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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1. 2. 6, 미국 일리노이 탐피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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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미국 |
요약 미국의 제40대 대통령. 재임 시절 공급 중심의 경제정책인 레이거노믹스를 시행했다. 정치가가 되기 전에 라디오 스포츠 아나운서를 거쳐 영화배우로 활동했다. 1966년 공화당 후보로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당선되었고 1970년 재선되었다. 1981년에는 지미 카터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미국의 제40대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 시절, 미국 경제의 재활성화를 위해 레이거노믹스를 채택해 대폭 감세와 함께 방위비 이외의 지출은 대폭적인 감소를 추진했다. 경제성장은 소폭 상승했으나 감세로 인한 예산 적자폭이 계속 늘어나 국채는 늘었다. 반공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공화당 출신의 제40대 미국 대통령. 보수적인 공화당에 속해 공급 중심의 경제정책인 레이거노믹스를 펼쳤다.
청년기
신발 세일즈맨의 아들로 태어난 로널드 레이건은 1932년 일리노이 주 유레카대학을 졸업한 뒤 아이오와에서 라디오 스포츠 아나운서가 되었다. 1937년 레이건의 오랜 영화배우 생활은 시작되었고 결국 약 50편의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는데, 그중 <모든 미국인 크누트 로크니(Knute Rockne―All American)>(1940), <왕들의 열(Kings Row)>(1942), <성급한 마음(The Hasty Heart)>(1950)이 특히 유명하다.
1947~52년, 1959~60년 영화배우협회 회장직을 맡아 미국 영화산업에서 공산주의자로 여겨지는 세력을 척결하는 데 협력했다. 1950년대에 영화배우로서의 활약이 저조해지자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너럴 일렉트릭 극장'의 사회를 맡으면서 제너럴일렉트릭사의 순회대변인을 겸했다(1954~62). 그 기간 중에 진보적인 민주당을 지지했으나 1950년대 초부터 보수적 공화당을 지지했다.
정치 입문
1966년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해서 승리했고 1970년 재선되었다. 2차례의 임기(1967~74) 동안 조세감면, 복지제도의 확대, 고등교육정책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성과는 별로였다. 레이건은 내키지 않았지만 1968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지명을 신청했고, 1976년 제럴드 포드 대통령으로부터 후보지명을 빼앗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지만 실패했다. 1980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지명을 큰 반대 없이 획득했고 뒤이은 선거유세에서 보수적인 정강을 발표하면서 미국의 전통적인 가치에 대해 낙관적이고 밝은 찬사를 보냈다. 민주당의 지미 카터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 카터의 41%에 비해 51%의 지지를 받았다.
암살 위협
레이건은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암살의 위협을 받았다. 1981년 3월 30일, 25세의 부랑아이자 정신질환자 존 W. 힝클리에게 저격당해 중상을 입었지만 빨리 회복되었다. 힝클리는 범행 이유를 '당시 유명 영화배우였던 조디 포스터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고 자백했다. 정신병을 앓고 있었고 대통령이 무사하다는 점이 정상 참작되어 1982년, 무죄 판결을 받았다.
경제 정책
레이건은 공급 중심의 경제정책을 채택해, 세금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군비지출은 크게 늘리고 방위비 이외의 지출은 대폭 줄일 것을 제안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급속한 경제성장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로서 생기는(과세대상 소득의 저변확대를 통한) 국고수입의 증대로 결국 연방예산이 균형을 이루게 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1981년 의회는 대통령의 제안을 대부분 통과시켜 방위비 이외의 지출을 대폭 삭감하고, 기업의 감가상각비 계상기간의 단축과 함께 개인소득세의 삭감을 승인했다. 그결과는 여러 가지로 나타났다. 로널드 레이건의 임기중 인플레이션은 약 3.5%로 떨어졌지만, 경제성장은 1982년의 일시 후퇴 후 소폭상승을 보였고 감세로 인한 예산적자폭이 계속 늘어났다. 그결과 국채의 규모는 1981~86년에 배로 불어났다.
외교 정책
로널드 레이건은 미국 역사상 평화시 이루어진 최대의 병력 증강 작업에 착수했다. 1983년 로널드 레이건은 전략방위구상(SDI)으로 통하는 말썽 많았던 계획을 가지고 미국의 전략방위체제 건설을 제안했다. 외교문제에서 강력하게 반공적인 자세를 취했고 마지못해 하게 된 소련과의 군축협상도 아주 조심스럽게 수행했다. 외교정책의 큰 성과는 1983년 공산정부 축출을 위해 카리브 해의 작은 섬 그레나다를 침공한 것과, 1988년 레이건이 소련의 지도자 미하일 S. 고르바초프와 정상회담을 갖고 중거리 핵미사일을 제한하는 중거리핵전력(INF) 조약에 서명한 것이다.
대중적인 인기
로널드 레이건과 그의 영부인 낸시 데이비스 레이건(결혼 전 이름은 앤 프랜시스 로빈스)은 재임 동안 미국의 대중에게 대체로 인기가 있었다. 레이건의 매력적인 성격은 대중과의 친화력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1984년 진보적인 민주당 후보 월터 먼데일을 상대로 재출마하여 먼데일의 41%에 대해 59%의 지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재정 정책
1985년 레이건은 1991년까지 연방예산의 균형을 잡기 위해 정부지출의 삭감을 의무화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레이건은 정부의 계속되는 적자를 줄이기 위해 내놓은 세금인상안은 거부하면서 방위비 증액요구는 계속했다. 연방세제를 정밀조사하고 간소화하자는 레이건의 제안은 의회에서 대폭 수정되어 1985~86년 통과되었다.
중동 정책
1986년 후반 레이건 행정부는 이란의 과격한 이슬람교 근본주의적 정부에 무기를 선적했다. 이것은 이란의 영향을 받고 있는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레바논의 베이루트에 인질로 잡혀 있는 미국인들을 석방하기 위한 것임이 밝혀졌다. 이 조치는 테러리스트와는 협상하지 않겠다고 미국 정부가 공개 선언한 정책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곧이어 국가안전보장회의(백악관의 한 자문기관)의 고위관리들이 대(對)이란 무기판매의 이익금 일부를 니카라과의 공산 산디니스타 정부와 싸우는 미국 지원의 반군쪽으로 비밀리에 전용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런 비밀의 누설은 미국 의회를 혼란시키고 한동안 로널드 레이건의 인기와 그의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크게 떨어뜨렸다(→ 이란-콘트라 사건, 콘트라).
한국과의 관계
1983년 11월 12일부터 14일까지 3일간 우리나라를 공식 방문해 전두환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주요 회담 내용은 미국의 대한방위공약준수 재확인, 한미안보협력강화방안, 국제정세, 양국 간의 정치·외교·경제협력방안 등이다. 레이건의 방한에 앞서 1981년 2월 2일 전두환은 레이건의 초청으로 백악관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가졌다.
퇴임 이후
퇴임하고 고향인 캘리포니아로 돌아갔다. 1993년, 조지 부시 대통령은 퇴임을 앞두고 레이건에게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했다. 1994년 11월 알츠하이머병 초기 진단을 받았고 10년 간 투병하다가 2004년 캘리포니아 자택에서 폐렴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로스앤젤레스 근교의 시미밸리에 1991년 레이건 대통령 도서관이 개관했으며 이곳에 레이건 대통령 부부의 묘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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