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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카라과

다른 표기 언어 Nicaragua 동의어 니카라과공화국
요약 테이블
인구 7,142,529명 (2024년 추계)
수도 마나과
면적 130,370㎢ 세계면적순위
공식명칭 니카라과 공화국 (Republic of Nicaragua)
기후 열대사바나기후
민족 구성 메스티소(69%), 백인(17%), 흑인
언어 에스파냐어
정부/의회형태 중앙집권공화제 / 다당제&단원제
종교 천주교(85%), 개신교(15%), 모라비아교
화폐 코르도바 (C$)
국화 진저
대륙 중남미
국가번호 505
GDP USD 14,532,000,000
전압 110V/ 60Hz
도메인 .ni

요약 중앙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나라로 면적이 130,373㎢ 이르며 수도는 마나과이다. 혼혈인 메스티소가 국민의 약 70%에 이르며 인구의 대다수가 스페인어를 사용한다. 국교는 없으나 국민의 대다수가 천주교이며, 화폐는 코르도바이다. 농업·경공업·무역에 기반을 둔 시장경제 체제의 개발도상국으로 국내총생산(GDP)은 최근 성장률을 보이고 있으나 아직 최빈국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문맹률이 15%이하로 낮은 편이며 13세까지의 무상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니카라과의 국기

수도는 마나과이다. 영토는 남북으로 최대 440㎞, 동서로 최대 450㎞에 이른다. 동쪽과 서쪽으로 각각 카리브 해와 태평양에 접하고 남쪽으로 코스타리카, 북쪽으로 온두라스와 국경을 접한다. 면적 130,373㎢, 인구 7,142,529(2024 추계).

지도
니카라과

자연환경

태평양 연안을 끼고 있는 서부는 대개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낮지만 험한 산들과 많은 화산 때문에 계곡들이 뿔뿔이 나뉘어 있다. 활화산을 비롯한 약 40개의 화산이 화산선을 이루어 태평양 연안을 따라 뻗어 있다. 이들은 북쪽의 폰세카 만에서 남쪽의 살리나스 만으로 뻗은 낮은 평야에 둘러싸여 있고, 화산들과 중부 산악지대 사이에 분지가 가로놓여 있다.

중앙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니카라과 호(8,157㎢)와 이보다 작은 마나과 호(1,035㎢)가 이 분지에 있다.

카리브해 연안을 끼고 있는 동부에는 카리브 해에 가까울수록 경사가 느린 넓은 평야지대가 있다. 중앙아메리카에서 가장 넓은 카리브 해 저지에 속하는 이들 평야의 평균 너비는 100㎞에 이른다. 그 끄트머리에 모스키토 해안이라는 해안 습지대가 카리브 해 연안을 따라 전개된다.

니카라과의 주요 강들은 중부 산악지대에서 발원한다.

서부의 강들은 태평양이나 마나과 호, 니카라과 호로 흘러드는데, 길이도 짧고 유량도 적다. 그중 중요한 강은 폰세카 만으로 흘러드는 네그로 강과 에테로 레알 강, 그리고 태평양으로 흘러드는 타마린도 강이다. 한편 동부의 강들은 서부의 강들보다 길다. 코코 강(780㎞)은 온두라스와의 국경을 이루며 475㎞나 흐르다 동부의 최북단 해안을 통해 카리브해로 흘러든다. 리오그란데 데 마타갈파 강(444㎞)은 코르디예라 다리엔세에서 발원해 저지를 지나 펄 라군의 북쪽 해안을 통해 카리브해로 흘러든다. 니카라과 호와 카리브 해를 잇는 남부의 산 후안 강(200㎞)은 코스타리카와의 국경을 이루며 흐르다 카리브 해로 흘러든다.

화산활동 외에 지진 활동이 빈번한데, 화산분출보다 지진으로 인한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훨씬 크다.

니카라과의 기후는 열대기후이며, 건기(1∼5월 중순)와 우기(5월 중순∼12월)가 있다. 서부와 동부의 연평균기온은 각각 27℃, 26℃로 동부가 조금 더 서늘하고, 연강우량은 각각 약 1,910㎜, 3,810㎜로 동부가 훨씬 습하다. 북부 산악지대는 연평균기온이 18℃로 더 서늘하다.

남벌에 대한 규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나 니카라과의 산림은 아직도 중앙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열대림이 국토의 1/3 이상을 덮고 있는데 동부의 카리브 해 저지의 경우 대부분이 사바나 지역이지만 모스키토 해안은 열대우림으로 덮여 있다. 서식 동물로는 퓨마·재규어·원숭이·개미핥기·악어·뱀·거북 등이 있다.

