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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원시사회가 해체된 후 중세 봉건제사회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시기에 해당되는 사회.
원래 고대·중세·근대라는 3시대의 구분법은 르네상스기에 서구인들이 사용하던 용어에서 비롯되었다. 즉 르네상스인들은 생·사·부활의 3화음에 맞추어 그들이 정신적으로 복귀하고자 했던 그리스 로마 시대를 고전고대, 그 이후의 이른바 '암흑기'를 중세, 자신들이 살고 있는 '새로운' 시대를 근대라고 명명했다.
이후 이러한 '시간' 개념에 따른 시대명이 널리 사용되었으며, 19세기에 이르러 인류역사상에 존재했던 각기 다른 성격의 사회구성체를 이에 대응시키게 되었다.
사적 유물론에서 말하는 노예제사회·봉건제사회·자본주의사회가 그것으로, 이는 사회발전단계를 달리하는 계기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여기에 인류사에 대한 지식이 증가하면서 원시사회가 덧붙여졌다. 그러나 고대사회 전체를 일괄적으로 노예제사회로 규정하는 것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낮은 생산력 수준에 조응하는 평등한 인간관계를 특징으로 했던 원시사회가 생산력의 발전으로 해체된 이후에 성립한 고대사회는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고대사회라는 용어는 사회구성체의 성격과 관계없이 원시사회가 해체된 이후 등장한 계급사회를 가리키는 말로 널리 사용된다.
성립
최초의 사회형태인 원시사회는 생산수단에 대한 공동소유, 노동과정의 공동노동, 그 결과물인 생활물자의 공동분배를 특징으로 했다.
당시는 아직 노동도구가 유치하여 개인이나 개별 가족의 노동만으로는 자연조건을 이겨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구의 발달과 농업의 발전에 따라 원시사회의 성격이 변질되어갔다. 잉여생산물이 발생하고, 사적소유가 생겨나면서 사회구성원간의 평등한 관계는 무너졌다. 금속기의 사용이 여기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사적 소유는 동산에서 부동산으로 확대되었고 분업의 발전과 함께 여러 계급이 출현했다. 정치적 지배자가 등장하고 이들에 의해 주도된 전쟁은 더 큰 정치집단을 탄생시켰으며 마침내 국가가 성립했다. 이렇게 해서 원시사회의 해체와 고대사회의 성립이 이루어졌다. 세계사에서 계급과 국가가 발생하여 역사가 문명의 단계로 전개되는 과정이 가장 빨랐던 곳으로 4개의 지역을 꼽는다.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전개된 메소포타미아 문명, 나일 강 유역의 이집트 문명, 황하 유역의 중국문명, 인더스·갠지스 강 유역의 인도문명이 그것이다.
서양의 고대사회
개방적인 지리조건을 갖추고 있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BC 3500년경부터 도시국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도시문명의 성장 결과 문자와 청동기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다수의 도시국가가 성립하여 국왕을 중심으로 한 지배체제를 갖추었다. 대표적인 도시국가 우르에서는 귀족과 성직자·평민·노예로 사회계층이 나뉘어 있었다.
이 지역에서는 국제적인 교역으로 화폐경제가 일찍부터 발달했다. 바빌로니아에서는 정치적 지배자가 사제를 겸하는 신정정치가 행해졌다. 특히 BC 18세기에 바빌로니아의 유명한 왕이었던 함무라비가 반포한 법전은 최초의 성문법전이라는 점에서뿐 아니라 동해보복(同害報復)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점에서 유명하다(→ 함무라비 법전).
이집트 문명은 고대문명 중 가장 오래 지속된 경우에 속한다.
BC 3000년경에 최초 왕조가 성립했는데, 현재 남아 있는 피라미드의 벽화와 기록을 비롯한 파피루스, 로제타석(石) 등의 연구를 통해 많은 사실이 알려져 있다. 여기서도 국왕인 파라오는 종교와 정치의 영역을 모두 아우르고 있었다.
나일 강의 정기적인 범람은 천문학과 역법, 기하학이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고 영혼불멸의 사상으로 인해 미라가 만들어졌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는 관개사업이 농업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넓은 지역을 통합하는 강력한 권력의 출현이 필요했다.
