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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4세

다른 표기 언어 Ludwig 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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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283(?), 뮌헨
사망 1347. 10. 11, 뮌헨
국적 신성 로마

요약 상(上)바이에른(1294~) 및 통일 바이에른(1340~47)의 공작.
(영). Louis Ⅳ. 별칭은 바이에른의 루트비히(Ludwig der Bayrisch).

1314년부터 독일 왕을 지낸 신성 로마 제국 황제(1328~47 재위)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으로서는 최초로 황제위에 오른 인물이다. 재위기간에 끊임없는 외교·군사 분쟁을 벌였는데, 이는 교황청으로부터 독립된 제국의 독자적인 황제선출권을 수호하고 그 자신의 지위를 굳히며, 자기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루트비히는 자기 가문을 합스부르크나 룩셈부르크 같은 제왕 가문의 지위로 끌어올리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문 전체가 단일한 정치 의사에 따라 움직이는 통일체가 되어야만 했으나 그는 그것을 이루지 못했다. 어쨌든 통일성을 이루기 위해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외교적·법적 수단을 동원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으며 1346년의 상(上)바이에른 법전(1335년에 처음 제정)은 이러한 노력을 보여주는 기념비적 업적으로 남아 있다.

그의 뒤를 이은 카를 4세는 제국 내에서 루트비히의 자취를 없애기 위해 온갖 애를 썼다. 그러나 카를의 유명한 칙령인 1356년의 금인칙서는 사실 루트비히 치하에서 발전한 제국의 기본법률들을 최종적으로 성문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성문법 덕택에 신성 로마 제국은 사법적 권능을 휘두르던 아비뇽 교회에 맞서나갈 수 있었다.

루트비히는 용기와 끈기를 지녔으나 엄격주의에 빠지지는 않았다. 쾌활하고 당당한 태도로 사람들을 사로잡았고 감정변화가 심해 알 수 없는 인물로 비칠 때도 있었지만 외교적 솜씨와 함께 유연함을 갖춰 호감을 샀다. 그는 타고난 정치가였으며 제왕의 영예(honor imperii)를 최고의 지도 원칙으로 삼았고, 가장 암담했던 시기에도 황제권에 대한 간섭을 전혀 허용하지 않았다. 성공 여부만을 놓고 루트비히를 평가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일 것이다. 그는 운이 없게도 재능과 실력을 겸비한 강적들과 계속해서 마주쳐야 했던 것이다.

초기생애

팔라틴 백작이며 상바이에른 공작이던 루트비히 2세의 둘째 아들로 혈통상으로는 왕위 계승권이 없었다. 1294년 아버지가 죽자 11세의 루트비히는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던 루돌프 1세의 딸인 어머니 메히틸트와 당시 20세였던 형 루돌프의 보호를 받았으나 이내 정치 암투에 휩쓸려 들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위 계승문제에서 그의 형은 나사우의 아돌프 편을 들었고, 어머니는 아돌프를 몰아내려 하는 자기 동생 오스트리아의 알브레히트 1세 편을 들었다. 어머니는 루트비히를 뮌헨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기 위해 빈에 있는 루트비히의 외삼촌의 궁정으로 보냈으며 그곳에서 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사촌들인 프리드리히·레오폴트와 함께 자라났다. 훗날 그는 정치적 결정을 내릴 때 친인척의 영향을 배제하기는 했지만 이러한 성장환경이 그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다.

1298년 7월 2일 괼하임에서 알브레히트가 나사우의 아돌프에게 승리를 거둠에 따라 루트비히는 법적으로 그의 것이지만 그때까지 형의 방해로 갖지 못했던 정부 내의 직책을 차지할 수 있었다. 형 루돌프와는 1308년 알브레히트 황제 암살 이후 다시 충돌했으나, 1310년 영토를 분할함으로써 잠시 화해할 수 있었다. 루트비히는 하(下)바이에른의 사촌들에 대한 후견인 자격을 내세워 분할 협상을 유리하게 타결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하바이에른은 전통적으로 오스트리아에 대한 반감이 깊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왕가와 분쟁이 벌어졌다.

