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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강원도는 산이 많아 농업 생산량과 인구가 적었다. 따라서 강원도를 기반으로 성장한 고대 왕조도 없었다. 그렇다고 고대 강원도에 사람이 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비록 고구려, 백제, 신라처럼 큰 나라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의 문화를 가꾸며 살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동예(東濊)’라고 불렸다.
강원도의 고대 부족 집단
동예의 역사가 정확히 언제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는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다. 동예인들은 자신들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역사를 알려면 아쉽게도 외부인인 중국인들이 만든 자료를 볼 수밖에 없다.
동예에 관련된 기록이 처음 발견되는 시점은 고조선 말기다. 창해(蒼海), 그러니까 지금의 동해에 인접한 창해군은 고조선의 적인 한나라와 손을 잡으려 했다. 당연히 고조선은 이에 반발해 창해군과 한나라의 교통로를 차단했고, 이것은 한나라와 고조선 간의 전쟁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기원전 108년,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자 창해군은 한나라가 세운 한4군인 임둔군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임둔군은 오래가지 못하고 기원전 82년에 폐지되었다. 그리하여 창해는 낙랑군의 지배를 받았다. 그렇다고 해도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직접적인 식민 지배는 아니었고, 창해의 각 부족 군장들이 형식적으로 낙랑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형태의 간접 지배였다.
그러다 서기 2세기 말 무렵, 낙랑의 힘이 쇠약해짐에 따라 창해는 고구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창해는 동예라 불리게 되었다.
중국 위나라 장수인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하면서 동예에 대한 더 자세한 기록이 남겨지게 되었다. 당시 동예는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었고, 종주국인 고구려를 도와 위나라 군대에 맞서 싸웠다. 이때 중국인들은 동예인들과 접촉하면서 정보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관구검이 가져온 정보를 모아 중국의 역사가 진수가 지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동예는 동쪽으로 큰 바다(동해)와 인접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 및 옥저와 마주하며, 남쪽으로는 진한과 맞닿아 있다고 했다. 대략 그 위치는 오늘날 함경남도에서 강원도와 경상북도에 이른다.
고조선과 고구려의 영향
동예는 하나의 단일한 집단으로 통일되지 못했다. 대신, 산과 강을 경계로 하여 마을이 나누어졌고 각 마을마다 삼로(三老)라 불리는 촌장들이 마을을 이끌었다. 삼로라는 호칭은 원래 중국 한나라의 관직이었다. 당시 동예는 한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동예인들은 각자 마을의 경계를 중요하게 여겼고, 함부로 다른 마을로 들어가지 않았다. 만약 이유 없이 다른 마을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으면, 책화(責禍)라고 하여 노비나 소, 말 같은 가축으로 배상하게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근원이 고구려에서 나왔다고 여겼다. 이런 인식이 동예가 고구려에 복속된 서기 2세기 이후, 고구려와의 동질성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인지, 아니면 고구려와 동예가 원래 같은 근원에서 나온 역사적인 근거에 사실을 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동예는 고구려와 옷차림은 좀 달랐지만, 풍습과 언어는 같았다고 전해진다.
동예인들은 같은 성을 가진 사람과는 결혼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조선시대 이전이라고 우리 조상들이 모두 근친혼을 하지는 않았다. 근친혼을 금기시하는 계율은 이미 부족 국가 시절에도 있었던 것이다.
10월이 되면 낮과 밤 동안 모든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무천(舞天)이라는 행사가 있었다. 2005년 6월 11일 한국 고대사학회에서 윤용구 박사가 돈황문서를 해독한 결과를 발표했는데, 그에 따르면 무천은 원래 고조선의 풍속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동예의 무천은 고조선의 전통을 이어받은 셈이 된다. 동예와 고조선 사이에 교류가 활발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고조선 사람들이 동예로 많이 흡수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동예인들은 호랑이를 신으로 섬기며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도 호랑이는 산의 왕(山君)이라 불리며 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무당들도 호랑이가 산신(山神)의 사자이거나 산신 그 자체라며 신으로 모셨다. 어쩌면 한국의 호랑이 숭배 전통은 동예인들이 남긴 유산인지도 모른다.
