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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릉비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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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414년(장수왕 2)에 고구려 제19대 왕인 광개토왕의 훈적(勳績)을 기리고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를 명기해두기 위해 세운 비에 대한 학문적 연구 성과.

압록강 북쪽에 큰 비가 있다는 사실은 〈용비어천가〉를 비롯해 조선 전기의 문헌에서 간혹 언급한 경우가 있으나 비문을 확인한 적은 없었다.

17세기 이후 청(淸)에서 이 지역을 만주족의 발상지로 간주하여 봉금제도(封禁制度 : 거주금지 조치)를 시행하자 인적이 뜸해져 잊혀진 상태로 있다가, 봉금제도가 해제되고 회인현(懷仁縣)이 설치된 뒤 1880년을 전후해서 재발견되었다.

당시 비가 재발견된 경위는 불분명한 점이 많다. 비 발견의 소식이 알려지자 당시 회인현의 지현(知縣)이던 장월(章樾)이 관월산(關月山)을 보내어 탁본을 만들게 했고, 그후 중국의 서예가나 금석학자들에 의해 많은 탁본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비문의 내용을 자료로 구체적인 역사연구를 한 것은 아니었고, 초기의 탁본은 대개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었다.

비가 재발견된 초기에 탁본을 만드는 과정에서 이끼를 제거하기 위해 불을 질러 비면의 일부가 탈락되었고, 정교한 탁본을 만들기 위해 석회를 발라 비면을 손상시킴으로써 이후 연구에 논란을 일으켰다.

비문을 해독하고 연구를 독점한 것은 일본인이었다. 일본에서 처음 입수한 비문은 만주지역에서 정보수집활동을 수행하던 포병중위 사쿠오[酒句景信]가 1883년에 가져온 쌍구가묵본이었다. 이를 기초로 참모본부에서 해독작업을 진행했고, 1888년에 그 내용이 아세아협회의 기관지인 〈회여록 會餘錄〉 5집에 실려 일반에게 알려졌다.

이후 속속 연구물들이 나오기 시작했으나, 그 대부분은 '신묘년기사'(辛卯年記事)와 〈니혼쇼키 日本書記〉의 신공황후(神功皇后)가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지역을 정벌했다는 전설적 내용을 관련지어 그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연구 속에서 소위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 정설로 정착되었다. 그뒤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고 나서는 본격적인 현지조사가 이루어져, 1913년에는 세키노[關野貞]·이마니시[今西龍]가 자세한 조사를 실시했다.

그리고 만주사변 이후 1935년에는 이케우치[池內宏]를 비롯한 조사단이 현지에 가서 고분을 비롯한 유적을 자세히 조사했다.

일본인에 의해 연구가 독점되고 있는 동안 한국인들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08년 간행된 〈증보문헌비고〉에 비문이 수록되었고, 1909년에 박은식과 신채호가 언론에 간단히 소개하기도 했다. 그리고 중국으로 망명한 뒤 신채호가 1914년 현지에 가서 직접 확인하고, 〈조선상고사〉에서 비문의 "결자(缺字)에 석회를 발라 첨작(添作)한 곳이 있으므로 학자가 그 진(眞)을 실(失)함을 한(恨)한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도구가 없어 비를 실측하지도 못했고 탁본을 자료로 연구에 이용하지도 못했다.

해방 전 한국인에 의한 비문연구로 가장 주목받는 것은 정인보의 〈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석략 廣開土境平安好太王陵碑文釋略〉이라 할 수 있다. 이는 1930년대말 무렵에 집필된 것으로, 신묘년기사에 대해 일본인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

즉 기존의 일본인은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을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신라 등을 깨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그는 '도해파'(渡海破)의 주어를 고구려로 보아 "고구려가 왜를 깨뜨리고 백제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전혀 상반되는 견해를 제시했던 것이다. 해방 이후 일본에서는 1959년 데이지로[水谷悌二郞]가 여러 탁본들을 대조하여 각각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고, 석회를 바르기 전의 탁본과 바른 뒤의 탁본을 구별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그동안 일본에서 진행된 연구에 근본적인 재검토를 요하는 문제제기였다.

한편 북한에서는 1963년에 중국과 합동으로 능비가 있는 현지를 찾아가서 조사를 실시했고, 1966년에는 박시형의 〈광개토왕릉비〉가 간행되었다. 여기서는 능비에 관한 우리쪽 문헌을 거의 망라하여 찾아내고, 또 비의 재발견 경로를 상세히 검토했다.

또 문제가 되는 '신묘년기사'에 대해서는 정인보의 해석법을 받아들여 기존에 일본인들이 주장해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연구의 일환으로 1966년에 김석형이 〈초기 조·일관계사 연구〉를 간행하여 일본 식민주의 사학자들이 주장해온 임나일본부설을 전면 부정했다. 그리고 정반대로 삼한 삼국의 이주민들이 일본열도로 이주해 분국(分國)을 수립했다는 새로운 학설을 주장해, 이후 북한 학계의 정설로 굳어졌다.

그는 신묘년기사에 대해 "왜가 신묘년에 와서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백제를 깨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한 박시형과는 약간 해석을 달리했다. 그러나 북한의 연구가 국내에 전면적으로 소개된 것은 1980년대 후반으로 남한의 연구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1970년대초에 재일 연구자 이진희(李進熙)는 1900년 전후해 참모본부에 의해 비문의 문자가 석회로 조작되었다는, 이른바 '석회도부작전설'(石灰塗付作戰說)을 주장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에 대해 일본 학계의 일부는 근대 일본 역사학의 체질문제를 거론하여 자기반성을 행하기도 하고, 일부에서는 반론을 펴기도 했으나 자체적으로 기존의 임나일본부설을 재검토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즈음부터 국내에서 비로소 정밀한 검토가 이루어지기 시작해, 80년대 들어 다수의 정밀한 연구가 나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금은 신묘년기사가 왜를 주체로 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가 주체가 된 것이라는 전제 아래, 비문 속의 왜는 백제나 가야의 활동에 종속적 역할을 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1984년에는 왕젠췬이 장기간의 실지조사를 토대로 〈호태왕비연구〉를 발표해 다시 한번 활발한 논의가 이어졌다. 왕젠췬은 현지조사의 이점을 살려 기왕의 잘못 읽은 부분은 시정하고 탈락된 문자를 복원했으며, 문자의 총수를 1,775자로 확정했다. 그리고 비문의 왜를 일본 기타큐슈[北九州]의 해적집단으로 보아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는 한편 이진희의 석회조작설도 비판한 점에서 연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여 다시금 논의가 활기를 띠었다.

광개토왕릉비의 탁본

ⓒ Trebdsoild/위키피디아 | CC BY-SA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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