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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조선 이전까지는 교종이라는 종파가 없었으며 고려 말에는 11종파가 있었다 한다. 숭유억불정책을 채용하였던 조선시대에는 이들 각 종파가 자율적인 성장을 이루지 못한 채 강제로 통폐합 당하게 되었다.
1424년(세종 6)에 조계종·천태종·총남종을 합하여 선종으로 하고, 화엄종·자은종·중신종·시흥종을 합하여 교종으로 하여 각각 18개소의 사원만을 인정하였다.
교종을 총괄하였던 교종도회소는 서울의 흥덕사였으며 18개소의 사찰과 1,800명의 승려들을 관장하였다.
중종 때 승과제도가 폐지되면서 교종은 존립기반을 잃었으나 명종의 섭정을 하던 문정왕후에 의해 선종과 함께 부활하였으나 문정왕후가 죽은 후 교종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조선조에 들어오기 이전까지는 교종이라는 특정한 종파가 없었으며 고려 후기에는 오교(五敎)라는 이름으로 통칭되었다.
고려말에는 조계종(曹溪宗)·총지종(摠持宗)·천태소자종(天台疏字宗)·천태법사종(天台法事宗)·화엄종(華嚴宗)·도문종(道門宗)·자은종(慈恩宗)·중도종(中道宗)·신인종(神印宗)·남산종(南山宗)·시흥종(始興宗) 등의 11종파가 있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조계종은 선종(禪宗), 총지종은 진언종(眞言宗), 천태소자종과 천태법사종은 천태종(天台宗), 도문종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화엄종(華嚴宗)의 일파이고, 중도종은 삼론종(三論宗), 신인종은 밀교(密敎), 남산종은 율종(律宗)이며, 시흥종에 대하여는 정토종(淨土宗)으로 보는 의견과 천태종 또는 열반종(涅槃宗)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숭유억불정책(崇儒抑佛政策)을 채용하였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이들 각 종파는 자율적인 성장을 이루지 못한 채 정부에 의하여 강제로 통폐합을 당하게 되었다.
조선의 태종은 배불정책(排佛政策)을 실시하여 왕사(王師)·국사(國師)제도를 폐지하고 도첩제(度牒制)를 강화한 다음 1407년(태종 7)에는 고려말의 11개 종파를 통폐합하여 조계종(曹溪宗)·천태종(天台宗)·총남종(摠南宗)·화엄종(華嚴宗)·자은종(慈恩宗)·중신종(中神宗)·시흥종(始興宗) 등 7종으로 축소시켰다.
이 과정에서 도문종은 화엄종에 흡수되었고, 중도종과 신인종이 합하여 중신종이 되었으며, 총지종과 남산종이 합하여 총남종이 되었다. 그리고 천태종은 천태소자종과 천태법사종을 합하여 하나로 만든 것이다. 이들 가운데 나중에 교종에 편입된 종파는 화엄종·자은종·중신종·시흥종 등으로 모두 119개소의 사찰이 여기에 소속되었다.
1424년(세종 6)에는 조계종(曹溪宗)·천태종(天台宗)·총남종(摠南宗)을 합하여 선종(禪宗)으로 하고, 화엄종(華嚴宗)·자은종(慈恩宗)·중신종(中神宗)·시흥종(始興宗)을 합하여 교종(敎宗)으로 하여 모든 종파를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정리하였으며, 각각 18개소의 사원만을 인정하여 다른 사찰들은 이의 지배를 받도록 하였다.
그리고 양종에 각각 도회소(都會所)를 두고 당대의 고승을 판교종사(判敎宗事)에 임명하여 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교종을 총괄하였던 교종도회소(敎宗都會所)는 서울의 동대문 밖의 흥덕사(興德寺)에 있었으며, 세워질 당시에는 18개소의 사찰과 3,790결의 전답, 1,800명의 승려들을 관장하였다.
도회소에서는 승과(僧科)가 치러지기도 하였는데, 교종에서는 〈화엄경 華嚴經〉과 〈십지론 十地論〉을 시험과목으로 삼았다.
이후 연산군(燕山君)이 도회소의 노비와 토지를 몰수하자, 원래 서울 정릉 동쪽의 흥천사(興天寺)에 있던 선종도회소와 함께 광주(廣州)의 청계사(淸溪寺)로 도회소를 옮겨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였다.
그러다가 중종(中宗)의 즉위와 더불어 승과제도가 폐지되면서 실질적으로 교종은 그 존립기반을 잃고 사라지게 되었으나, 1550년(명종 5) 당시 섭정을 하던 문정왕후(文定王后)에 의하여 선종과 함께 다시 부활하였다. 이때에는 도회소라는 명칭 대신 본사(本寺)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는데, 교종본사는 광릉 봉선사(奉先寺)에 있었으며, 판교종사는 수진(守眞)이었다.
그러나 문정왕후의 죽음과 더불어 양종제도가 폐지되었으며, 이에 따라 교종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이상에서 보듯이 교종의 탄생은 불교 자체 내의 발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세속권력의 강제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진언종 계통의 총지종과 율종 계통의 남산종을 합하여 총남종으로 하고, 삼론종 계통의 중도종과 밀교 계통의 신인종을 합하여 중신종을 만든 것 또는 교종의 성격이 강한 천태종을 선종에 통합한 사실 등을 통해 볼 때 이러한 통합과 선교양종의 구별이 불교 내부적인 근거를 갖지 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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