고구려를 도와 위나라 군대에 맞서 참전했던 경험 때문인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동예의 전쟁 기술에 관련한 부분도 실려 있다. 그중에서는 동예인들이 아주 긴 창을 만들어서 전쟁터에서 사용했다는 내용이 눈에 띈다. 그 길이가 무려 3장(丈)에 달했다고 한다. 1장은 10척(尺)인데, 당시 1척은 중국 주나라 때 정해진 주척을 적용했기에 23cm 정도였다. 그렇다면 3장의 창은 그 길이가 6.9m이니 거의 7m나 된다! 이 정도면 약 5~6m의 장창을 무기로 쓴 고대 마케도니아의 보병 부대(페제타이로이)나 중세 스위스의 창병들 것보다 훨씬 긴 것이다.
그런데 7m나 되는 창을 과연 전쟁터에서 무기로 쓰는 일이 가능할까? 7m 정도의 길이면 장대에 가깝다. 물론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는 동예인들 여러 사람이 창을 잡았다고 하니, 실제로 7m짜리 장창을 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창이 그렇게나 크고 길면 무게가 매우 무거워서 쉽게 들고 다닐 수 없다. 게다가 여러 명이 창을 잡는다면, 거추장스러워서 자유롭게 움직이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동예인들이 보병 전투에 뛰어났다고 적혀 있다. 창이 7m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길고, 그렇게 긴 창을 여럿이서 잡고 싸우는 전술을 편다면 동예인들은 보병 전술에 밝았을 것이다.
이 밖에 동예에서는 단궁(檀弓)이라는 활이 생산된다고 했다. 단궁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박달나무 활이란 뜻이 되는데, 사실 박달나무는 탄성이 적어 활의 원료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단궁은 박달나무로 만든 활이 아니라, 작은 활이란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병이 뛰어났다면 기병은 어땠을까? 유감스럽게도 동예의 기병에 관한 기술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없다. 다만 동예에서는 과하마(果下馬)가 난다고 서술했을 뿐이다. 과하마란 과일 나뭇가지의 아래로 머리가 지나갈 만큼 작은 말이란 뜻이다. 말이 작은데 기병이 뛰어났을까? 물론, 칭기즈칸 시대의 몽골인들은 작은 말을 타고도 잘만 싸웠다. 하지만 몽골 말들은 작은 대신 체력과 지구력이 뛰어났는데, 동예의 과하마들도 과연 그러했을까? 그건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동예의 위치인 강원도나 함경남도는 평지가 아닌 산악 지역이 많아서 기병 전술에는 그다지 적합한 곳이 아니었다. 따라서 동예인들은 말을 전투용이 아닌, 병사들의 이동 수단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밖에도 동예인들의 문화에는 주목할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동예인들이 삼베와 비단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는 내용이다. 삼베는 그렇다 쳐도 비단이라니? 고대 중국에서 비단은 국가의 중요한 수출 상품이었고, 따라서 제조 기술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엄격히 차단했다. 오죽하면 중국과 교역을 하던 동로마제국에서 비단 제조 기술을 알아내기 위해, 기독교 선교사들에게 비단을 만드는 누에벌레를 몰래 가져오도록 시키는 일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동예인들은 대체 어떻게 해서 비단을 만들 수 있던 것일까? 혹시 한나라와의 접촉을 통해서 비단 제조 기술을 알아냈던 것일까? 아니면 동예인들 스스로가 오래전부터 그런 기술을 자체적으로 발견했던 것일까?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고려 건국 직전까지 세력이 이어지다
동예는 2세기 이후, 고구려에 줄곧 복속되어 있다가 서기 6세기 중엽에 들어서자 신라의 진흥왕에 의해 순식간에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그러다가 9세기 들어 신라가 쇠약해지자 각 지역의 세력가들이 저마다 들고 일어나 신라에 반기를 들었다. 그중 명주(강릉)의 김순식은 상당한 힘을 가진 유지로, 궁예와 왕건의 세력 교체를 오랫동안 지켜보며 사태를 관망하다가 결국 왕건에게 항복했다.
왕건이 건국한 고려가 강원도를 차지하면서 강원도에는 더 이상 독자적인 세력이 등장하지 않았다. 강원도는 인구가 적고 농업 생산량도 풍족하지 않아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부양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강원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같은 고대 국가들이 등장하지 못했고, 그만큼 기록도 적어 구체적 역사를 파악하기 힘들다. 동예 이후로 강원도를 무대로 삼은 독자적인 세력은 사실상 그 맥이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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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족, 흉노족, 수메르인 등 현재는 남아있지 않지만 역사 속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사라진 세계의 역사들을 이야기한다. 침략으로 소멸되고, 강대국으로 흡수 되는 등 각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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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동예인 – 지도에서 사라진 사람들, 도현신,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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