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다음백과

루트비히 4세와 합스부르크 분쟁

다른 표기 언어

루트비히에게 가장 긴박했던 문제는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분쟁이었다. 1322년 9월 28일 뮐도르프에서 벌어진 전투 때 승리한 루트비히는 프리드리히 왕과 그 형제들을 포로로 붙잡았다. 1323년 4월 그는 당시 미성년인 큰 아들 루트비히에게 1319년부터 미결정 상태로 있었던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령의 지배권을 과감하게 넘겨주었다.

영토를 확장하려는 욕심으로 베틴 왕가와 세습동맹을 맺었으며 1324년에는 홀란트의 마르가레테와 2번째 결혼을 해 1345년 홀란트와 부속 영지들을 상속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상속으로 룩셈부르크의 요한(보헤미아 왕 )과는 사이가 나빠지게 되었다. 요한은 1320년 상(上)루자티아를 증여받았고, 이듬해 룩셈부르크 가문의 여자를 하바이에른의 대(大)하인리히 공작과 결혼시켰으며, 방계친척을 통해 에게를란트를 획득했음에도 만족하지 않았다. 룩셈부르크는 결국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으며, 이러한 움직임의 결과 전적으로 프랑스의 영향에 따랐던 교황청에서도 점점 루트비히를 적대시했다.

교황 요한 22세는 독일의 왕위분쟁을 이용해 나폴리의 로베르토를 이탈리아의 대리황제(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부재 때 나라를 다스림)로 임명했으며, 이탈리아의 기벨린(황제파)을 이단재판에 걸겠다고 위협했다(→ 가톨릭 교회). 그러나 루트비히측에서 임명한 대리황제가 교황과 로베르토에게 압력을 넣어 밀라노의 포위를 풀도록 만들었다. 결국 루트비히는 1324년 3월 파문당했다. 파문은 이후에도 해제되지 않아 루트비히의 지지자들에게 양심의 갈등을 겪게 했고 적대자들에게는 불복종을 변명하기에 좋은 구실이 되었다.

교황청과 그밖의 다른 적들이 보기에 그는 이제 단순한 바이에른의(바이에른 사람) 루트비히에 불과했으며 역사책에도 이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루트비히는 몇 차례 자기 자신의 포고령을 발표해 반격을 가했다. 그중에도 특히 유명한 1324년 5월 22일의 이른바 작센하우젠 탄원서는 오히려 교황을 이단으로 몰았다. 이 탄원서는 경솔하게도 교리 문제뿐만 아니라 제국과 관련된 헌법적 문제까지 다루고 있었다.

루트비히는 이점이 실수라는 것을 재빨리 깨닫고 그 파급효과를 유화시켰으나 오스트리아는 결국 프랑스와 룩셈부르크의 동맹에 가담했다(1324. 7. 27). 루트비히는 자신의 포로였던 프리드리히와 통치권을 나누어 갖는 데 동의함으로써 이러한 적대세력의 연합을 분열시켰다. 게다가 더 나아가서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의 반대를 무마하기 위해 교황이 프리드리히의 단일 통치권을 인정한다면 자신이 왕위에서 물러나기로 합의했다(1326. 1. 7). 그러나 교황청은 독일의 왕권 전쟁이 계속되기를 바라고 있었으므로 현실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교황청의 태도로 자신이 비정하게 이용당했음을 깨달은 프리드리히는 루트비히의 충실한 공동통치자로 돌아섰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다음백과
다음백과 | cp명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세계사

세계사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



[Daum백과] 루트비히 4세와 합스부르크 분쟁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