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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목왕후
인목왕후 김씨조선 시대에 왕비는 국왕의 정실부인으로서 중궁(中宮)의 지위에 있던 여인이다. 임금과 함께 ‘전하(殿下)’로 불리며 국모(國母)로서 자리매김하던 존재로 처신 여하에 따라 정국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기도 했다. 얼핏 떠오르는 드라마틱한 인물로 원경왕후 민씨, 문정왕후 윤씨, 장희빈을 들 수 있지만 14대 임금이었던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 김씨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인목왕후는 광해군에 의해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영창대군 이의의 생모이다. 그녀는 계축옥사와 인조반정 등 당대의 정치적인 사건에 휘말리며 실로 다사다난한 세월을 보냈다. 그녀의 생애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궁녀가 쓴 〈계축일기〉를 통해 널리 알려졌고, 오늘날까지도 광해군 시대를 담은 수많은 소설이나 드라마에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과 대북파 정권은 왕권을 강화하고 민생 회복을 위해 분주했다. 하지만 대내외적으로 광해군의 정통성이 의심받으면서 불안한 정국이 이어지자 위정자들로서는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이나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의 존재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위험한 시기에 인목왕후가 취했던 행위와 결과는 왕조 시기 지배계층의 일상적인 분쟁과 탐욕의 데자뷰처럼 비쳐지기도 한다.
불안한 시기에 왕비가 되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후궁 인빈 김씨만 데리고 의주로 몽진했고, 정비인 의인왕후 박씨는 평안도 강계와 해주 등지로 피신해야 했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또 다시 그녀를 외면하고 인빈 김씨만 데려갔다. 때문에 의인왕후는 세자인 광해군과 함께 함경도, 강원도 일대를 전전해야 했다. 당시의 고초로 인해 심신이 피폐해진 그녀는 1600년(선조 33년) 6월 세상을 떠났다.
선조는 후궁 공빈 소생의 두 아들 임해군 이진과 광해군 이혼을 비롯하여 14명의 왕자가 있었지만 정비 소생의 적통 왕자가 없어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602년(선조 35년) 선조는 신료들의 주청을 받아들여 계비를 맞아들였다. 그로 인해 내심 중전 자리를 노렸던 인빈 김씨는 입맛을 다셔야 했다.
조선 전기에는 왕후가 승하하면 3년 뒤에 후궁을 왕비로 승진시키는 형식을 택했지만, 선조는 중종이 문정왕후를 외부에서 간택한 전례에 따라 전국에 금혼령을 내리고 14세 이상의 딸을 가진 양반가에 처녀단자를 올리게 했다. 그렇게 해서 간택된 김제남의 딸인 바로 인목왕후였다. 선조의 나이는 51세, 인목왕후는 19세였다.
인목왕후 김씨는 1584년(선조 17년) 연흥부원군 김제남과 광산부부인 광주 노씨의 차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아버지 김제남은 서인이었지만 당파와는 거리가 먼 인물로 가문도 중종 때 권신 김안로가 몰락하면서 힘을 잃은 지 오래였다. 게다가 첫째 사위 심정세가 능양군의 이종사촌이고, 심정세의 아버지 심엄이 광해군의 처남 유희발과 인척이라 기존 왕족들과 거리감도 없었다.
인목왕후가 왕비에 책봉되자 제일 당황한 인물은 세자 광해군이었다. 자신보다 9세나 어린 새어머니가 껄끄러웠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아들을 낳으면 후궁 소생인 자신의 입지가 흔들릴 것이 분명했다.
인목왕후가 1603년(선조 36년)에 정명공주를 낳자 광해군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3년 뒤인 1606년(선조 39년)에는 그녀가 영창대군을 낳았다. 55세의 늦은 나이에 적장자를 얻은 선조는 몹시 기뻐했지만 광해군으로서는 아주 골치 아픈 상황이 되었다. 장차 왕위계승을 둘러싼 분쟁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과연 그때부터 조정 신료들은 영창대군을 후사로 삼자고 주장하는 소북파와 세자인 광해군을 추종하는 대북파로 갈라져 치열하게 싸웠다. 하지만 그 무렵 갑작스레 악화된 선조의 건강이 대세를 갈라놓았다.
