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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3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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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미국 |
대표작 | 「Surfers' Choice」(1962) |
서프 뮤직(Surf Music)이라 하면 누구나 해변의 아이들, 비치 보이스를 가장 먼저 떠올릴 테지만 딕 데일의 별명이 '서프 기타의 왕'(The King of Surf Guitar)임을 안다면 조금은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게다가 그의 영향은 단지 서프 기타에 머무르지 않고 기타 연주 전반으로 확장된다. 서프 기타 사운드의 1차적인 특징은 리버브가 많이 걸린 부드러운 톤에 있다. 딕 데일은 이것을 처음 만들었다.
그는 또한 중동과 동유럽 풍의 이국적인 스케일을 처음으로 팝 음악과 기타 연주에 도입했으며, 펜더사와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기타 앰프의 한계를 끊임없이 허물었다. 이것은 그가 많은 사람들에 의해 헤비메탈의 시조로 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청중을 압도하는 엄청나게 큰 볼륨
딕 데일은 1937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레바논계이고 전체적인 가계는 폴란드와 벨라루시까지 다양한 혈통에 걸쳐있다. 이것은 그가 여러 이국적인 음악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특히 그의 아버지가 레바논계인 것은 후에 그가 중동과 아랍의 음악에 관심을 보이고 그쪽의 선율들을 들여와 기타 연주에 응용하게 되는 태생적 바탕이 되었다.
딕 데일은 삼촌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우크렐레, 드럼, 트럼펫 등을 배웠고 결국에는 기타를 잡았다. 1954년에 그는 가족을 따라 남부 캘리포니아로 이주했고 이때부터 지역의 쇼에 출연하면서 뮤지션으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서핑을 즐겼던 그는 195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서핑 실력을 갖추게 되면서 파도를 탈 때의 느낌을 소리로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도를 탈 때의 출렁이는 느낌과 속도감 그리고 시원스러운 기분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리버브를 이용해 소리를 물먹은 것처럼 깊고 부드럽게 만드는 한편 빠른 스타카토 피킹을 기초로 한 속주 기타 주법을 만들었다. 이러한 요소들은 서프 뮤직의 가장 특징적인 단면이 되었으며, 후일 에드워드 반 헤일런을 비롯한 속주 록 기타리스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61년 캘리포니아주 발보아 반도에 있는 랑데부 볼룸에서 6개월 동안 펼쳐진 딕 데일의 공연은 서프 뮤직 열풍의 발화점이 되었다. 그는 매일 자신의 백업 밴드인 델-톤스(Del-Tones)와 함께 3천 명이 입장할 수 있는 대형 공연장 무대에 올랐고 공연장을 꽉 매운 관객들은 밴드의 음악에 맞추어 열광적인 서퍼 댄스를 추는 장관을 연출했다. 당시 이 공연은 '폭풍'(The Stomp)이라고 불리며 연일 매진될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그것은 말 그대로 폭풍이었다. 당시 함께 공연했던 폴 존슨(Paul Johnson)은 "그 때 딕 데일의 기타는 내가 들어본 중에 가장 시끄러웠으며, 그의 테크닉 또한 눈부셨다"라고 회고했다.
이 시기를 증언하는 유명한 일화가 하나 더 있다. 펜더사의 설립자인 레오 펜더(Leo Fender, 1909~1991)는 딕 데일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더 큰 소리를 향한 그의 요구에 적극 부응해주었다. 그 날도 레오 펜더와 그의 오른팔 프레디 타바레스(Freddie Tavares, 1913~1990)는 랑데부 볼룸 딕 데일의 공연장에 갔다. 레오 펜더는 4천 명의 열광적인 관객을 앞에 두고 딕 데일이 무엇을 요구할 것인지를 금방 간파했다. 레오와 프레디는 바로 JBL 스피커 회사에 15인치짜리 증폭 스피커를 주문했다. 이것이 지금도 유명한 스피커 모델인 15인치 JBL D130F 모델이다. JBL D130F 스피커는 딕 데일이 사용하던 앰프와 결합되면서 80와트짜리 싱글 쇼맨 앰프 패키지가 되었다. 딕 데일은 이 싱글 쇼맨 앰프에 펜더 스트라토캐스터를 연결해 이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어마어마하게 큰 소리를 뿜어냈다. 그것은 소리의 한계를 깨뜨리는 것이었다. 대중음악 저널 「기타 플레이어」는 딕 데일을 '헤비메탈의 아버지'로 명명했다.
