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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피스는 이집트가 다시 한 번 통합되었던 중(中)왕국 시대(BC 1938~1600경?)에도 계속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제12왕조(BC 1938~1756)의 공식 수도는 알파이윰 입구 근처에 있는 리슈트였다.
제12왕조의 여러 왕들은 멤피스 피라미드 지역의 남쪽 끝에 있는 다슈르에 피라미드를 세웠으나, 중왕국의 기념물 중 대다수는 리슈트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이 시대에도 예술과 행정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곳은 멤피스라고 여겨지며, 제12왕조의 거의 모든 통치자는 프타 대신전에 건물을 더 지었다.
제12왕조에 뒤이어 또다시 정치적·사회적 혼란 시대가 다가왔다.
이러한 제2중간기(BC 1630경~1540)의 특징은 아시아 계통의 힉소스족이 이집트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AD 1세기의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그가 살리티스라고 부르는 힉소스족의 왕이 멤피스를 수도로 삼아 그곳에서 상이집트와 하이집트 모두를 다스렸다고 한다. 많지 않은 비문과 고고학 유물로 보면 그 침략자들이 북부 이집트를 지배했다는 가정을 어느 정도 뒷받침해주기도 하지만, 그들의 수도는 대체로 나일 삼각주에 있는 타니스 근처의 아바리스에 자리잡았다고 여겨진다.
제17왕조 왕으로 힉소스에게서 이집트를 되찾아오는 재정복사업을 시작했던 카모세가 남긴 기록들은 그가 엘레판티네에서 헤르모폴리스마그나에 이르는 영역을 차지했다고 말해주지만, "(침략자들을) 우회해 멤피스까지 갈 수는 없었다"고 한다. 상이집트의 테베를 본거지로 한 제18왕조가 힉소스 족을 완전히 몰아내고 통일 왕국을 회복한 것과 더불어, 멤피스는 새로운 번영의 시대를 맞이했다.
일부 학자들은 멤피스가 한번도 정치적 우위를 잃은 적이 없었고, 신왕국 시대에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테베는 종교의 중심지였을 뿐 이집트의 실질적인 정치적 수도는 바로 멤피스였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가설을 증명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며, 그토록 엄밀하고 배타적으로 두 도시의 역할을 구분하는 것은 이집트 문화에 비추어볼 때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멤피스가 도시로서 중요성을 지니게 된 주된 이유는 그것이 신성한 종교적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몇몇 왕의 대관식은 멤피스에서 행해졌고, 왕의 초자연적인 힘을 되살리고 천명하는 대관식을 재연하는 세드 축제도 역시 멤피스에서 열렸다.
신왕국시대(BC 1539~1075)에 멤피스는 아마 이집트의 제2수도 또는 북부 수도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한때는 그곳이 왕자가 주로 거처하던 곳으로 여겨진다. 제18왕조(BC 1539~1292)의 여러 비문들은 스핑크스 근처 사막에서 왕이 사냥놀이를 했음을 말해준다.
아멘호테프 2세(BC 1426?~1400 재위)는 멤피스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고위 사제의 직책을 맡았다. 그와 그의 아들인 투트모세 4세(BC 1400~1390 재위)는 모두 기자에 비문을 남겼다. 테베의 신(神)인 아몬이 점점 더 세력을 넓히긴 했지만 프타는 여전히 판테온에 있는 주된 신 가운데 하나였다. 제18왕조의 거의 모든 왕들은 대신전에 건물을 증축하거나 대신전을 다시 세웠다. 투트모세 1세, 투트모세 4세, 아멘호테프 3세는 예배당을 건설했다.
아멘호테프 3세의 아들로서 종교개혁가인 아크나톤은 멤피스에다 아톤 신에게 바치는 신전을 건설했다. 이 시대에 멤피스의 묘역에 만들어진 수많은 멋진 개인 무덤들은 그곳에 꽤나 커다란 궁정이 있었음을 입증해준다. 신왕국시대에 교역과 대외정복 그리고 여행이 활성화됨에 따라 멤피스는 이집트와 더불어 점점 더 세계주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멤피스는 나일 강변에 있지는 않았지만 운하로 나일 강과 연결되어 있었고, 상업 중심지로서 중요한 도시였을 것이다. 도시의 특수한 구역들은 그곳에 거주하는 외국인 이주자들(노예·전쟁포로·상인)의 출신 이름을 따서 이름지었다.
'히타이트족 구역'이라고 불렀던 한 구역이 알려져 있고, 그뒤의 시대에는 카리아인과 페니키아인이 거주했던 구역들이 알려져 있다.