1607년 10월부터 병석에 누운 선조는 만일에 대비하여 광해군에게 전위하겠다는 비망기를 내렸다. 어린 영창대군으로서는 전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의 재기를 도모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에 당황한 영의정 유영경과 소북 대신들은 그 내용을 비밀에 부쳤다. 하지만 대세는 이미 광해군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이듬해인 1608년 1월, 죽음을 예감한 선조는 중신들을 모아놓고 광해군에게 선위교서를 내렸다. 그런데 또 다시 유영경이 이를 감추었다가 대북파의 영수 정인홍에게 발각되었다. 그리하여 유영경의 죄상을 발고하는 과정에서 선조가 숨을 거두었다. 다급해진 유영경은 영창대군으로 후사를 삼고 수렴청정 하라고 인목대비를 부추겼다. 그러나 선조의 유명을 중시한 인목대비는 언문교지를 내려 광해군으로 보위를 잇게 했다. 광해군은 16년 동안의 위태로웠던 세자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치부가 장차의 덫이 되다
인목왕후는 본가의 세력으로 보나 개인의 성품으로 보나 특출한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위험한 시기에 지나치게 재산을 불림으로써 광해군과 정권을 이끌고 있던 대북파 신료들의 눈총을 받았다.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위정자들이 권력을 유지하려면 수많은 정치자금이 소요되고, 그 과정에서 불법적인 정경유착이 수반된다. 마찬가지로 정권을 탈취하는 데도 그만한 재력이 필요하게 마련이다. 바로 그 민감한 지점을 간과함으로써 인목왕후나 아버지 김제남은 재앙을 자초한 면이 있었다.
조선시대 왕비는 입궁하면 대략 1천 결 정도의 왕실토지에 대한 수세권을 얻는다. 이는 매년 1천 가마 이상의 수입을 의미한다. 그녀의 재산은 친정인 명례동에 마련한 서제소(書題所)의 차지(次知) 오윤남이 관리했다.
1603년(선조 36년) 정명공주가 태어나면서 배정된 850결, 영창대군이 태어나면서 배정된 노비 450명, 전답 300여 결까지 명례본궁에서 관리했으며, 선조에 의해 영창대군이 제안대군의 후계자로 정해지면서 그가 축적했던 수천 결의 땅과 수백여 명의 노비 등을 송두리째 떠안았다.
암묵적인 왕권 도전자가 그만한 재산을 품고 있다는 것은 언제나 무력을 동원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어 있음을 뜻한다. 광해군으로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그 때문에 김제남에게 위험을 경고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김제남은 광해군의 불안감을 감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재산을 불림으로써 화를 자초했다.
계축옥사의 시련
광해군은 즉위하자마자 무너진 국가기반을 재건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면서 왕권 회복에 박차를 가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자신의 선무공신 책봉에 반대했고, 세손의 원손책봉과 혼인을 지연시켰으며, 선조의 전위를 방해한 유영경을 처단하고 소북파 인사들을 대거 축출했다.
영창대군의 후원자였던 유영경의 죽음으로 인해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의 입지는 크게 줄어들었다. 그 와중에 광해군이 왕위 책봉에 불만을 품은 임해군을 강화도로 귀양 보내고, 마침내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강화 현감 이직이 수문장 이정표에게 명하여 임해군을 죽이자 그들의 불안감은 급격히 고조되었다.
1612년(광해군 4년)에는 김직재의 옥사가 일어났다. 당시 조정에서 쫓겨난 서인과 소북파는 영창대군이나 능창군을 옹립하기 위하여 은밀하게 명나라에 사람을 보내 세자책봉과정을 재심해달라고 요청했다. 대북파는 그 정보를 정적 말살의 계기로 삼고 역모를 조작하여 김직재, 김백함 부자를 비롯하여 100여 명의 소북파 인사들을 숙청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613년(광해군 5년) 드디어 인목대비에게 가혹한 시련이 다가왔다. 이른바 칠서의 옥으로부터 비화된 계축옥사의 시작이었다. 당시 문경새재에서 일단의 도적들이 상인을 죽이고 은자 수백 냥을 탈취한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 일당은 영의정을 지낸 박순의 서자 박응서, 심전의 서자 심우영, 전 목사 서익의 서자 서양갑, 평난공신 박충갑의 서자 박치의, 박유량의 서자 박치인, 전 북병사 이제신의 서자 이경준, 서얼 허홍인 등 권세 가문의 서자 일곱 명이었다. 그들은 허균, 이사호, 김장생의 이복동생 김경손 등과 교유하며 죽림칠현, 강변칠우로 자처했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광해군이 등극하자 서얼 차별을 없애달라는 상소를 올렸지만 거부당했다. 이에 반감은 품고 경기도 여주 남한강변에 ‘윤리가 필요 없는 집’이라는 뜻의 무륜당(無倫堂)을 지은 뒤, 그곳을 근거지로 전국을 오가며 화적질을 일삼다가 문경새재에서 강도짓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런데 피살된 상인의 노비 하나가 살아남아 그들의 뒤를 밟아 근거지를 알아낸 뒤 포도청에 고발함으로써 일망타진되었다.