루트비히는 1313년 6월 21일 타협을 통해 자기 형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뒤 11월 9일 가멜스도르프에서 합스부르크 왕가를 결정적으로 패배시켰다. 그러나 한편 8월 24일 황제 하인리히 7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비게 된 독일 왕위 계승문제는 아직 협상거리로 남아 있었다. 당시 제국은 선거군주제 국가였으나 백작들은 더 이상 후보 자격에 들지 못했다. 각기 오스트리아(1282)와 보헤미아(1310)를 장악한 합스부르크가와 룩셈부르크가는 독일의 양대 세력으로 등장해 왕권을 놓고 다투었다. 내분으로 갈라져 있지 않았더라면 비텔스바흐 가문도 아마 제3의 경쟁세력으로 나섰을 것이다.

합스부르크에 대한 승리에 힘입어 1314년 루트비히는 죽은 황제의 아들 보헤미아의 얀(요한)을 왕위에 앉히려다 실패한 룩셈부르크 가문의 후보가 되었다. 그는 루돌프 왕의 손자였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은 그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1314년 10월 19~20일에 있었던 2차례의 선거에서 루트비히는 오스트리아의 프리드리히 3세 대립왕보다 더 확실한 후계권을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유리하지 못했고 결국 둘은 11월 25일에 각자 제위에 올랐다. 연이은 군사적 승리 끝에 루트비히는 자신에게 반대표를 던졌던 자기 형 루돌프로부터 상바이에른과 라인 강변 팔츠 지방의 지배권을 완전히 빼앗았다. 그뒤 분쟁이 이어지다가 루돌프와 그 부인인 나사우의 마틸데, 큰 아들 아돌프가 모두 죽고난 뒤에야 비로소 분쟁이 완전히 종식되었다.

비텔스바흐 가문을 바이에른계와 팔츠계로 나눈 파비아 협정(1329)이 타결된 이후 루트비히는 제국의 정책을 추진할 때 팔츠계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하바이에른의 사촌들과는 우호관계를 유지하지 못해 1340년 그 가계의 대가 끊어질 때까지 계속 분쟁에 시달렸다.

루트비히 4세와 합스부르크 분쟁

루트비히에게 가장 긴박했던 문제는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분쟁이었다. 1322년 9월 28일 뮐도르프에서 벌어진 전투 때 승리한 루트비히는 프리드리히 왕과 그 형제들을 포로로 붙잡았다. 1323년 4월 그는 당시 미성년인 큰 아들 루트비히에게 1319년부터 미결정 상태로 있었던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령의 지배권을 과감하게 넘겨주었다.

영토를 확장하려는 욕심으로 베틴 왕가와 세습동맹을 맺었으며 1324년에는 홀란트의 마르가레테와 2번째 결혼을 해 1345년 홀란트와 부속 영지들을 상속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상속으로 룩셈부르크의 요한(보헤미아 왕 )과는 사이가 나빠지게 되었다. 요한은 1320년 상(上)루자티아를 증여받았고, 이듬해 룩셈부르크 가문의 여자를 하바이에른의 대(大)하인리히 공작과 결혼시켰으며, 방계친척을 통해 에게를란트를 획득했음에도 만족하지 않았다. 룩셈부르크는 결국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으며, 이러한 움직임의 결과 전적으로 프랑스의 영향에 따랐던 교황청에서도 점점 루트비히를 적대시했다.

교황 요한 22세는 독일의 왕위분쟁을 이용해 나폴리의 로베르토를 이탈리아의 대리황제(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부재 때 나라를 다스림)로 임명했으며, 이탈리아의 기벨린(황제파)을 이단재판에 걸겠다고 위협했다(→ 가톨릭 교회). 그러나 루트비히측에서 임명한 대리황제가 교황과 로베르토에게 압력을 넣어 밀라노의 포위를 풀도록 만들었다. 결국 루트비히는 1324년 3월 파문당했다. 파문은 이후에도 해제되지 않아 루트비히의 지지자들에게 양심의 갈등을 겪게 했고 적대자들에게는 불복종을 변명하기에 좋은 구실이 되었다.

