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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카라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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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 남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니카라과 서부의 태평양 연안으로 건너와 정착했다.

10세기에는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의 인디언들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16세기에 스페인인들은 이들 부족 가운데 유력한 한 부족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킴으로써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이들과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150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니카라과 동부의 카리브 해 연안에 상륙한 데 이어 1522년 스페인 정복자 힐 곤살레스 다빌라에 의해 이 지역을 정복하고자 하는 최초의 시도가 이루어졌다.

그는 약 3만 명의 인디언을 개종시키고 9만 페소 어치의 금을 가져 왔으며 지협을 횡단할 수 있는 수로를 발견했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성난 원주민들에 의해 쫓겨났다. 이때 니카라과 호 주변 지역의 원주민을 이끈 부족장의 이름이 니카라오인데, 니카라과라는 국명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항구적인 식민지화가 시작된 것은 1524년 스페인 탐험가이자 군인인 헤르난데스 데 코르도바에 의해서였다.

스페인의 니카라과 정복은 니카라과 태평양 연안 지역의 인디언 원주민들에게 재앙이었다. 100만 명 가량이었던 인구가 30년 만에 불과 수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원주민의 절반은 구대륙의 전염병에 휩쓸려 죽고, 그나마 살아 남은 인구의 대다수는 신대륙의 다른 스페인 식민지들로 노예로 팔려 갔다.

이처럼 인구가 격감한 후 니카라과는 스페인 제국의 눈길에서 벗어난 변경지대로서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부 내륙의 식민 도시 그라나다레온이 권력과 명성의 맞수로 떠올랐다. 그라나다는 농업과 산 후안 강을 통한 스페인과의 무역에 의존했고, 레온은 태평양 연안에 있는 스페인 식민지들과의 교역에 의존했다. 그라나다가 보수적인 귀족 지주들이 득세하는 농업 중심지로 발전한 반면, 레온은 자유분방하고 지적인 도시로 발전했다.

이 작은 두 식민지 변경 도시는 해적들로부터 빈번히 공격을 받았다.

17세기 말에는 영국이 카리브 해 연안 지역의 미스키토 인디언들과 동맹을 맺었다. 그곳에는 이미 블루필즈 정착촌이 있었다. 영국인들은 모스키토 해안에 정착해 한동안(1740∼86) 이곳을 보호령으로 삼았다.

1811년, 멕시코·엘살바도르의 반(反)스페인 투쟁에 고무된 혁명가들이 니카라과 통치를 담당하는 행정관을 몰아냈다.

그러나 레온은 왕당파로 돌아섰고 그라나다는 불충의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1821년 중앙아메리카의 식민지들이 과테말라에서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할 때에도 레온은 거부하고 그라나다는 동의했다. 두 도시는 멕시코와의 합병(1822∼23)에 대해서는 함께 받아들였지만 내내 티격태격하다 1826년에 중앙아메리카연방에 가입했다. 니카라과는 1838년에 연방에서 탈퇴하고 독립했다. 그후 레온과 그라나다는 각각 자유당·보수당의 거점으로서 경쟁을 계속했다.

스페인이 물러간 다음 모스키토 해안의 '왕'은 영국 정부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결국 블루필즈에 영국 관리들을 다시 불러들이는 형국이 되었다.

1848년 영국인들은 카리브 해 연안의 작은 항구인 산 후안 델 노르테를 점령하고 이곳을 그레이타운이라고 개명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자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횡단로로서의 니카라과의 전략적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코넬리우스 밴더빌트의 증기선회사는 산후안 강과 니카라과 호 항로에 증기선을 띄워 캘리포니아 금광을 찾아가는 사람들을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실어날랐다.

1855년 보수당과 내전 중이던 자유당의 요청으로 미국인 윌리엄 워커가 용병들을 이끌고 니카라과에 잠입했다.

그는 군사적으로 혁혁한 공을 세우고 1956년 니카라과 대통령직에 올지만 이듬해에 중앙아메리카의 5개 공화국과 밴더빌트 증기선회사의 연합세력에게 패주했다. 1857∼93년에는 보수당이 니카라과를 통치했다. 보수당 정권하에서 니카라과는 상대적으로 평화를 누렸으나 민주주의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1857년 자유당·보수당 사이의 역학관계에 따라 레온과 그라나다로 여러 차례 옮겨졌던 수도가 두 도시의 합의로 중간 지점인 마나과로 정해졌다.