사건에 접한 대북파의 거두 이이첨은 김개, 김창후, 한희길, 정항 등과 모의해 서얼 출신 화적패들이 자금을 모아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자백을 받아낸다. 그것은 칠서 중에 한 사람인 박응서가 광해군에게 비밀상소를 올리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박응서는 상소문에서 자신들이 1608년 명나라 사신을 죽여 사회혼란을 야기하려 했고, 한편 군자금을 비축하여 무사를 모은 뒤 일을 벌이려 했다. 거사에 성공하면 영창대군을 옹립한 다음 인목대비에게 수렴청정하게 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대북파는 박응서의 자백을 근거로 서양갑을 국문해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역모의 수괴이고 인목대비까지 모의에 가담했다는 자백까지 받아냈다. 그 결과 종성판관 정협, 선조에게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의 안위를 부탁받은 신흠, 박동량 등 일곱 대신, 이정구, 김상용, 황신 등 서인 수십 명이 하옥되었다. 그런데 박동량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대비전에서 1613년, 광해군을 양자로 삼았던 의인왕후의 무덤인 유릉에 무당을 보내 저주한 일을 털어놓음으로써 인목대비를 더욱 궁지에 몰아넣었다.
“대비의 처소에 있는 사람들이 선왕의 발병 이유가 돌아가신 의인왕후 박씨에게 있다 하여 수십 명의 요망한 무당과 함께 연달아 유릉에 가서 저주하는 일을 크게 벌였습니다.”
그러자 이이첨은 유생 이위경에게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의 처단을 종용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이어서 장령 정조와 윤인 등이 폐모론을 지지하고 나섰다.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삼사에서도 연일 영창대군을 벌하라고 광해군을 압박했다.
결국 김제남은 1614년 6월 1일 서소문 밖에서 사사되었고, 영창대군은 서인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 그와 함께 영창대군을 비호했던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이항복 등이 조정에서 쫓겨났다. 그러자 이덕형은 시국을 개탄하며 식음을 전폐한 끝에 10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광해군일기》의 사관은 이 사건이 정치적 조작으로, 서얼인 박응서가 도적질을 하다 잡혀 죽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역모를 꾸몄다고 과시했으며, 서양갑 역시 죽어도 이름이나 남겨보려는 뜻이었다고 평가절하했다.
이듬해 봄 영창대군은 강화도의 작은 골방에서 죽음을 당했다. 강화 부사 정항이 그를 밀실에 가두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질식사시켰던 것이다. 당시 대군의 나이는 불과 9세였다. 이 계축옥사를 통해 대북파는 서인과 남인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정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경운궁 유폐, 가혹한 세월
인목왕후는 당시 왕실 최고의 어른이었고, 법통으로도 군주인 광해군의 어머니였지만 그때부터는 실질적으로는 원수와 다름없는 관계가 되었다. 광해군은 이를 감안하여 1615년(광해군 7년) 4월 자신의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기게 한 다음 인목대비를 경운궁에 유폐시켰다.
경운궁은 태조의 계비 강씨의 무덤인 정릉(貞陵)이 있던 곳으로 당시에는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사가였는데, 선조가 임진왜란이 끝난 뒤 불탄 궁궐에 거처할 곳이 없었으므로 행궁으로 삼은 장소였다. 정릉동 행궁(貞陵洞行宮)이라고 불린 이곳에서 선조가 승하했고 광해군이 즉위했지만, 그해 창덕궁이 재건되면서 광해군이 행궁을 떠나게 되자 경운궁(慶運宮)이라는 궁호를 붙여주었다.
