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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09년 미국에 사는 한국인들이 조직한 단체. 장인환·전명운 의사의 스티븐스 사살을 계기로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 공립협회와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가 통합해 1909년 2월 국민회를 조직했다. 1910년 대동보국회를 흡수한 뒤 대한인국민회로 이름을 고쳤다. 해외의 한인을 총망라한 단체를 구성하기 위해 대한인국민회는 한인이 살고 있는 지역마다 지방총회를 조직하고, 1912년 북아메리카·하와이·시베리아·만주 등 각 지방총회의 대표자회의를 소집했다. 이 단체는 미국정부에 한인과 일본인의 대우를 구별해줄 것을 요청해 승인을 받아낸 바 있다. 이들은 국권 피탈 전에 한국을 떠난 재미한인은 일본정부와 관계가 없다고 밝히며, 일본의 한국 병합에 절대 반대의 뜻을 전했다. 기관지로 〈신한민보〉를 발간해 국내외에 배포했으며, 광복 때까지 해외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장인환·전명운 의사의 스티븐스 사살을 계기로 하와이 한인합성협회와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공립협회가 통합하여 1909년 2월 국민회를 조직했다. 이어 1910년 5월 대동보국회를 흡수하여 대한인국민회로 이름을 고쳤다.
대한인국민회는 해외의 한인을 총망라한 단체로 구성하기 위해 한인이 살고 있는 지역마다 지방총회를 조직하고, 1912년에는 북아메리카·하와이·시베리아·만주 등 각 지방총회의 대표자회의를 소집하여 샌프란시스코에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설치했다. 중앙총회 회장은 안창호가 맡았다가 백일규·윤병구(尹炳球) 등이 이어받아 활동했다.
대한인국민회의 주요한 성과로는 한인과 일본인의 대우를 구별해 줄 것을 미국정부에 요청하여 승인받은 사실이다. 승인 내용은 "재미한인은 국권피탈 전에 한국을 떠난 사람들로서 한국의 병합을 절대 반대하고 일본정부와 관계가 없기 때문에, 앞으로 재미한인에 관계되는 일은 공사를 막론하고 일본정부나 관리를 통하지 않고 한인사회와 직접 교섭한다"는 것이었다. 이 조치를 통해 대한인국민회는 재미동포를 대표하는 기관으로 인정을 받았다.
1919년 2월에는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청원서를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도 했다. 기관지로 〈신한민보 新韓民報〉를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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