수많은 속주 기타리스트들의 탄생을 예고하다
딕 데일이 1961년에 발표한 〈Let's Go Trippin'〉은 역사상 최초의 서프 송으로 여겨지며 그 뒤로 〈Jungle Fever〉 〈Surf Beat〉 등이 잇따르면서 서프 뮤직의 정형이 사실상 완성되었다. 그의 첫 번째 정규 앨범인 「Surfers' Choice」는 1962년에 나왔다. 이 앨범이 지역에서 인기를 얻자 딕 데일은 캐피털 레코드와 정식으로 계약을 맺었고, 「Surfers' Choice」는 전국적으로 배급될 수 있었다. 얼마 후 딕 데일은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할 정도로 전국적인 인기스타가 되었다.
1962년에 발표한 〈Misirlou〉는 당시 서프 뮤직 씬의 가장 인상적이고 열광적인 한 장면을 장식했다. 그것은 서프 열풍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Misirlou〉는 '(아랍인) 이집트 소녀'라는 뜻으로 원래 그리스에 떠밀려온 터키 난민들이 부르던 작자 미상의 레베티카각주1) 가운데 하나였다. 딕 데일은 이 아련한 레베티카를 서프 뮤직 스타일로 편곡해 강력한 기타 사운드와 아련한 트럼펫 소리가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매력적인 곡으로 만들었다. 이 곡은 이듬해 비치 보이스가 리메이크해서 다시 한 번 주목받기도 했다.
딕 데일의 자신감은 충만했다. 1963년 발표된 그의 두 번째 앨범의 제목은 자신의 별명을 그대로 따온 「King of the Surf Guitar」였다. 1960년대 초반 딕 데일이 일으킨 서프 뮤직 바람은 비치 보이스와 잰 & 딘(Jan & Dean)이라는 쌍두마차를 앞세워 팝계를 강타했다. 그러나 서프 뮤직의 전성기는 짧았다. 1960년대 초반의 3년 정도가 바다의 노래에 허락된 시간이었다. 1964년이 되자 비틀스를 앞세운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거대한 물결이 밀려왔다. 서프 뮤직은 썰물처럼 차트에서 사라져 갔고, 딕 데일은 직장암이 발병해 한 동안 음악계에서 모습을 감춰야 했다.
시간이 흐르고 그는 건강을 회복해서 복귀했지만 그의 삶에는 또 다른 굴곡이 기다리고 있었다. 1979년에 딕 데일은 뉴포트 해변에서 서핑을 즐기다 입은 상처가 환경오염과 연관된 감염으로 인해 악화되면서 거의 다리를 잃을 뻔 했다. 그는 큰 충격을 받고 이를 계기로 환경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1986년 딕 데일은 새 앨범을 녹음했다. 1987년에는 영화 [Back to the Beach]에 출연해 서프 뮤직을 연주하고, 스티비 레이 본과 함께 샨테이(Chantay)의 히트곡 〈Pipeline〉을 연주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연주 장면은 감동적인 명연으로 꼽히는데, 그해 그래미 베스트 록 연주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1994년에는 〈Misirlou〉가 쿠엔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 감독의 영화 [펄프 픽션]에 삽입되어 영화의 성공과 함께 다시 한 번 되살아났다. 이 곡은 2005년에 인기 그룹 블랙 아이드 피스(Black Eyed Peas)의 〈Pump It〉에 샘플링되기도 했다. 딕 데일의 노래 가운데 〈Scalped〉는 지금도 북미 아이스하키 리그 콜로라도 아발란체의 테마송으로 쓰인다.
스타카토 피킹을 위주로 한 딕 데일의 속주는 서프 기타의 전형이었을 뿐 아니라 이후 록 음악계에 명멸한 수많은 속주 기타리스트들의 등장을 예고한 예고편이었다. 그에게 빚을 지고 있는 후배들은 많지만 지미 헨드릭스도 빼놓을 수 없다. 왼손잡이였던 그가 오른손잡이용 기타를 거꾸로 들고 친 것부터 시작해서 무대 위에서 보여준 각종 쇼맨쉽까지 딕 데일은 지미 헨드릭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펜더사와 오랜 시간 각별한 인연을 이어온 딕 데일은 펜더 스트라토캐스터를 주로 썼다. 그는 스트라토캐스터를 듀얼 쇼맨 앰프에 연결해 리버브 효과를 만들어 냈으며 특유의 격렬한 트레몰로 사운드를 내기 위해 규격보다 굵은 기타줄을 사용했다. 펜더사는 커스텀 숍 '54 픽업을 장착한 딕 데일 커스텀 숍 스트라토캐스터라는 딕 데일 시그너처 기타를 만들었다.
딕 데일은 지금도 파이팅 넘치는 스테이지 매너로 여전히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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