제19왕조(BC 1292~1190) 때에는 새로운 왕궁이 훨씬 북쪽으로 올라가 삼각주에 있는 페르라메수에 세워졌으나, 멤피스는 여전히 중요한 도시였다. 대신전이 다시 건설되었는데 그 시대의 왕들은 앞선 왕들이 세운 기념물을 해체하여 건축 자재를 얻어냈다. 다시 사용된 벽돌의 일부는 그 도시에 있던 건물에서뿐만 아니라 멤피스의 묘역에 있던 신전들과 피라미드에서도 나온 것이었다.
람세스 2세(BC 1279~13 재위)는 신전 안에 여러 거상(巨像)을 세웠다. 람세스 2세의 아들로서 프타를 모시는 고위 사제였던 카엠웨세가 짓기 시작한 미궁 형태의 사라페움은 황소신 아피스에게 바친 신전이다.
제20왕조가 끝날 때쯤 통일 왕국은 다시 무너지기 시작했다. 공식 수도는 타니스와 테베였으나 기록에는 멤피스에 있는 왕궁이 계속 언급되고 있다. 아피스 숭배가 점점 인기를 끌면서 사라페움 신전의 규모도 더욱 커졌다. BC 8세기에는 누비아 왕 피앙키가 이집트를 정복하여 통일 왕국을 재건했다.
이집트 남쪽에 있는 누비아(쿠시)는 여러 세기 동안 이집트의 정치적·문화적 영향을 받았다. 피앙키의 원정을 묘사한 한 비문에는 멤피스의 포위 장면이 나와 있다. 거기에서 묘사된 멤피스는 요새화된 성벽이 둘러싸고 있고, 도시를 에워싼 운하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되는 물이 그 주위를 흐르고 있었다.
피앙키는 멤피스를 함락했으나 그 도시를 그의 동생이자 후계자인 샤바카에게 넘겨주면서 그에게 왕의 칭호를 붙여주었다.
이 왕이 멤피스를 수도로 삼았음은 몇 가지 증거로 뒷받침되고 있다. 그러나 쿠시 왕조는 그뒤 얼마 안 가 아시리아인이 이집트를 침략했을 때 무너지고 말았다. 아시리아 왕 에사라돈(BC 680~669)이 남긴 기록은 BC 690년에 파라오가 된 타하르카(타르쿠)라는 이집트 왕의 왕궁이 있던 멤피스가 포위되어 파괴된 사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에사라돈 사후 타하르카는 멤피스를 되찾았으나 BC 667년 그는 아시리아의 아슈르바니팔에 의해 도시에서 쫓겨났다.
BC 612년 아시리아가 멸망하자 이집트는 제26왕조 하에서 잠시 독립을 누렸으나 얼마 가지 않아 새로운 침입자가 나타났다. BC 525년 멤피스는 페르시아 왕 캄비세스에게 함락되었고 BC 332년에는 페르시아의 지배가 끝나고 도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새로운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세울 계획으로 멤피스를 그의 본부로 삼았다. 알렉산드로스가 바빌론에서 죽자 그의 시신은 이집트로 옮겨져 멤피스에 잠시 머문 뒤 알렉산드리아에 안장되었다.
헬레니즘 시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BC 304~30) 때 멤피스는 세계주의적 성격을 그대로 간직했고 꽤 많은 그리스인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 그리스 로마 시대에 그 도시에서 살았던 다양한 종족들 가운데 일부는 이 시대에 만들어진 독특한 테라코타 두상(頭像)에 묘사되어 있다.
BC 1세기 로마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 멤피스는 여전히 중요한 속주(屬州)의 수도로 여겨졌다.
그리스도교가 성장하여 열광적인 그리스도교도들이 이교(異敎)신전들을 훼손하고 파괴하자 멤피스는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AD 5세기에는 그리스도교 수도원인 아파 예레미아가 사카라의 신성한 무덤들 사이에서 지어졌다. 멤피스는 계속 쇠퇴하다가 AD 640년 이슬람인들이 이집트를 정복하자 완전히 사멸해버렸다. 바빌론이라는 요새가 멤피스에서 나일 강을 건너는 다리의 동쪽 끝부분에 세워졌고, 그뒤 아랍의 장군 아메르 이븐 알 아스가 오랫동안 포위 공격하여 그 요새를 점령했다.
멤피스는 버려졌고 얼마 남지 않은 건물들마저도 해체되어 이웃 마을들과 10세기에 건설된 도시 카이로에서 석재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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