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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우리나라 중세의 왕조 고려에 사회적 영향이 컸던 사상.
고려 일대를 통해 지배적인 역할을 담당한 이데올로기는 불교였다.
불교는 왕실과 민간의 신앙 대상이었으며, 국가가 정책적으로 보호·육성했다. 당시의 불교는 교종과 선종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고려 건국과정에서는 호족세력과 연결된 선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러나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가 정비되면서 그에 적합한 교종 우위의 불교정책이 추진되고, 균여(均如) 등의 활약에 힘입어 화엄종·법상종을 비롯한 교종이 우세해졌다.
특히 문종의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義天)은 교관겸수(敎觀兼修)를 내세우며 천태종을 유포하여, 교종의 입장에서 교선의 일치를 추구했다. 그에 따라 선종은 약화되었다.
불교는 정치세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현실 정치에도 깊이 간여했다. 문벌귀족과 연결된 교종세력은 무인정권의 성립으로 정치정세가 일변하자 이에 격렬히 저항했으나 모두 진압되었다. 그에 따라 교종이 쇠퇴하고 다시 선종이 유행했다. 불교계 안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결사의 형태로 나타났다.
특히 수선사(修禪社)를 창건한 지눌(知訥)은 돈오점수(頓悟漸修)·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하며 선을 주로 하는 교선의 조화를 추구했는데, 그의 불교이론은 고려 불교가 도달한 최고의 수준이었다. 혜심(慧諶) 등이 계승한 결사운동은 조계종으로 발전했다.
한편 승려들은 승과를 거쳐 승계를 받았으며, 국사(國師)·왕사(王師)의 제도가 있어서 국가적인 대우를 받았다. 불교는 생활 습속에까지 깊숙이 침투되어 있었다. 향도(香徒) 조직, 장례에서의 화장 유행은 그러한 영향을 보여준다.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의 실현에 직접 이용한 이데올로기는 도덕적 합리주의에 입각한 유학이었다. 유학은 과거제도와 교육제도에 의해 장려되고 보장되었다. 성종 때의 최승로(崔承老)는 중앙집권적 정치체제 마련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고, 문종 때의 최충(崔冲)은 구재학당(九齋學堂)을 세워 유학의 이념을 널리 교육했다.
국가에서도 서적포(書籍舖)와 국학칠재(國學七齋), 양현고(養賢庫) 등을 설치하여 교육의 진흥을 꾀했다.
유학은 합리적인 사상체계로 정치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나, 고려 전기의 유학은 사장학(詞章學)·훈고학(訓詁學) 중심인데다 과거시험 준비에 치중하여 철학적 사상체계를 갖추는 방향으로 발전되지는 못했다. 후기에 신진사대부가 주자성리학(朱子性理學)을 도입하여 깊은 철학적 이해를 갖게 되면서 일대 전환을 하게 되었다.
안향(安珦)이 도입하고, 백이정(白頤正)·이제현(李齊賢) 등과 같은 사대부들이 발전시킨 성리학은 우주와 인간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해명하는 데 관심을 갖는 학문이었다. 고려가 수입한 성리학은 원이 관학화(官學化)한 것이어서 비록 이기론(理氣論)과 같은 사변적인 면보다는 실천적 기능을 강조했으나, 차츰 형이상학으로 발전했다. 그결과 불교의 교리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철학논쟁을 전개하고, 당시의 사회모순을 해결하려는 새로운 실천적 이념으로 기능하였다.
불교와 유학 이외에 풍수도참사상도 널리 퍼져 있었다.
일찍이 도선(道詵)의 풍수설을 따른 비보사찰(裨補寺刹) 건립과 서경(西京)의 중요성을 강조한 태조의 훈요십조에도 나타나는 풍수설은 도읍·궁궐·능묘에 알맞는 땅을 점치는 지상학(地相學)인데 도참사상과 결합하여 주로 연기비보설(延基裨補說)의 측면에서 정치에 이용되었다. 문종의 장원정(長源亭) 창건과 남경 설치, 숙종의 남경 건설과 예종의 서경 용덕궁(龍德宮) 창건, 명종의 삼소(三蘇)궁궐 창건과 고종의 백악궁 창건, 공민왕 이후의 계속적인 천도론 제기는 모두 그러한 예이다.
묘청의 난 때 서경의 지덕(地德)이 왕성하다고 주장한 것이나 삼별초가 용손십이진(龍孫十二盡) 참설에 고무된 것은 풍수도참을 반란에까지 이용한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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