1860년 니카라과와 영국은 동부 연안 지역을 니카라과에 재편입시키되 자치 보호구역의 지위를 부여하는 내용의 협정을 맺었다. 동부의 모스키토족에 대한 관할권은 호세 산토스 셀라야 대통령의 자유당 정부(1893∼1909)에 이르러서야 확립되었다.

셀라야대통령은 독재자였지만 확고한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중앙 아메리카의 재통합 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운하건설권의 미국 양여를 거부해 미국은 운하 건설지로 파나마에 눈을 돌려야 했다.

게다가 셀라야 대통령이 일본을 끌여들여 미국이 건설할 운하와 경쟁할 운하를 세우려 한다는 소문까지 나돌자 미국은 보수당의 반란을 부추겼다. 이 반란에 가담한 미국인 용병 2명이 처형되자 미국은 블루필즈에 해병대를 상륙시켜 자유당의 승리를 차단했다. 결국 셀라야는 사임했지만 미국은 새로 들어선 호세 마드리스 정부(1909∼10)마저 인정하지 않았다. 내전이 계속된 끝에 1911년 아돌포 디아즈가 이끄는 보수당 정부(1911∼17)가 들어섰고, 보수당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미국은 1912년 해병대를 파견했다. 미국 대사관에 주둔한 100명의 해병 수비대는 보수당의 에밀리아차모로 바르가스 대통령(1917∼21)과 그의 삼촌 디에고 마누엘 차모로 대통령(1921∼23)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다.

미국은 브라이언-차모로 조약(1914 서명, 1916 비준)에 따라 운하 독점권을 확보했고, 1925∼26년의 9개월을 제외하고 1933년까지 니카라과에 해병대를 계속 주둔시켰다.

1925년 미국 해병대가 일시 철수하자 쿠데타로 정권을 재장악한 에밀리아노 차모로 바르가스는 위기에 봉착했다. 그가 미국과 중앙 아메리카 국가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채 물러가고 아돌포 디아즈가 다시 대통령이 되었다(1926∼28). 자유당 지도자 호세 마리아 몬카다와 후안 바우티스타 사사카, 세사르 아우구스토 산디노는 반란을 일으켰다.

미국은 아돌포 디아즈 대통령의 보수당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1927년 해병대 2,000명을 파견했다. 반란 지도자 몬카다와 사사카는 6개월 후 미국의 내전 종식 협상을 받아들여 1928년과 1932년에 미국 후견하에 치러진 2차례의 선거에서 차례대로 대통령에 선출되어 각각 1928∼33년과 1933∼36년에 집권했다. 그러나 산디노는 1933년 1월 미국 해병대가 철수하고 사사카가 대통령에 취임할 때까지 반미(反美) 투쟁을 계속했다.

미국 해병대가 철수한 후 미국 해병대로부터 훈련받은 과르디아 나시오날(국민방위군)이 니카라과의 질서유지를 떠맡았다.

1934년 국민방위군 사령관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 장군 휘하의 장교들이 모의해 자유당 반군 지도자 산디노를 암살했다. 이어 소모사 가르시아는 자유당·보수당내 파벌세력들의 후원을 받으며 사카사 대통령을 축출(1936)하고 1937년 1월 선거에 단독 출마해 부정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소모사 가르시아는 헌법을 개정해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고 20년 동안 대통령 또는 총사령관으로서 철권을 휘둘렀다.

1930년대부터 수출이 줄곧 늘었지만, 국가 수입의 수혜자는 국민이 아니라 소모사가(家)와 추종세력들이었다(소모사가).

소모사 가르시아는 자신이 이끄는 민족자유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다음 날인 1956년 9월 21일에 시인 리고베르토 로페스 페레스에게 저격당해 8일 후 죽었다. 그의 뒤를 이어 큰아들 루이스 소모사 데바일레가 1957년 2월에 실시된 산거에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루이스 소모사는 아버지보다 온건하게 통치하는 한편 1960년에는 온두라스와의 오랜 국경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양보책을 수용하고 1961년 미국의 쿠바 피그스 만 침공에 협력했다.

1962년 카를로스 폰세카 아마도르, 실비아 마요르가, 토마스 보르게 모르티네스가 소모사 체제를 전복하기 위해 사회주의 무장조직인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FSLN)을 결성했다. 1934년에 암살된 혁명 영웅 산디노의 이름을 딴 FSLN은 곧 노동자·농민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소모사가는 1963년 레네 구티에레스 대통령을 꼭두각시로 내세운 데 이어 1966년 그가 죽자 로렌소 구에레로 구티에레스를 대리인으로 내세웠다.

