민담, 독특한 민족정신(Volksgeist) 등에 귀 기울이려는 운동이었다. 이때문에 낭만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민족정신은 다양한 측면에서 탐구되어야 할 궁극적인 기본사항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법률은 합리적·형식적인 입법을 통해 고안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독특한 정신에서 비롯되어 관습은 물론, 훨씬 나중에는 판사들의 정식 결정을 통해 스스로 표현되는 것이다. 자비니의 고전적 말에 따르면 법은 다음과 같다(독일민법전). "어디까지나 처음에는 관습과 민중적 신념에 의해, 그 다음에는 판결에 의해 발전한다. 따라서 그 과정은 입법자의 자의(恣意)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부에서 소리 없이 움직이는 힘에 의해 진행된다."
그는 법이 언어와 마찬가지로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의 느린 속도로 성장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입법과 법전은 현존하는 법체계를 문자로 표현한 데 지나지 않으며 그 의미와 내용은 주의 깊은 역사적 탐구를 통해서만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법학은 법전화 시도에 반대했고 또한 민족의 특성과 관습을 고려하지 않고 일반적·보편적 원리에서 법이론을 끌어내려는 합리주의 사상가들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자비니는 역사학적 조사를 통해 현존하는 법률을 밝혀내려 했다. 이 획기적인 팜플렛이 나온 직후인 1815년 그는 K.F. 아이호른 및 J.F.L. 괴셴과 함께 〈역사법학 시보 Zeitschrift für geschichtliche Rechtswissenschaft〉를 발간했는데 이 잡지는 새로운 역사법학파의 기관지가 되었다.
같은 해 그는 〈중세 로마 법의 역사 Geschichte des römischen Rechts im Mittelalter〉(1815~31)를 펴내기 시작했다. 엄격한 비평술을 사용한 동시에 방대한 1차 사료를 참고로 해서 저술된 이 작품은 오늘날 중세법 연구의 토대가 되었다.
자비니는 과학적인 독일 민법을 확립하려 했다.
법적 방법론에 대한 그의 접근방식은 학문에 전념한 시기인 1802~03년 마르부르크대학교의 강의에서 처음 나타났다(이 강의는 1951년에 〈야코프 그림에 의한 법적 방법론 Juristische Methodenlehre, nach der Ausarbeitung des Jakob Grimm〉으로 출판되었음). 그는 여기서 법과학이 역사적·체계적이어야 하며 따라서 역사적 사료에 담겨 전해오는 로마 법의 내적 일관성을 보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후기저서
자비니는 자신의 체계적인 접근방식을 적용해서 당시 유럽에서 적용되고 있는 로마 법에 대한 상세한 분석인 논문집 〈현대 로마 법 체계 System des heutigen römischen Rechts〉(8권, 1840~49)를 펴냈다.
여기에는 또한 국제사법에 대한 그의 체계가 담겨 있다(국제법). 1817년 프로이센 추밀원 의원이 되었고 1819년에는 베를린 항소법원과 라인 지방의 파기원(破棄院)에 임명되었다. 1826년에는 프로이센 법전개정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며 1842년에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새로 새워진 법령개정부의 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1848년 혁명으로 정부에서 물러났다. 1850년 자신의 논문을 묶어 〈잡기(雜記) Vermischte Schriften〉로 펴냈고 1851~53년에는 현대 로마 법에 관한 연구를 보충한 〈계약법 Das Obligationenrecht〉(2권)을 발간했다.
평가
자비니는 무엇보다도 현재의 법률제도가 과거의 것과 연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밝히고, 법사회학의 토대를 이루었으며 지금은 모든 법학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많은 비평방법을 발전시킴으로써 법학에 지속적으로 기여한 선구적인 법률학자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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