교황청과 그밖의 다른 적들이 보기에 그는 이제 단순한 바이에른의(바이에른 사람) 루트비히에 불과했으며 역사책에도 이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루트비히는 몇 차례 자기 자신의 포고령을 발표해 반격을 가했다. 그중에도 특히 유명한 1324년 5월 22일의 이른바 작센하우젠 탄원서는 오히려 교황을 이단으로 몰았다. 이 탄원서는 경솔하게도 교리 문제뿐만 아니라 제국과 관련된 헌법적 문제까지 다루고 있었다.

루트비히는 이점이 실수라는 것을 재빨리 깨닫고 그 파급효과를 유화시켰으나 오스트리아는 결국 프랑스와 룩셈부르크의 동맹에 가담했다(1324. 7. 27). 루트비히는 자신의 포로였던 프리드리히와 통치권을 나누어 갖는 데 동의함으로써 이러한 적대세력의 연합을 분열시켰다. 게다가 더 나아가서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의 반대를 무마하기 위해 교황이 프리드리히의 단일 통치권을 인정한다면 자신이 왕위에서 물러나기로 합의했다(1326. 1. 7). 그러나 교황청은 독일의 왕권 전쟁이 계속되기를 바라고 있었으므로 현실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교황청의 태도로 자신이 비정하게 이용당했음을 깨달은 프리드리히는 루트비히의 충실한 공동통치자로 돌아섰다.

황제 즉위

1326년 2월 레오폴트 공작이 죽자 루트비히는 대담하게 이탈리아 본토 내에서 교황청에 맞섰다.

기벨린(황제파)의 지지를 받아 1327년 5월 31일 밀라노에서 롬바르디아의 철왕관(鐵王冠)을 받아 썼으며, 1328년 1월 11일에는 로마에서 로마의 평민 대표들이 주는 황제의 관을 받아들였다. 이같은 이례적인 행동은 교황이 선출된 황제의 승인을 거부하고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로 그를 이단시하는 상황에서 비상조치로 취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루트비히는 주변의 설득에 따라 1328년 4월 18일의 포고령으로 교황의 폐위를 공식 선언했으며 대립교황의 임명을 지원했다.

그러나 새로 임명된 대립교황은 무능력했으므로 승리는 쉽사리 교황 요한 22세에게 돌아갔다. 더욱이 루트비히의 병력은 나폴리의 로베르토를 제압하거나 이탈리아에 안정된 질서를 수립하기에도 부족했으며, 그러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독일 내에서의 확고한 지배권도 서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 북쪽으로 돌아가, 1327년 2월 이래 이탈리아에 머무느라 떠나 있었던 트렌토에서 1329년의 성탄절을 맞았다.

프리드리히 왕이 1330년 1월 13일에 죽자 공동통치의 문제점이 해결되었다.

하지만 독일 내에 있던 루트비히의 적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보헤미아 왕 얀(룩셈부르크의 요한)은 1330년 그의 작은 아들 요한 하인리히를 카린티아(케른텐)티롤 가문의 상속녀 마르가레테와 결혼시켰다. 그러나 루트비히는 1331년 5월 31일 전략적으로 중요한 마르가레테의 유산 분할문제에 관해 합스부르크 가문과 비밀협약을 맺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이탈리아에서 대리황제 행세를 하던 보헤미아의 얀을 포위하고 이탈리아에서 철수하게 만들었다.

적들을 혼동시킬 목적으로 루트비히는 1333년 11월 19일 무수한 단서조항을 붙인 새로운 퇴위선언을 발표해 하바이에른의 사촌 하인리히에게 제위를 양도하겠다고 제안했다. 1335년 카린티아티롤 공작 하인리히가 죽자 루트비히는 합스부르크 가문과 맺은 비밀협약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카린티아를 합스부르크가에 넘겨주어야 했다.

그는 또한 최소한 티롤의 북부만이라도 자기 몫으로 건지기 위해 티롤 남부도 그들에게 주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은 카린티아를 굳게 확보할 생각으로 루트비히 몰래 룩셈부르크와 협정을 맺었으며 이에 따라 티롤 전체는 룩셈부르크의 손에 넘어갔다. 그결과 세력가였던 마인츠 대주교가 루트비히 편으로 넘어오고(1337. 6. 29),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도 그와 협정을 맺어(8. 26) 국제 관계에서 루트비히가 바람직한 동맹자임을 보여주었다.