경제는 성장했으나 국민은 여전히 가난에 시달렸다. 1967년 초 루이스 소모사가 죽자 그의 동생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일레가 형식적인 선거를 통해 수개월 후 대통령에 올랐다. 그는 1972년 5월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정치를 3두체제에 맡기는 한편 국민방위대 총사령관직만 유지했다.

1972년 12월 마나과에 지진이 일어나 6,000명의 사망자와 3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국가비상위원회 위원장에 오른 아나스타시오 소모사는 자국 국민을 돕기 위한 국제사회의 원조를 횡령했다. 그는 1974년 니카라과 역사상 10번째의 헌법을 제정해 스스로 대통령에 올라 연임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해 말이 되기 전에 널리 관심을 끈 2개의 진정한 반대세력인 FSLN와 일간지 〈프렌사〉의 편집인 겸 발행인 비올레타 바리오스 데 차모로가 결성한 조직이 민주자유연합(UDEL)을 소집했다. 1974년 12월 FSLN은 소모사 진영의 주요 인물들을 납치해 인질로 삼고 정치범 석방이라는 대가를 얻어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정부는 2년 6개월 동안 대대적인 반군 소탕작전에 나섰다. 이때 FSLN 지도자 카를로스 폰세카와 수천 명의 무고한 농민이 살해되었다. 1977년에는 로스 도스(12의 뜻)라는 조직이 UDEL과 FSLN 및 기타 조직을 포괄하는 반(反)소모사 연대를 도모했다. 1978년 1월 〈프렌사〉 편집인 페드로 조아킨 차모로가 암살되자 동맹파업과 폭력사태가 잇따랐다.

그해 8월 FSLN은 마나과의 국립궁전을 공격해 1,000명이 넘는 인질을 붙잡고 정부군과 2일간 대치하면서 자신의 요구의 대부분을 관철시켰다.

국민방위대가 부분적으로 사태를 다시 장악한 가운데 동맹파업이 다시 일어나고 몇몇 주요도시가 FSLN에 함락되는 등 봉기가 확산되었으나 결국 진압되고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듬해 7월 FSLN은 마지막 공세를 펼쳤다. 도시들이 연이어 FSLN의 수중에 떨어졌다. 마침내 아나스타시오 소모사는 7월 17일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망명했으며 이틀 후 FSLN이 마나과에 입성해 국민방위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로써 46년간에 걸친 권력을 휘둘러 온 소모사 체제가 마침내 종식되었다.

FSLN은 소모사 체제로부터 피폐한 나라를 넘겨받았다. 집 없이 떠돌아 다니는 국민이 약 50만에 이르고 장기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살해된 국민은 3만 명이 넘었다. 경제는 파산 상태였다. 1979년 7월 FSLN은 국가재건 임시정부(혁명위원회)를 수립한 데 이어 이듬해 5월에는 과도의회의 역할을 하게 될 국가회의를 구성했다.

1979∼80년 산디니스타 정부는 소모사가와 그 일당 및 지지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민간 은행과 보험회사, 광물·임업 자원을 국유화했으며 식료품 수출입을 통제했다.

한편 개인의 기본적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이 제정되었다. 망명 중이던 아나스타시오 소모사는 1980년 9월에 파라과이의 아순시온에서 암살되었다.

산디니스타 정부는 비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를 확대하기도 했으나 쿠바를 비롯한 사회주의권 국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미국은 이를 서반구에서의 공산주의의 팽창으로 받아들였다. 1980년부터는 아르헨티나 군부의 지원을 받는 반정부 게릴라의 활동이 전개되었다.

1981년에 미국은 니카라과에 대한 원조를 중단했고, 그해 말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이른바 '콘트라 반군'의 선발·훈련·무장을 위한 자금으로 약 2,000만 달러를 지원하도록 승인했다. 콘트라 반군은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지원하에 온두라드·코스타리카 접경지역에 기지를 만들고 오지를 무대로 지구전을 펼쳤다.

1984년 11월에 실시된 선거에서 FSLN의 대통령 후보 다니엘 오르테가 사베드라가 65%의 득표로 압승했다.