서부 화산지역와 주변 저지, 호수 지역에 인구·도시·산업이 몰려 있고 농산물도 대부분 여기에서 생산된다. 중부 산악지대 서쪽 계곡에도 상당수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으며 전체 농산물의 약 25%가 이곳에서 생산된다. 20세기 후반에는 많은 서부 주민들이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기르거나 벌채를 위해 땅은 넓으나 인구는 적은 동부 지역으로 옮겨갔다.

산후안델수르(San juan del Sur)에 위치한 해변

ⓒ Riderfoot/Shutterstock.com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국민

유럽인(특히 스페인인)과 아메리카 인디언 또는 흑인과의 혼혈인 메스티소가 국민의 약 70%에 이르고, 백인과 흑인이 각각 17%, 9%를 점한다. 아메리카 인디언은 전체 인구의 5% 미만인데, 동북부의 강을 낀 분지와 카리브 해 연안 지역에 수모족·미스키토(모스키토)족·라마족이 살고 있고, 서부의 태평양 연안 지역에 소수의 모님보족·숩티아바족이 살고 있다.

니카라과의 인구는 2024년 기준 714만 명이고, 인구밀도는 55명/㎢이다. 15세 이하가 전체 인구의 30%를 차지하며, 도시거주자는 인구의 58%를 이루고 있다. 공식 언어는 스페인어이다. 그러나 동부의 카리브 해 연안지역에서는 미스키토어·수모어·라마어와 영어에서 유래한 크리올어가 사용된다. 연안지역에서는 인디언어가 완전히 사라졌다. 영어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니카라과 국기를 들고있는 남성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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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니카라과는 농업·경공업·무역에 기반을 둔 시장경제 체제의 개발도상국이다.

1970년대 중반 이래 오랫동안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던 국내총생산(GDP)은 1997년 현재 6%의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니카라과는 역사적으로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하지만, 소모사 체제와 오랜 내전, 산디니스타 정부를 고사시키기 위한 미국의 경제제재와 정부의 실책 때문에 니카라과 경제는 곤두박질했다. 산디니스타 정부의 혼합경제 발전 정책은 1980∼83년까지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곧 경제 침체와 내전으로 인한 인플레이션과 외채난에 봉착했다.

1980년대 후반에 산디니스타 정부는 일정 부분 사유화를 추진하는 한편 공무원을 대량 감축하는 등 긴축 정책을 폈다.

이러한 긴축 정책은 1990년 집권에 성공한 보수적인 차모로 정부하에서 한층 강화되었다. 1991년 니카라과는 자유시장경제 체제로의 개혁을 시작했다. 가난한 대다수 국민을 위한 복지 예산이 삭감되고 국민의 빈곤이 심화되는 등의 부작용을 낳기도 했으나 미국의 경제지원 재개와 국제 금융기구의 원조에 힘입어 니카라과 경제는 1994년부터 극적으로 회생하기 시작했다.

1996년에는 수출 증가와 무역자유화 정책으로 전년도보다 무려 27% 높고 1977년 이래 가장 높은 4.6%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1998년 현재까지 351개의 국영기업이 사유화되고 13,500%까지 치솟았던 인플레이션은 12%로 떨어졌으며, 외채는 1/2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니카라과는 여전히 최빈국 수준에 머물러 있다. 1996년 현재 실업률과 불완전취업률이 각각 16%와 36%에 이른다. 또한 만성적인 무역수지 적자와 예산 적자, 높은 외채상환금 부담 때문에 GDP의 22%를 외국의 원조에 의존하는 형편이다.

니카라과는 마침내 1998년 3월 국제통화기금(IMF) 체제를 수용해 구조조정을 시작했다.

농업·임업·어업이 국민총생산(GN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1/4에 지나지 않지만 전체 노동인구의 2/5 이상이 이에 종사한다. 20세기 말 현재 니카라과의 주요 수출품은 커피·해산물·쇠고기·설탕이며 예전에 주요 수출 품목이었던 목화·바나나는 쇠퇴했다. 내수용으로 재배되는 주요 작물은 옥수수·콩·쌀·수수·플랜틴·카사바 등이다.

가죽·육류·우유의 주요 공급원은 소인데, 소 사육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크게 늘었는데 1970년대 말 내전과 정부 정책 때문에 많은 농장주들이 사육 두수를 줄이거나 이웃 나라로 옮겨가면서 상대적으로 축소되었다. 임업도 한때 급격히 성장했지만 1980년대의 내전 때 많은 제재소가 파괴되는 바람에 축소되었다. 어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새우잡이이다. 새우는 태평양과 카리브 해에서 잡아들이는데 거의 전량이 수출된다. 바닷가재도 어느 정도 수출된다.

그러나 니카라과의 어업 자원은 투자 부족 때문에 상대적으로 미개발된 상태이며 어업 활동도 대개 생계활동 수준에 머물러 있다.

금·구리·은 등의 광물자원이 대량 매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 금만 집중적으로 채굴될 뿐 자본난으로 다른 광물 자원은 채 개발되지 못하고 있다.

