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요약 조선 광해군 때 고관의 서자(庶子) 7명이 새재[鳥嶺]에서 은 상인을 약탈하다가 체포됨으로써 야기된 사건.
칠서지옥(七庶之獄)이라고도 한다. 칠서는 영의정 박순의 서자 박응서, 목사 서익(徐益)의 서자 서양갑(徐洋甲), 심전(沈銓)의 서자 심우영(沈友英), 병사 이제신(李濟臣)의 서자 이경준(李耕俊), 상산군(商山君) 박충간의 서자인 박치인(朴致仁)·박치의(朴致毅), 그리고 허홍인(許弘仁)이다. 이들은 정계에 진출할 수 없는 신세를 한탄하며 소양강 위에 무륜당(無倫堂)을 짓고 그곳에서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함께 지냈는데, 중국의 죽림칠현(竹林七賢)에 비하여 강변칠우(江邊七友)라고 불렸다.
이들은 광해군 즉위초에 서자도 관계로 진출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연명상소했다가 허락받지 못했다. 이후 정부에 대한 불만이 더욱 높아짐에 따라, 나무꾼·소금장수·노비추쇄인 등을 모아 화적질을 하며 곡식을 모았다. 1612년(광해군 4)에는 새재에서 은 상인을 죽이고 은 수백 냥을 강탈했다가 이듬해 모두 포도청에 잡혔다. 당시 조정에서는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던 소북파와 영창대군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때 칠서가 잡히자 대북파인 이이첨(李爾瞻)은 칠서가 영창대군을 옹립하는 국구 김제남(金悌男)의 사주를 받고 거사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도적질을 저지른 것처럼 음모를 꾸몄다. 따라서 칠서의 국문을 맡고 있던 포도대장 한희길(韓希吉)·정항(鄭沆)은 이이첨의 명을 받고, 박응서에게 시키는 대로 자백하면 사형을 면해주겠다고 설득했다. 박응서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거짓 자백함으로써, 결국 소북파가 숙청당하는 계축옥사를 야기해 김제남과 그의 아들들이 사사되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당했다가 죽음을 당했다. 이와 더불어 영의정 이덕형(李德馨)과 좌의정 이항복(李恒福)을 위시한 서인과 남인이 정계에서 축출당하고, 이후 정권은 대북파가 독점했다.→ 계축화옥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조선과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