그런데 이듬해 1월 경운궁에 임금을 비방하는 익명서가 발견되어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기자헌이 박승종을 몰아내고 유희분을 협박해 인목대비를 맞이한 다음 거사를 할 것이란 내용이었다. 이에 허균은 김개․이강 등 호남과 영남의 무뢰한들을 모아 유생처럼 꾸미게 하고 인목대비를 폐함과 동시에 기자헌 일당을 처벌하라고 상소했다.
이처럼 폐모론이 기승을 부리자 기자헌은 종친과 외척, 문무백관 등 무려 1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을 모아 공개토론회인 수의를 열고 가부를 결정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참석자 대부분이 이이첨의 주장에 동조함으로써 폐모 반대론자인 기자헌, 이항복, 정홍익, 김덕함 등이 유배형에 처해졌다.
결국 1618년(광해군 10년) 인목대비는 폐서인되어 경운궁에 유폐되었고 좌의정 한효순, 공조판서 이상의, 예조판서 이이첨 등 17인이 〈폐비절목〉을 만들어 대비의 특권과 예우를 박탈했다. 하지만 명나라에서 폐서인의 고명이 내려오지 않아 인조반정 때까지 인목대비는 대비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1622년 12월, 이이첨은 강원감사 백대형을 시켜 이위경 등과 함께 굿을 빙자해 경운궁에 들어가 인목대비를 시해하려 했으나 박승종 등이 가로막고 나서는 바람에 실패했다.
그때부터 인목대비는 경운궁에서 맏딸 정명공주와 함께 비참한 생활을 해야 했다. 《계축일기》에 따르면 궁에는 지저분하고 더러운 물건을 버릴 만한 빈터가 없어 그것이 쌓여 악취가 가득했으며, 구더기가 방안과 밥 지어 먹는 솥 위에까지 끼어 물로 씻어내도 없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생필품도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바가지가 없어 소쿠리로 쌀을 일어야 했다. 솜옷이 없어 7,8년 동안 추위에 시달리다가 목화씨를 심어 간신히 솜옷을 마련할 수 있었다. 궁녀들이 궐내에 텃밭을 일궈 나물을 재배하여 반찬으로 삼을 정도였다.
당시 인목대비는 붓글씨를 쓰면서 모진 세월을 견뎌냈다. 현재 보물 1220호로 지정되어 있는 어필칠언시를 보면 고아하면서도 굳센 그녀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시에서 그녀는 대북파의 위세에 시달리던 자신을 늙은 소에 비유하고, 광해군을 그 늙은 소에 채찍을 가하는 주인에 비유하고 있다.
늙은 소 힘쓴 지 이미 여러 해
목 부러지고 가죽 헐었어도 잠 잘 수만 있다면,
쟁기질, 써레질 이미 마쳤고 봄비도 충분한데
주인은 어찌하여 괴롭게 또 채찍질 하는가.
인조반정, 인고의 세월을 접다
1623년 3월 13일, 이귀, 심기원, 김자점, 김류, 최명길 등 일단의 서인들이 능양군을 앞세워 반정을 일으켰다. 거사의 명분은 폐모살제(廢母殺弟,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임)였다. 군사를 이끌고 홍제원에 집결한 그들은 창의문을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도성 안에 들어왔다. 그들은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응으로 활짝 열린 돈화문을 통과하여 손쉽게 창덕궁을 점령함으로써 반정에 성공했다.
이튿날 아침 능양군은 경운궁으로 가서 11년 동안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에게 반정을 공식적으로 승인받고자 했다. 한데 인목대비는 갑자기 병사들이 몰려오자 무슨 사달이 난지 몰라 문을 걸어 잠그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랫동안 핍박받아온 그녀로서는 어쩌면 비장한 최후를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이귀가 군사를 시켜 담장을 넘게 한 다음 경운궁 안으로 들어가 바깥뜰에서 울었다. 인목대비가 내시를 시켜 까닭을 묻게 하자 이귀는 자신들이 반정을 일으킨 사유를 고하면서 창덕궁으로 행차하기를 청했다. 하지만 그녀가 행차를 꺼리자 능양군이 친히 경운궁으로 나아갔다. 신료들이 가마를 탈 것을 청했으나 따르지 않고 말을 타고 가면서 광해군을 떠메어 따르게 했다. 능양군은 경운궁에 이르자 말에서 내린 뒤 서청문을 통해 궁 안에 들어가 재배하고 통곡했다.