니카라과의 공업은 소비재 생산 위주이며 GNP의 1/5, 전체 노동인구의 약 1/10을 점한다.

대부분의 원자재는 수입에 의존한다. 정제설탕·정유제품·화학제품·담배·성냥·신발·비누·식물성기름·시멘트·술·섬유제품 등이 생산된다. 발전은 주로 수입연료에 의존하는데 수력·원자력 발전에 의해서도 각각 총전력의 1/4 가량이 생산된다.

전통적으로 미국 시장과 상품에 의존해 온 니카라과는 산디니스타 정부 때 동유럽 국가들과 쿠바를 비롯한 보다 많은 국가들과 무역 관계를 맺기 시작했지만 이런 나라들과의 무역이 두드러진 적은 어느 한 때도 없었다. 사실 니카라과의 최대 교역국인 미국이 1985년에 니카라과에 대한 경제제재로 수출입 금지조치를 취했을 때 니카라과 상품의 수출이 크게 늘어난 곳도 일부 서유럽 국가들이었을 뿐이다.

대미 무역관계는 1990년 후에야 비로소 회복되었다. 니카라과는 수출을 늘이기 위해 1997년 멕시코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다.

니카라과 코르도바(Nicaragua Córdoba, NIO), 니카라과의 화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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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사회

1838∼1974년에 니카라과의 헌법은 10번 바뀌었다. 1979년에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은 43년 동안 독재권력을 휘둘러 온 소모사 체제를 무너뜨리고 국가재건 임시정부(혁명위원회)를 수립했다. 소모사 체제 당시의 헌법은 혁명정부가 제정한 헌법으로 대체되었다. 임시정부에 행정권·입법권이 집중되고, 입법 자문기관인 국가회의가 구성되었다.

임시정부와 국가회의는 1984년의 대통령 선거와 총선을 거쳐 1985년에 각각 민선 대통령이 이끄는 행정부와 민선 의원들로 구성된 의회로 대체되었다. 현행 헌법은 1987년 산디니스타 정부하에서 제정되었으며, 1995년에 정부·의회의 합의로 일부 개정되었다. 이에 따라 의회가 단순 과반수의 찬성으로 대통령의 거부권을 무효화할 수 있게 된 반면 대통령의 의안 묵살권이 폐지되는 등 의회의 권한과 독립성이 강화되었다.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다. 의회는 비례대표제로 선출되는 5년 임기의 의원 90명들로 구성되며 단원제이다. 우파·중도우파·중도좌파·좌파 성향의 정당들이 난립해 있으나 주요 정당은 1996년에 실시된 총선에서 42개 의석을 획득한 집권여당 자유연합(Liberal Alliance/AL)과 36석을 획득한 FSLN이다. 16세 이상의 국민이 참정권을 행사한다. 모든 선거와 국민투표는 최고선거위원회가 관장하며, 5년 임기의 최고선거위원회 위원 5명은 의회에서 선출된다. 사법부는 대법원이 관장한다. 1995년의 헌법 개정에 따라 대법관이 9명에서 12명으로 늘어남으로써 대법원의 독립성이 강화되었다. 7년 임기의 대법관은 의회에서 선출된다. 그밖에 고등법원·지방법원 및 노동·행정 재판소가 있다.

니카라과 국민의 보건·교육·복지는 산디니스타 정부하에서 향상되었다. 산디니스타 정부는 과거 수십년 동안 지속된 소모사 체제하에서 무시되었던 빈민들을 위한 제도 마련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문맹 퇴치 십자군'(1980)의 활동으로 50%가 넘었던 성인 문맹률이 15% 이하로 떨어지고 각급 정규교육이 크게 확대되었으며 의료 서비스도 크게 개선되었다. 영아사망률은 큰 폭으로 떨어지고 평균수명은 크게 늘어났다. 사회복지·보장 정책도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은 1980년대 말에 내전과 경제사정의 악화로 크게 위축되었고 1990년 이후에는 공공부문 감축 조치로 후퇴를 거듭했다. 아직도 장염·결핵·파상풍·장티푸스 등이 만연하고 전문 의료인력과 의료시설이 빈약하다. 평균수명은 1996년 현재 남자 63.4세, 여자 68.1세이다.

6∼13세까지 무상 의무교육이 실시된다. 초등학생 나이의 아동 가운데 약 3/4이 초등학교에 다니지만 중등학교 진학률은 저조하다. 전통 있는 고등교육 기관으로 국립자치대학교(1812년 설립)와 중앙아메리카대학교(1961년 설립)가 있으며, 1980∼90년대에 몇몇 대학이 신설되었다. 여러 개의 일간지가 발행되고 있으며 신문마다 정치적 입장을 강하게 내세운다.