왕위를 둘러싼 끊임없는 분쟁에 지친 독일인들은 한 치 양보도 없는 교황의 태도에 당혹감을 느꼈다.

결국 그들은 도시 행정관과 그밖의 대표자들을 통해 루트비히가 합법적인 통치자이며 교황청의 간섭을 배격한다고 주장했다. 루트비히가 프랑크푸르트 제국의회(Fidem catholicam:1338. 5. 17)에서 황제위 계승방침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자 도시들뿐만 아니라 제국의 성직자와 영주들도 지지했다. 이러한 지지에 힘입어 그는 프랑크푸르트(8. 3)와 코블렌츠에서 황제선출기본법(Licet juris)을 공포했고, 코블렌츠에서는 잉글랜드 왕을 만나 그에게 하(下)라인 지역의 대리황제 직책을 내렸다.

그러나 7월 16일 렌스에 모인 선제후들이 교황의 요구는 거부하면서도 루트비히에 대한 지지표명을 하지 않고 선거법 승인을 보류함에 따라 루트비히의 선거법 공포는 무의미해졌으며 왕위분쟁과 이단논쟁이 계속 들끊었다. 그러나 루트비히는 보헤미아의 얀을 계속 고립시키고 티롤에 대한 자신의 권리주장을 공식적으로 철회했다.

결국 1339년 얀은 이탈리아에 대한 모든 권리주장을 포기하고 스스로 루트비히의 봉신(封臣)임을 선언하며 루트비히를 황제로 인정했다.

루트비히 4세와 티롤 문제

변경지방의 리에주와 캉브레의 주교구(主敎區)를 제외한 제국의 모든 성직자들이 그의 통치에 복종하고 잉글랜드가 지원 의사를 비치자 루트비히는 나름대로 프랑스와 전쟁을 벌여 교황을 굴복시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1339년 9월 1일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고 1340년 1월 27일 겐트에서 자신을 프랑스 왕으로 선포했을 때 루트비히는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중재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티롤 문제가 모든 것을 망쳤다.

1341년 11월 카린티아티롤의 마르가레테가 자신의 룩셈부르크 출신 남편을 내쫓자 곧 루트비히는 부부간의 결합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마르가레테의 결혼은 무효였다고 선언하고, 홀아비인 자기 아들 브란덴부르크의 루트비히를 서둘러 그녀와 결혼시켰다(1342. 2. 10). 그러나 이는 잘못된 판단이었으며 이때문에 제국 전역에서 그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일어났다. 룩셈부르크 가문은 루트비히와 완전히 결별했고 잉글랜드와 전쟁을 벌이느라 경쟁자 지위에서 밀려난 프랑스 왕을 대신해 모라비아의 카를이 황제 후보자로 자처하고 나서는 결과를 빚었다.

루트비히는 하(下)루자티아를 양도하고 자기 딸을 결혼시키겠다고 함으로써 룩셈부르크 가문을 달래려 했으나 허사였다. 그들은 협상을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그와 동시에 강한 민족주의 성향을 지닌 신임 프랑스인 교황을 부추켜 루트비히에 대한 이단재판을 다시 제기하고 새 황제 선출을 요구하도록 만들었다(1343. 8). 그러자 루트비히는 이에 맞서 또다시 사퇴의사를 표명하면서 이번에는 자기 아들인 브란덴부르크티롤의 루트비히를 후임자로 내세웠다(1343. 9). 룩셈부르크 가문은 협상자세를 계속 유지했으나 결국 교황에게 크게 양보할 것을 약속한 모라비아의 카를이 비텔스바흐 가문의 2표를 제외한 모든 선제후들의 표를 얻어 1346년 7월 황제로 선출되었다.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어 준비를 하던 루트비히는 1347년 가을 뮌헨 부근에서 곰 사냥을 하던 중 심장마비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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