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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예

다른 표기 언어 東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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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지금의 강원도 북부와 함경도 남부 지역

요약 현재의 강원도와 함경도를 이르렀던 지역.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동예는 고구려와 같은 족속으로 그 가구 수가 약 2만여 호에 달하며 풍속과 언어가 고구려와 비슷했고 의복이 조금 달랐다고 한다. 동예는 처음 고조선에 복속되었다가 BC 108년 고조선이 멸망하면서 북부인 원산·안변 일대가 한4군의 하나인 임둔군에 편입되었다. 4세기 초 고구려가 낙랑군과 대방군을 멸망시키자 동예의 북부는 다시 고구려의 영역으로 편입되었고, 나머지 지역은 4세기말에서 5세기 전반에 걸쳐 고구려 및 신라에 의해 병합되었다. 고구려 '광개토왕릉비문'에는 고구려에 의해 정복된 동예읍락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삼한

삼한시대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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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동예는 고구려와 같은 족속으로 그 가구수가 약 2만여 호에 달하며 풍속과 언어가 고구려와 비슷했고 의복이 조금 달랐다고 한다. 대개 예맥족의 한 갈래로 동예인 자신도 고구려와 같은 족속임을 인식한 듯하다.

동예의 읍락은 산과 내를 경계로 나누어져 있는데 함부로 남의 구역을 침범하면 책화(責禍)라 하여 노예·소·말 따위로 보상하게 했고, 사람을 죽이면 죽음으로써 죄를 갚게 했다. 또한 같은 성끼리는 결혼하지 않았으며, 꺼리는 것이 많아 가족 중 한 사람이 병으로 죽으면 살던 집을 버리고 새집으로 옮겨가는 풍속도 있었다. 이는 가옥구조가 비교적 간편하며 사회발전의 정도가 그리 높지 않았음을 반영하는 풍속이기도 하다.

동예인은 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별자리의 움직임으로 그해의 풍흉을 점쳤다고 하는데, 이는 그들 나름의 농업기술을 축적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호랑이를 신으로 섬겼고 해마다 10월이면 무천(舞天)이라 하여 하늘에 제사지내고 밤낮으로 마시고 노래하며 춤추고 놀았다고 하는데,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한(韓)의 10월제와 같은 종류의 추수감사제였다.

삼베를 짓고 누에를 길러 명주를 짰으며 반어피(班魚皮)·과하마(果下馬)·단궁(檀弓)·표범가죽 등이 유명했다고 한다. 또 주옥(珠玉)을 보물로 여기지 않았고, 긴 창을 사용한 보병전에 능했다고 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이같은 기록으로 보아 2~3세기의 동예는 공동체적 유대가 강하게 남아 있었던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족외혼의 풍속에 따른 혈족간의 유대, 호랑이를 신으로 섬기는 씨족적 신앙, 무천과 같은 공동 축제의식 등은 동예사회의 공동체적 유대를 유지·존속시키는 기반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책화의 존재는 읍락마다 공유의 산림·풀밭·하천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읍락공유지는 읍락의 공동체적 결속을 뒷받침하는 물질적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동예는 처음 고조선에 복속되었다가 BC 108년 고조선이 멸망하면서 북부인 원산·안변 일대가 한4군의 하나인 임둔군(臨屯郡)에 편입되었다. 그후 고조선 토착세력의 반발로 인해 임둔군과 진번군이 곧 폐지되었고, 옥저와 동예의 7현은 새로 설치된 낙랑동부도위의 관할 아래 들어갔다.

AD 30년 낙랑군은 동부도위를 폐하고 옥저·동예 각 읍락의 족장을 현후(縣侯)로 임명하여 이들을 통한 간접지배로 통치방식을 바꾸었다. 현후들은 자신이 지배하는 읍락의 일을 자치적으로 처리하는 한편 낙랑군의 지시를 받아 군에 조세를 바치고 필요한 역역(力役) 동원을 담당했다. 동예읍락의 현후들은 중국 군현을 본떠 휘하의 사람들을 공조(功曹)·주부(注簿) 등으로 임명했다.

중국 군현세력이 쇠퇴하면서 2세기 후반에 이르러 동예의 일부는 고구려의 지배 아래 들어가고 다른 일부는 자치력을 확대시키며 성장했다. 그러나 245년에 벌어진 위(魏)와 고구려의 전쟁에서 고구려가 패하자 동예의 읍락들은 다시금 낙랑군과 대방군의 침입을 받고 그 지배하에 들어갔다.

동예지역에서 가장 선진적인 위치에 있었고 한때는 낙랑동부도위의 치소로 중국 군현을 통해 중국문물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불내예후(不耐濊侯)는 이때 위군(魏軍)에 항복한 후 247년 위의 수도로 들어가 왕으로 봉함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불내예왕은 그 거처가 일반 읍락민의 그것과 구별되지 않는 족장급에 불과한 존재였다. 불내예는 3세기 전반 이후에도 중국식 군현관리명을 계속 사용했다.

4세기초 고구려가 낙랑군과 대방군을 멸망시키자 동예의 북부는 다시 고구려의 영역으로 편입되었고, 나머지 지역은 4세기말에서 5세기 전반에 걸쳐 고구려 및 신라에 의해 병합되었다. 고구려 '광개토왕릉비문'에는 고구려에 의해 정복된 동예읍락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5세기 전반 이후 동예는 전지역이 고구려와 신라의 지배하에 들어가 양국의 지방제도가 정비되어 가면서 점차 고구려와 신라의 지방민으로 융화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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