소모사 체제와 산디니스타 정부로부터 잇달아 미움을 샀던 니카라과 최대 일간지 〈프렌사 La Prensa〉는 보수세력을 대변하고, 〈엘 누에보 디아리오 El Nuevo Diario〉와 한때 FLSN의 기관지였던 〈바리카다 Baricada〉는 FLSN을 지지한다. 헌법에 명시된 대로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으며, 소모사 체제에 이어 산디니스타 정부 때 만연했던 언론 검열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니카라과 수도 마나과(Manag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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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니카라과의 풍부한 문화적 전통에는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첨예한 계급·인종 갈등이 반영되어 있다. 상류사회의 전문적인(professional) 문화는 니카라과의 세계적인 시인 루벤 다리오의 19세기 말∼20세기 초 작품에 표현되었고, 민중들의 문화적 전통은 아름다운 예술품과 공예품, 종교의식, 컨트리 음악으로 나타났다.

1970년대∼1990년의 저항과 혁명의 드라마와 열기 속에서 많은 뛰어난 예술 작품이 나왔다. 알레한드로 카날레스, 아르만도 모랄레스, 레온시온 사엔스의 회화와 지오콘다 벨리, 에르네스토 카르데날의 시, 부통령 세르지오 라미레스의 소설, 오마르 카베사스의 증언록, 카를로스 메히아 고도이의 '새 노래 운동', 알란 볼트의 연극이 이에 속한다.

흔히 수입된 고급 문화를 선호한 소모사 체제와 달리 산디니스타 정부는 전문 예술가들과 아마추어 예술가들에게 '민주·민족·반제' 예술을 장려했다. 문화부가 신설되고 '산디니스타 문화연맹'이 조직되었다. 이 두 기관은 박물관을 세우고 전문 예술가들을 지원하고 국민의 예술적 재능을 함양하기 위한 연구집회를 널리 조직했다. 그러나 1980년대 말에 이르러 긴축 정책을 피할 수 없게 되자 정부의 예술 지원도 축소되었다.

니카라과의 박물관·도서관은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이며 궁색하게 유지되고 있다. 1979년 산디니스타 혁명 이전에 건립된 루벤 다리오 박물관(시우다드 다리오 소재)은 물론 국립도서관·국립박물관(마나과 소재)의 시설은 현재 볼품없다. 산디니스타 정부가 건립한 혁명박물관과 '문명 퇴치 십자군 박물관', 산디노 박물관 등은 1990년 이후 폐관되거나 방치되었다. 연중 종교 공휴일에 축제가 벌어진다. 그중 12월 8일에 절정을 이루는 무염시태 기념행사인 '라 퓨리시마'(La Purisima)가 가장 중요하다. 니카라과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는 야구이다.

니카라과의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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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대에 남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니카라과 서부의 태평양 연안으로 건너와 정착했다.

10세기에는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의 인디언들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16세기에 스페인인들은 이들 부족 가운데 유력한 한 부족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킴으로써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이들과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150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니카라과 동부의 카리브 해 연안에 상륙한 데 이어 1522년 스페인 정복자 힐 곤살레스 다빌라에 의해 이 지역을 정복하고자 하는 최초의 시도가 이루어졌다.

그는 약 3만 명의 인디언을 개종시키고 9만 페소 어치의 금을 가져 왔으며 지협을 횡단할 수 있는 수로를 발견했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성난 원주민들에 의해 쫓겨났다. 이때 니카라과 호 주변 지역의 원주민을 이끈 부족장의 이름이 니카라오인데, 니카라과라는 국명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항구적인 식민지화가 시작된 것은 1524년 스페인 탐험가이자 군인인 헤르난데스 데 코르도바에 의해서였다.

스페인의 니카라과 정복은 니카라과 태평양 연안 지역의 인디언 원주민들에게 재앙이었다. 100만 명 가량이었던 인구가 30년 만에 불과 수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원주민의 절반은 구대륙의 전염병에 휩쓸려 죽고, 그나마 살아 남은 인구의 대다수는 신대륙의 다른 스페인 식민지들로 노예로 팔려 갔다.

이처럼 인구가 격감한 후 니카라과는 스페인 제국의 눈길에서 벗어난 변경지대로서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부 내륙의 식민 도시 그라나다레온이 권력과 명성의 맞수로 떠올랐다. 그라나다는 농업과 산 후안 강을 통한 스페인과의 무역에 의존했고, 레온은 태평양 연안에 있는 스페인 식민지들과의 교역에 의존했다. 그라나다가 보수적인 귀족 지주들이 득세하는 농업 중심지로 발전한 반면, 레온은 자유분방하고 지적인 도시로 발전했다.

이 작은 두 식민지 변경 도시는 해적들로부터 빈번히 공격을 받았다.