이듬해 1월에 다니엘 오르테가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신헌법 마련을 위한 의회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는 국제감시단으로부터 공정하다는 평가를 받은 이 선거를 사기극이라고 비난했다. 미국은 이미 1982년부터 국제부흥개발은행(World Bank)과 미주개발은행(Inter-American Development Bank)에 대한 자국의 영향력을 이용해 이들에 대한 니카라과의 지원 요청을 대부분 봉쇄해 온 데 이어, 1985년에는 대(對)니카라과 금수조치를 내렸다.

콘드타 반군의 병력도 1980년대 중엽에 약 15,000명으로 늘었다. 산디니스타 정부는 군사력을 강화하는 한편 공격용 헬리콥터 등의 주요 장비를 구입해 반군 소탕에 나섰다. 그 결과 1980년대 말 콘트라 반군의 활동이 무디어졌다. 미국의 이러한 적대적 조치와 내전에 따른 손실 및 경제적 혼란, 산디니스타 정부의 정책적 오류가 맞물려 니카라과 경제는 1985년부터 곤두박질했다.

1987년 1월 산디니스타 정부는 자유선거를 내용으로 하는 신헌법을 제정했고, 그해에 미국 의회는 미국 정부의 콘트라 반군에 대한 추가지원 요청을 거부했다.

이로써 그해 8월부터 니카라과 내전은 군사적 문제에서 정치적 문제로 옮겨갔다.

1988년 인플레이션이 30,000%를 넘자 산디니스타 정부는 이듬해에 인기 없는 긴축정책을 실시해야 했다. 이에 따라 보건·교육·주택·영양 예산이 크게 삭감되었다. 이를 배경으로 1990년 2월 25일에 역사적인 자유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 기간 중 콘트라 반군의 활동이 강화되었다.

국제사회가 예의주시하는 가운데 미국의 지지와 자금지원을 받는 국민야당연합(UNO)과 UNO의 대통령 후보 비올레타 바리오스 데 차모로(암살당한 〈프렌사〉 전 편집인 페드로 조아킨 차모로의 아내)가 승리를 거두었고, 그해 4월 25일 평화적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차모로 정부는 산디니스타 정부가 실시하던 많은 정책을 폐기했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따라 공기업이 민영화되고 공공부문 지출은 삭감되었으며 소농에 의한 내수식량의 생산보다는 수출을 위한 대규모 농업이 강조되었다. 주권 쟁취를 위한 오랜 투쟁의 역사를 강조한 산디니스타 집권기의 교과서들이 사라지고 미국국제개발기구(U.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의 기금으로 구입한 '정치색이 덜한' 교과서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차모로 정부는 비록 보수적이었으나 국민화해에 관심을 가졌다.

1990년 6월 콘트라 반군을 공식적으로 해산시키고 8만 명이 넘는 군 병력을 1만 5,000명 미만으로 감축했다. UNO 지도부의 정치 보복 유혹을을 뿌리치고 의회에서 FSLN 및 일단의 UNO 온건파와 암묵적으로 연대했다.

1990년대 초는 어려운 시기였다. 경제는 침체했다. 긴축정책으로 인플레이션은 잡혔으나 실업과 대다수 가난한 국민의 고통이 크게 늘었다. 게다가 사회가 점차 양극화하고, 불만을 품은 옛 콘트라 반군세력과 전역군인들이 재무장해 폭력사태를 일으켰다.

차모로 대통령은 약 7년의 재임 기간 동안 민주주의 발전과 국민화합, 경제안정, 공기업 사유화, 인권향상 등에서 괄목한 발전을 이룩했다.

1994년에 제정된 군법에 따라 1995년 산디니스타인민군 사령관 움베르토 오르테가 장군이 물러나고 군대 이름도 니카라과 국군으로 바뀌었다. 1996년 의회가 새로운 경찰조직법을 통과시킴에 따라 경찰에 대한 민간의 지배도 한층 강화되었다.

1996년 10월 대통령 선거와 총선, 시장 선거가 실시되었다. 국제감시단과 첫발을 내디딘 니카라과의 선거감시단 '에티카 이 트란스파렌시아'(윤리와 투명)로부터 자유롭고 공정했다는 평가를 받은 이 선거에서 니카라과 국민은 중도좌파 성향의 자유연합(Liberal Alliance) 후보인 아르놀도 알레만 전(前) 마나과 시장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1997년 1월 10일 알레만 대통령의 취임으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들 간의 정권 이양이 처음으로 실현되었다.

레콜렉시온(Recoleccion) 교회, 레온(Leon)에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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