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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76. 8. 27, 덴마크 코펜하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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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31. 1. 31, 프로이센 본 |
국적 | 독일 |
요약 사료 비평 방법으로 역사 연구에 새 시대를 연 독일의 역사가(→ 회의주의).
니부어 이후의 모든 역사가들은 어떤 의미에서 그의 덕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덴마크의 탐험가 카르스텐 니부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킬대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혼자 공부했는데, 아마도 이러한 경험 때문에 나중에 학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아버지의 충고를 따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1년을 보내고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덴마크 재무장관인 쉼멜만 백작의 개인비서가 되었다가 1804년 국립은행의 은행장이 되었다.
1806년 프로이센 총리인 슈타인 남작의 부탁을 받고, 프로이센에 가서 덴마크에서 지녔던 것과 유사한 직책을 맡았다. 그러나 슈타인이 물러난(1808) 2년 뒤 총리 하르덴베르크의 정책에 반대해 직책을 사임하고 국가사료편찬위원이 되었다. 동시에 베를린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됨으로써 새로 설립한 베를린대학에서 강의할 자격을 얻었다.
1810년 베를린대학에서 로마 역사에 대한 일련의 강의를 했는데 이것은 나중에 완성된 대작 〈로마사 Römische Geschichte〉(3권, 1811~32)의 밑바탕이 되었다. 1816년에 프로이센 대사로 바티칸으로 갔다가 1823년 본으로 돌아와 은퇴했다.
니부어의 〈로마사〉는 개별사 연구에 신기원을 이루었고 역사에 대한 일반적 개념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니부어는 학문에 특별한 공헌을 했으나(가령 사회문제나 농업문제에 관한 연구), 이론들 중 일부는 과장된 것이 있고 결론이 잘못된 것도 있다. 그러나 그가 학계에 남긴 불후의 공로는 그의 방법론이다.
당시에도 이미 고전 사료들의 오류는 인정되고 있었지만 괴테가 말한 '능동적 회의'(tätige Skepsis), 즉 과학적인 비평방법에 바탕이 되는 건설적 회의를 발전시켜 고전 사료를 검토한 사람은 니부어였다. 그는 사료 특히 전승시(傳承詩)와 전승 신화들을 시기적으로 분석하여 가치없는 사료들은 버리고 필요한 것들을 골라내어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함으로써 19세기 독일에서 역사학이 크게 발전할 수 있는 기초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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