17세기 말에는 영국이 카리브 해 연안 지역의 미스키토 인디언들과 동맹을 맺었다. 그곳에는 이미 블루필즈 정착촌이 있었다. 영국인들은 모스키토 해안에 정착해 한동안(1740∼86) 이곳을 보호령으로 삼았다.

1811년, 멕시코·엘살바도르의 반(反)스페인 투쟁에 고무된 혁명가들이 니카라과 통치를 담당하는 행정관을 몰아냈다.

그러나 레온은 왕당파로 돌아섰고 그라나다는 불충의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1821년 중앙아메리카의 식민지들이 과테말라에서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할 때에도 레온은 거부하고 그라나다는 동의했다. 두 도시는 멕시코와의 합병(1822∼23)에 대해서는 함께 받아들였지만 내내 티격태격하다 1826년에 중앙아메리카연방에 가입했다. 니카라과는 1838년에 연방에서 탈퇴하고 독립했다. 그후 레온과 그라나다는 각각 자유당·보수당의 거점으로서 경쟁을 계속했다.

스페인이 물러간 다음 모스키토 해안의 '왕'은 영국 정부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결국 블루필즈에 영국 관리들을 다시 불러들이는 형국이 되었다.

1848년 영국인들은 카리브 해 연안의 작은 항구인 산 후안 델 노르테를 점령하고 이곳을 그레이타운이라고 개명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자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횡단로로서의 니카라과의 전략적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코넬리우스 밴더빌트의 증기선회사는 산후안 강과 니카라과 호 항로에 증기선을 띄워 캘리포니아 금광을 찾아가는 사람들을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실어날랐다.

1855년 보수당과 내전 중이던 자유당의 요청으로 미국인 윌리엄 워커가 용병들을 이끌고 니카라과에 잠입했다.

그는 군사적으로 혁혁한 공을 세우고 1956년 니카라과 대통령직에 올지만 이듬해에 중앙아메리카의 5개 공화국과 밴더빌트 증기선회사의 연합세력에게 패주했다. 1857∼93년에는 보수당이 니카라과를 통치했다. 보수당 정권하에서 니카라과는 상대적으로 평화를 누렸으나 민주주의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1857년 자유당·보수당 사이의 역학관계에 따라 레온과 그라나다로 여러 차례 옮겨졌던 수도가 두 도시의 합의로 중간 지점인 마나과로 정해졌다.

1860년 니카라과와 영국은 동부 연안 지역을 니카라과에 재편입시키되 자치 보호구역의 지위를 부여하는 내용의 협정을 맺었다. 동부의 모스키토족에 대한 관할권은 호세 산토스 셀라야 대통령의 자유당 정부(1893∼1909)에 이르러서야 확립되었다.

셀라야대통령은 독재자였지만 확고한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중앙 아메리카의 재통합 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운하건설권의 미국 양여를 거부해 미국은 운하 건설지로 파나마에 눈을 돌려야 했다.

게다가 셀라야 대통령이 일본을 끌여들여 미국이 건설할 운하와 경쟁할 운하를 세우려 한다는 소문까지 나돌자 미국은 보수당의 반란을 부추겼다. 이 반란에 가담한 미국인 용병 2명이 처형되자 미국은 블루필즈에 해병대를 상륙시켜 자유당의 승리를 차단했다. 결국 셀라야는 사임했지만 미국은 새로 들어선 호세 마드리스 정부(1909∼10)마저 인정하지 않았다. 내전이 계속된 끝에 1911년 아돌포 디아즈가 이끄는 보수당 정부(1911∼17)가 들어섰고, 보수당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미국은 1912년 해병대를 파견했다. 미국 대사관에 주둔한 100명의 해병 수비대는 보수당의 에밀리아차모로 바르가스 대통령(1917∼21)과 그의 삼촌 디에고 마누엘 차모로 대통령(1921∼23)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다.

미국은 브라이언-차모로 조약(1914 서명, 1916 비준)에 따라 운하 독점권을 확보했고, 1925∼26년의 9개월을 제외하고 1933년까지 니카라과에 해병대를 계속 주둔시켰다.

1925년 미국 해병대가 일시 철수하자 쿠데타로 정권을 재장악한 에밀리아노 차모로 바르가스는 위기에 봉착했다. 그가 미국과 중앙 아메리카 국가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채 물러가고 아돌포 디아즈가 다시 대통령이 되었다(1926∼28). 자유당 지도자 호세 마리아 몬카다와 후안 바우티스타 사사카, 세사르 아우구스토 산디노는 반란을 일으켰다.

미국은 아돌포 디아즈 대통령의 보수당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1927년 해병대 2,000명을 파견했다. 반란 지도자 몬카다와 사사카는 6개월 후 미국의 내전 종식 협상을 받아들여 1928년과 1932년에 미국 후견하에 치러진 2차례의 선거에서 차례대로 대통령에 선출되어 각각 1928∼33년과 1933∼36년에 집권했다. 그러나 산디노는 1933년 1월 미국 해병대가 철수하고 사사카가 대통령에 취임할 때까지 반미(反美) 투쟁을 계속했다.