그 때문에 완전한 계급분화가 이루어지기 전에 전제군주가 주민 일반을 예속시켜 지배하게 되었고, 피지배층의 인격적 독립성은 지극히 미미했다. 고대사회를 노예제사회로 보는 입장에서는 이들 지역의 피지배층이 전형적 의미의 노예가 아니라 하더라도 총체적으로 노예와 같은 처지에 있었음을 강조하기도 한다.
노예제가 하나의 경제제도로 자리잡고, 그에 입각한 생산활동이 해당 사회를 유지하는 근간이 되었던 경우는 그리스·로마가 대표적이었다. 따라서 그리스 로마를 전형적인 노예제사회라고 한다. 그리스인은 BC 1000년경까지는 씨족생활을 했으나 BC 9, 8세기에 자유시민에 의해 운영되는 도시국가인 폴리스가 성립했다.
대표적인 도시국가로는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있었다. 여기서는 지중해를 무대로 한 교환 화폐경제의 발달을 배경으로 노예를 부림으로써 찬란한 고대문화를 꽃피웠다.
고대 그리스에서 발달한 자연과학과 철학, 시민에 의한 민주정 등은 모두 노예노동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이후 로마가 지중해지역 전체를 석권하고 세계제국으로 발전하면서부터는 주변 지역으로부터 공급되는 다량의 노예가 농업노동에 투입되었다. 이때는 대규모 노예노동에 입각한 대토지경영인 라티푼디움(Latifundium)이 대표적이었다.
동양의 고대사회
고대 인도문명은 일찍 성립하긴 했지만 자료의 부족으로 많은 부분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다. 다만 독특한 신분제도인 카스트 제도와 함께 촌락공동체적 토지소유를 들어 역사적 정체성을 지적하기도 한다.
인도에서 성립한 불교는 이후 동양사회의 대표적인 종교로 발전했다. 중국은 전설상의 왕조인 하를 제외하면 은대부터 갑골문을 비롯한 많은 문자기록으로 상세한 연구가 이루어져 있다.
왕조별 변천을 보면,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성립하여 종법에 따른 분봉이 이루어지던 주나라가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무너지고 진이 성립했다. 이후 한(漢)-남북조-수-당을 거치면서 광대한 제국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공자에 의해 주장된 유교가 한대 이후 주류적인 정치사상으로 자리잡아 동양 각국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사회의 성격에 대해서는 노예제사회를 상정하는 견해와 이를 부정하는 견해가 나뉘어져 있다. 따라서 고대사회의 존속시기에 대해서도 매우 견해가 다양하다.
한국의 고대사회
우리나라의 경우, BC 1000년경에 한반도와 남만주 일대에는 청동기문화를 배경으로 다수의 정치집단이 성장하고 있었다. 이들이 정복과 복속을 통하여 차츰 더 큰 규모로 성장하여,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이 등장했다.
이 무렵이 고대사회의 성립기라 할 수 있다. 고조선은 BC 8, 7세기경에는 국가로서 뚜렷한 실체를 드러내었고, BC 5, 4세기경부터 철기문화가 전개되면서 한층 발전했다. 고조선의 법률인 '팔조범금'은 이미 사유재산이 성립하고 노예가 발생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한반도 중남부지방은 사회발전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북방에서 고조선이 멸망하고(BC 108) 부여가 등장하며 고구려가 뒤를 이을 무렵,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백제와 신라가 성립했다. 이들이 삼한 소국을 병합하면서 삼국이 정립(鼎立)하는 시대가 시작되었고, 마침내 7세기 중엽에는 신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삼국의 정치체제는 완전한 집권제가 아니라 유력한 세력들이 부를 구성하여 결집한 형태였다.
한편 고대사회 초기에 지배자의 권력은 종교적 권위에 크게 의존했으며 천손족의식(天孫族意識)으로 피지배층 위에 군림했다.
또 피지배층의 인격적 자립도가 낮아 순장(殉葬)이 널리 행해지기도 했다. 읍락사회는 수장층인 호민과 하호, 노예(노비)로 구성된 계급구조를 갖고 있었다. 이 하호를 읍락의 일반민으로 보는 것이 보통이며, 노예가 주된 생산층은 아니었다. 따라서 한국 고대사회의 성격에서 전형적인 노예제사회를 상정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하호를 포함한 피지배층이 총체적인 의미에서 노예와 같은 위치에 있었음을 강조하는 입장도 있다. 또 고대사회의 존속시기에 대해서는 삼국통일 이전까지, 통일신라까지, 고려 중기까지로 보는 견해 등이 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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