“혼란 중에 일이 많고 겨를이 없어 지금에야 왔사오니 황공할 따름입니다.”
인목대비는 그제야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고 절차에 따라 능양군에게 어보를 전달한 뒤, 광해군에게 당한 원한을 갚아주기를 간절히 청했다.
“광해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이다. 참아온 지 이미 오랜 터라 내가 친히 목을 잘라 망령에게 제사 지내고 싶다. 10여 년 동안 유폐되어 살면서 지금까지 죽지 않은 것은 오직 오늘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인목대비는 인조에게 광해군에 대한 복수가 자신에게 효를 행하는 것이라고까지 주장했다. 반정의 주역들은 광해군 측의 반격을 염려하여 현장에서 곧바로 즉위식을 치르고자 했다. 그러자 인목대비는 경운궁 별당인 즉조당에서 예식을 치르게 했다. 이튿날 인목대비는 즉위 교서를 내려 반정의 정당성을 공표했는데 앞부분에서 광해군에 대한 분노를 솔직하게 드러냈다.
“내 비록 부덕하나 천자의 고명을 받아 선왕의 배우자가 된 사람으로 일국의 국모가 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니, 선묘(宣廟: 선조)의 아들이 된 자는 나를 어미로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광해는 참소하는 간신의 말을 믿고 스스로 시기하여 나의 부모를 형살하고, 나의 종족을 어육으로 만들고, 품안의 어린 자식을 빼앗아 죽이고, 나를 유폐하여 곤욕을 주는 등 인륜의 도리라곤 다시없었다. 이는 대개 선왕에게 품은 감정을 펴는 것이라 미망인에게야 그 무엇인들 하지 못하랴.”
인목대비는 당시 광해군의 죄를 38가지나 열거했다. 우선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인 자신을 서궁에 유폐한 죄를 신랄하게 비판했고, 광해군 대에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지 못하고 중립 외교를 한 것과 무리한 토목 공사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린 것 등을 하나하나 따져 물었다.
인조반정은 광해군과 인목대비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었다. 광해군은 왕위를 박탈당한 채 강화도 교동도로 유배되었고, 인목대비는 다시 왕실 최고 어른으로 복귀했다. 인조는 인목대비를 핍박한 것을 패륜의 상징으로 부각시키며 광해군 정권의 부도덕성을 강조했다. 인조는 그 보답으로 그녀의 존호를 높여주고 진찬례를 자주 베풀어 광해군 정권과의 차별성을 부각시켰다. 아울러 그녀와 고난을 함께 했던 정명공주의 혼사를 서둘렀고, 갖은 선물공세를 펼쳤다.
인목대비는 이후 전국의 명산대찰을 돌아다니며 부처님께 아들과 아버지의 명복을 빌었다. 안성의 칠장사를 김제남과 영창대군의 원찰로 삼았으며, 금강산의 여러 사찰에 아들과 아버지의 위패를 모셔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
조선시대 유학자 신익성이 금강산 유점사를 들러 기록한 〈유금강내외산제기(遊金剛內外山諸記)〉에는 ‘해장전에는 여러 불승 및 인목대비의 글씨, 정명공주가 손으로 옮겨 적은 불경이 매우 많았다.’라는 내용이 남아있다. 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과 서울대 규장각 등 왕실관련 도서관에도 인목대비가 직접 쓴 사경과 경전들이 여러 점 남아있다.
정명공주가 혼인하여 출궁한 뒤 인목대비는 계속 창덕궁에 머물렀다. 1624년(인조 2년)에 일어난 이괄의 난으로 창덕궁이 불타자 광해군이 지은 인경궁으로 옮겨 살았다. 1631년부터 잦은 설사와 복통, 고열로 잠 못 이루던 인목대비는 1632년(인조 10년) 6월 28일,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고명딸 정명공주는 본색을 드러낸 인조의 위협 속에서 살아야 했지만 인목대비가 부재한 현실에서 유일한 반정의 대의명분이라는 공신들의 비호 때문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인고의 시간은 1649년(인조 27년) 인조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멈추었고, 47년 동안의 고난을 보상이라도 하듯 행복과 영광의 나날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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