미국 해병대가 철수한 후 미국 해병대로부터 훈련받은 과르디아 나시오날(국민방위군)이 니카라과의 질서유지를 떠맡았다.

1934년 국민방위군 사령관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 장군 휘하의 장교들이 모의해 자유당 반군 지도자 산디노를 암살했다. 이어 소모사 가르시아는 자유당·보수당내 파벌세력들의 후원을 받으며 사카사 대통령을 축출(1936)하고 1937년 1월 선거에 단독 출마해 부정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소모사 가르시아는 헌법을 개정해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고 20년 동안 대통령 또는 총사령관으로서 철권을 휘둘렀다.

1930년대부터 수출이 줄곧 늘었지만, 국가 수입의 수혜자는 국민이 아니라 소모사가(家)와 추종세력들이었다(소모사가).

소모사 가르시아는 자신이 이끄는 민족자유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다음 날인 1956년 9월 21일에 시인 리고베르토 로페스 페레스에게 저격당해 8일 후 죽었다. 그의 뒤를 이어 큰아들 루이스 소모사 데바일레가 1957년 2월에 실시된 산거에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루이스 소모사는 아버지보다 온건하게 통치하는 한편 1960년에는 온두라스와의 오랜 국경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양보책을 수용하고 1961년 미국의 쿠바 피그스 만 침공에 협력했다.

1962년 카를로스 폰세카 아마도르, 실비아 마요르가, 토마스 보르게 모르티네스가 소모사 체제를 전복하기 위해 사회주의 무장조직인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FSLN)을 결성했다. 1934년에 암살된 혁명 영웅 산디노의 이름을 딴 FSLN은 곧 노동자·농민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소모사가는 1963년 레네 구티에레스 대통령을 꼭두각시로 내세운 데 이어 1966년 그가 죽자 로렌소 구에레로 구티에레스를 대리인으로 내세웠다.

경제는 성장했으나 국민은 여전히 가난에 시달렸다. 1967년 초 루이스 소모사가 죽자 그의 동생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일레가 형식적인 선거를 통해 수개월 후 대통령에 올랐다. 그는 1972년 5월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정치를 3두체제에 맡기는 한편 국민방위대 총사령관직만 유지했다.

1972년 12월 마나과에 지진이 일어나 6,000명의 사망자와 3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국가비상위원회 위원장에 오른 아나스타시오 소모사는 자국 국민을 돕기 위한 국제사회의 원조를 횡령했다. 그는 1974년 니카라과 역사상 10번째의 헌법을 제정해 스스로 대통령에 올라 연임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해 말이 되기 전에 널리 관심을 끈 2개의 진정한 반대세력인 FSLN와 일간지 〈프렌사〉의 편집인 겸 발행인 비올레타 바리오스 데 차모로가 결성한 조직이 민주자유연합(UDEL)을 소집했다. 1974년 12월 FSLN은 소모사 진영의 주요 인물들을 납치해 인질로 삼고 정치범 석방이라는 대가를 얻어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정부는 2년 6개월 동안 대대적인 반군 소탕작전에 나섰다. 이때 FSLN 지도자 카를로스 폰세카와 수천 명의 무고한 농민이 살해되었다. 1977년에는 로스 도스(12의 뜻)라는 조직이 UDEL과 FSLN 및 기타 조직을 포괄하는 반(反)소모사 연대를 도모했다. 1978년 1월 〈프렌사〉 편집인 페드로 조아킨 차모로가 암살되자 동맹파업과 폭력사태가 잇따랐다.

그해 8월 FSLN은 마나과의 국립궁전을 공격해 1,000명이 넘는 인질을 붙잡고 정부군과 2일간 대치하면서 자신의 요구의 대부분을 관철시켰다.

국민방위대가 부분적으로 사태를 다시 장악한 가운데 동맹파업이 다시 일어나고 몇몇 주요도시가 FSLN에 함락되는 등 봉기가 확산되었으나 결국 진압되고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듬해 7월 FSLN은 마지막 공세를 펼쳤다. 도시들이 연이어 FSLN의 수중에 떨어졌다. 마침내 아나스타시오 소모사는 7월 17일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망명했으며 이틀 후 FSLN이 마나과에 입성해 국민방위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로써 46년간에 걸친 권력을 휘둘러 온 소모사 체제가 마침내 종식되었다.

FSLN은 소모사 체제로부터 피폐한 나라를 넘겨받았다. 집 없이 떠돌아 다니는 국민이 약 50만에 이르고 장기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살해된 국민은 3만 명이 넘었다. 경제는 파산 상태였다. 1979년 7월 FSLN은 국가재건 임시정부(혁명위원회)를 수립한 데 이어 이듬해 5월에는 과도의회의 역할을 하게 될 국가회의를 구성했다.

