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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 공화국

다른 표기 언어 <독>Weimarer Republik

요약 1918년 11월에 일어난 독일혁명으로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독일은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포했으며, 바이마르에서 새로운 국민의회를 소집했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19년 2월 6일부터 8월 11일까지 열린 국민의회가 헌법을 바이마르에서 채택했기 때문에 바이마르 공화국이라 부른다.
강력한 대통령의 권한은 공화국의 안정에 크게 이바지했으나 훗날 국가사회주의를 대두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세계공황의 여파는 독일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거듭되는 혼란 속에서 미약한 정치세력에 불과했던 나치가 제1당으로 부상하는 정치상황이 전개되었다. 1932년 선거에서 나치당은 대승을 거두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1933년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 수립되면서 소멸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Weimarer Republik)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장

ⓒ David Liuzzo / wikipedia | CC BY-SA 3.0

새로운 의회는 혁명의 중심지인 베를린을 떠나 유래깊은 문화의 중심지 바이마르에서 소집되었다.

에베르트가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사회민주당 소속인 필리프 샤이데만에게 조각이 위촉되었다. 신헌법은 연방제를 토대로 하는 공화국을 국체로 삼았으나 중앙권력은 각 주의 권력을 능가하여 조세징수를 관할했으며 연방의 법률이 각 주의 법규보다 우월했다.

연방의회는 비례대표제를 기초로 20세 이상의 성인 남녀에 의해 4년마다 선출되고 총리와 내각은 연방의회가 책임지도록 했다.

임기 7년의 대통령은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되며 동맹과 조약의 체결, 군최고사령관, 의회해산권 외에도 비상시에 국민의 자유를 일시 정지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강력한 대통령의 권한은 공화국의 안정에 크게 이바지했으나 훗날 국가사회주의를 대두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독일의 경제는 사회민주당 정권하에서도 여전히 소수 산업자본가들이 장악했으며 산업이 통제되거나 토지소유가 제한되는 일이란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사회민주당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약화시켰고 훗날 불만세력들이 권위주의 정부를 추종하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1919년 5월 연합군은 베르사유에서 강화를 위한 여러 조건을 일방적으로 제시했다. 독일은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 슐레지엔·포젠·프로이센 등지를 폴란드에, 슐레스비히를 덴마크에 각각 양도해야 했다. 동프로이센의 상당 부분이 분할됨으로써 독일의 인구와 영토는 큰 손실을 입었다.

라인 강의 좌안과 우안이 연합군의 점령하에 있거나 비무장지대로 남게 되었고 석탄생산지인 자르 지역은 15년 후 인민투표에 의해 그 귀속을 결정하도록 국제연맹에 위임되었다. 그밖에도 200만 마르크의 배상금 지불과 해외영토의 몰수가 결정되었으며 군병력이 엄격하게 제한받고 징병제가 금지되었다. 특히 베르사유 조약 제231조는 전쟁의 모든 책임이 독일과 그 동맹세력에 있으므로 침략자들은 대전중의 손실을 보상할 의무가 있다고 규정했다.

조약에 대한 불만과 항의가 빗발치는 가운데 샤이데만이 사임하고 사회민주당과 중앙당의 연립내각이 구성되었다.

공화국 초기에 반정부 우파 정당들은 소요를 통해 조약에 대한 불만을 조장했다. 유대인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는 인종주의가 횡행하고 유랑하는 자유군단이 정국을 마비시켰다(프라이코어). 1920년에는 병력감축에 반대하는 군인들을 주축으로 한 불만세력이 신정부를 선포하는 카프 폭동이 일어났고 지방에서도 유사한 폭동들이 야기되었다.

프라이코어(Freikorps)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뒤 1918년 12월, 민간인들에 의해 처음 조직된 준군사 집단, 지원병 모집 포스터 그림.

ⓒ Julius Gipkens / wikipedia | Public Domain

1921년 연합군이 제시한 배상총액 1,320억 마르크는 독일의 지불능력을 훨씬 초과하는 것이었다.

정치적 불안은 경제적 불안에 기인했다. 식량 수입과 배상금의 지불을 위해 전후에도 발행한 국채는 불환지폐로 보상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물가는 걷잡을 수 없이 폭등했다. 물가의 폭등은 노동자 실질임금의 감소로 귀결되었다.

1923년 배상금 지불의 불이행을 구실로 프랑스와 벨기에 군대가 루르 공업지대를 점령하자 독일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마르크화(貨)의 가치는 폭락하고 식료품의 품귀현상으로 노동자들이 큰 고통을 받았으며 중산층과 연금생활자들도 어려움은 비슷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뮌헨에서 폭동(→ 비어 홀 폭동)을 일으켰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경제적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슈트레제만 총리는 베르사유 조약 수정에 노력했다. 1923년 우선 독일의 공업이 농업자원을 담보로 렌텐마르크화를 발행, 불환지폐를 회수하고 이듬해 이를 다시 마르크화로 교환함으로써 다소 경기를 부양시켰다.

독일경제의 안정을 위해 연합국은 배상지불을 연장하는 도스안(案)을 제시했으며, 로카르노 조약으로 독일이 알자스로렌을 포기하고 서부 국경을 침공하지 않을 것을 약속함으로써 연합군의 라인란트 철군과 독일의 국제연맹 가입이 성사되었다(로카르노 조약). 이에 따라 연합군의 군사관리위원회는 해체되고 미국 대표 을 의장으로 하는 배상조정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로카르노 조약(Pact of Locarno)

독일·프랑스·벨기에·영국·이탈리아가 서유럽의 평화를 상호 보장한 조약

ⓒ Bundesarchiv / wikipedia | CC BY-SA 3.0 de

대규모의 외국자본이 유입됨에 따라 독일의 대외무역도 점차 회복세를 보였으나 외부 투자에 의존한 독일 경제의 회복과 번영은 1929년초부터 외국군의 철수와 함께 대부금이 회수되기 시작함으로써 정체되기 시작했다(1929년증권시장붕괴). 세계공황의 여파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독일에 더 큰 타격을 주었으며 거듭되는 혼란 속에서 미약한 정치세력에 불과했던 나치가 제1당으로 부상하는 정치상황이 전개되었다.

1930년 3월 공화국 의회는 예산안 채택문제를 놓고 진통을 겪고 있었다.

브뤼닝 내각은 헌법에 규정된 긴급권을 발동, 난국을 수습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의회는 해산되었다. 새로이 실시한 총선에서는 조직적 폭력과 선동이 난무하는 속에서 공산당과 나치당의 위세가 크게 진작되었다. 브뤼닝은 사회민주당의 지지를 받아 총리직에 올랐지만 공황으로 초래된 경제난국을 타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은행들이 연이어 도산했고 1931년초 독일의 실업자 수는 600만 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임기가 만료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1,935만 표를 얻어서 1,341만 표를 얻은 히틀러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비록 인기는 없었지만 대통령과 군의 후원을 받아 출범한 파펜 내각은 로잔 회담에서 유럽 부흥기금 30억 마르크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배상의무에서 완전히 놓여나는 데 성공했다.

1932년 선거에서 나치당은 230석을 차지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나치는 9월에 내각 불신임 의결을 유도했으나 파펜 내각은 의회를 해산하고 긴급권을 발동시켜 비상정국에 대처했다. 파펜과 함께 통치책임을 분담했던 슐라이허의 사태수습 노력은 중도파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파펜은 나치에 접근하여 연립내각구성을 제안했는데 이로써 각료의 수가 적은 히틀러의 행동을 구속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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