1979∼80년 산디니스타 정부는 소모사가와 그 일당 및 지지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민간 은행과 보험회사, 광물·임업 자원을 국유화했으며 식료품 수출입을 통제했다.

한편 개인의 기본적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이 제정되었다. 망명 중이던 아나스타시오 소모사는 1980년 9월에 파라과이의 아순시온에서 암살되었다.

산디니스타 정부는 비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를 확대하기도 했으나 쿠바를 비롯한 사회주의권 국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미국은 이를 서반구에서의 공산주의의 팽창으로 받아들였다. 1980년부터는 아르헨티나 군부의 지원을 받는 반정부 게릴라의 활동이 전개되었다.

1981년에 미국은 니카라과에 대한 원조를 중단했고, 그해 말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이른바 '콘트라 반군'의 선발·훈련·무장을 위한 자금으로 약 2,000만 달러를 지원하도록 승인했다. 콘트라 반군은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지원하에 온두라드·코스타리카 접경지역에 기지를 만들고 오지를 무대로 지구전을 펼쳤다.

1984년 11월에 실시된 선거에서 FSLN의 대통령 후보 다니엘 오르테가 사베드라가 65%의 득표로 압승했다.

이듬해 1월에 다니엘 오르테가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신헌법 마련을 위한 의회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는 국제감시단으로부터 공정하다는 평가를 받은 이 선거를 사기극이라고 비난했다. 미국은 이미 1982년부터 국제부흥개발은행(World Bank)과 미주개발은행(Inter-American Development Bank)에 대한 자국의 영향력을 이용해 이들에 대한 니카라과의 지원 요청을 대부분 봉쇄해 온 데 이어, 1985년에는 대(對)니카라과 금수조치를 내렸다.

콘드타 반군의 병력도 1980년대 중엽에 약 15,000명으로 늘었다. 산디니스타 정부는 군사력을 강화하는 한편 공격용 헬리콥터 등의 주요 장비를 구입해 반군 소탕에 나섰다. 그 결과 1980년대 말 콘트라 반군의 활동이 무디어졌다. 미국의 이러한 적대적 조치와 내전에 따른 손실 및 경제적 혼란, 산디니스타 정부의 정책적 오류가 맞물려 니카라과 경제는 1985년부터 곤두박질했다.

1987년 1월 산디니스타 정부는 자유선거를 내용으로 하는 신헌법을 제정했고, 그해에 미국 의회는 미국 정부의 콘트라 반군에 대한 추가지원 요청을 거부했다.

이로써 그해 8월부터 니카라과 내전은 군사적 문제에서 정치적 문제로 옮겨갔다.

1988년 인플레이션이 30,000%를 넘자 산디니스타 정부는 이듬해에 인기 없는 긴축정책을 실시해야 했다. 이에 따라 보건·교육·주택·영양 예산이 크게 삭감되었다. 이를 배경으로 1990년 2월 25일에 역사적인 자유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 기간 중 콘트라 반군의 활동이 강화되었다.

국제사회가 예의주시하는 가운데 미국의 지지와 자금지원을 받는 국민야당연합(UNO)과 UNO의 대통령 후보 비올레타 바리오스 데 차모로(암살당한 〈프렌사〉 전 편집인 페드로 조아킨 차모로의 아내)가 승리를 거두었고, 그해 4월 25일 평화적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차모로 정부는 산디니스타 정부가 실시하던 많은 정책을 폐기했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따라 공기업이 민영화되고 공공부문 지출은 삭감되었으며 소농에 의한 내수식량의 생산보다는 수출을 위한 대규모 농업이 강조되었다. 주권 쟁취를 위한 오랜 투쟁의 역사를 강조한 산디니스타 집권기의 교과서들이 사라지고 미국국제개발기구(U.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의 기금으로 구입한 '정치색이 덜한' 교과서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차모로 정부는 비록 보수적이었으나 국민화해에 관심을 가졌다.

1990년 6월 콘트라 반군을 공식적으로 해산시키고 8만 명이 넘는 군 병력을 1만 5,000명 미만으로 감축했다. UNO 지도부의 정치 보복 유혹을을 뿌리치고 의회에서 FSLN 및 일단의 UNO 온건파와 암묵적으로 연대했다.

1990년대 초는 어려운 시기였다. 경제는 침체했다. 긴축정책으로 인플레이션은 잡혔으나 실업과 대다수 가난한 국민의 고통이 크게 늘었다. 게다가 사회가 점차 양극화하고, 불만을 품은 옛 콘트라 반군세력과 전역군인들이 재무장해 폭력사태를 일으켰다.

차모로 대통령은 약 7년의 재임 기간 동안 민주주의 발전과 국민화합, 경제안정, 공기업 사유화, 인권향상 등에서 괄목한 발전을 이룩했다.

1994년에 제정된 군법에 따라 1995년 산디니스타인민군 사령관 움베르토 오르테가 장군이 물러나고 군대 이름도 니카라과 국군으로 바뀌었다. 1996년 의회가 새로운 경찰조직법을 통과시킴에 따라 경찰에 대한 민간의 지배도 한층 강화되었다.

1996년 10월 대통령 선거와 총선, 시장 선거가 실시되었다. 국제감시단과 첫발을 내디딘 니카라과의 선거감시단 '에티카 이 트란스파렌시아'(윤리와 투명)로부터 자유롭고 공정했다는 평가를 받은 이 선거에서 니카라과 국민은 중도좌파 성향의 자유연합(Liberal Alliance) 후보인 아르놀도 알레만 전(前) 마나과 시장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1997년 1월 10일 알레만 대통령의 취임으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들 간의 정권 이양이 처음으로 실현되었다.

레콜렉시온(Recoleccion) 교회, 레온(Leon)에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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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카라과와 한국과의 관계

외교

니카라과는 소모사 체제가 지배하던 1962년 1월에 한국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한국은 1963년 6월 공관을 설치했으며 주 코스타리카 대사가 겸임했다. 이후 1979년 8월에 산디니스타 정권 수립 이후 외교관계가 동결되었다가 1990년 8월에 외교관계가 정상화되었으며 2007년 12월에 대사관이 설치되었다. 니카라과는 1995년 6월에 주한 니카라과 대사관을 개설했다가 1997년 5월에 니카라과 정부의 재외공관 감축 계획에 따라 폐쇄되어 주일 대사관이 겸임했으며, 이후 2014년 7월에 주한 니카라과 대사관이 재개설했다. 10년 만인 2024년 4월, 재정악화로 주한 니카라과 대사관을 폐쇄하고, 다시 주일 대사관이 겸임하도록 했다.

한편 니카라과는 산디니스타 혁명 후인 1979년 8월에 북한과 외교관계를 맺었고 그해 12월에 주 니카라과 대사관을 설치했다. 니카라과와 북한이 체결한 주요 협정·합의서로는 보도교환 및 상호협조 협정(1980년 5월), 문화협조협정(1980년 9월), 경제 및 과학기술문화협조협정(1983년 3월), 원산·그라나다 친선도시 관계 설정에 관한 합의서(1994녀 5월) 등이 있다. 북한은 1995년 6월 에 주 니카라과 대사관을 폐쇄하고 주 쿠바대사에게 공관 업무를 겸임케 하고 있다. 니카라과는 주일본대사관에서 겸임하고 있다.

경제·통상·주요 협정

한국은 모잠비크의 경제개발을 협력하기 위해 대외경제협력기금(EDCF, Economic Development Cooperation Fund) 차관 4.2억 달러를 제공했으며, 1987년부터 2015년까지 1,000만 달러를 무상 원조했다. 니카라과에는 33개의 한국 섬유·의류 업체 및 협력업체가 진출해 있으며, 한국은 니카라과에 2016년까지 누계 총 6,300만 달러를 투자했다.

한국개발연구소는 2018년 2월에 니카라과 ICT 기반 중등교사 역량 강화 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2018년 1월에 한국의 대외경제협력기금 자금으로 니카라과 수도 마나과 시(市) 교통현대화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2018년 1월에 한국과학기술원(KIST) 스마트 팜 관련 연구자들이 초청되어 한국의 스마트 팜 기술 및 활용을 니카라과에 전수하기 위한 관련 세미나가 개최되었다.

2023년 기준 니카라과의 대한국 수출액은 1,251만 달러, 수입액은 9,031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당류 및 설탕과자, 구리, 커피 및 차 등이고, 주요 철강, 메리야스 편물, 철도용 및 궤도용 외의 차량과 부속품 등이다. 1973년 6월에 한국인 기술자 108명이 정유 탱크 건설공사에 참가한 적이 있다. 양국이 체결한 협정으로는 문화협정(1969년 2월), 사증(비자)면제협정(1995년 4월), 투자보장협정(2001년 6월), 무상원조기본협정(2014년 3월), 운전면허 상호인정 및 교환협정(2017년 4월 발효), 한-중미 FTA(2018년 2월) 등이 있다.  

문화교류·교민 현황

2017년 9월에 니카라과 국회에서 한-니카라과 우정의 해 및 우정의 날 선포식이 거행되었다. 2023년 기준 니카라과에는 705명의 재외동포가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니카라과 수도인 마나과에 거주하고 있다. 한국에는 2023년 기준 40명의 니카라과 국적의 등록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니카라과와 한국의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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