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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김주남

다른 표기 언어 金周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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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95년 10월 20일, 경기도 수원(水原)
사망 1919년 4월 15일
관련 사건 경기도 수원(水原)
주요활동 1919년 3월 31일 경기도 수원군 팔탄면 발안장터 만세시위 참가, 제암리학살사건에서 피살
포상훈격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1895년 10월 20일 경기도 수원군(水原郡) 팔탄면(八灘面) 고주리(古州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24세였으며, 천도교인이었다. 할아버지는 통정대부(通政大夫) 김충식(金忠植)이고, 아버지는 김충식의 3남인 김세열(金世烈)이다.

김충식의 장남인 김흥렬(金興烈)은 화성(華城) 지역 천도교 최고 지도자였고, 2남 김성열(金聖烈)은 제암리(提岩里) 주변 마을의 청년을 규합하여 구국동지회(救國同志會)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1919년 3월 31일 향남면(鄕南面) 발안시장(發安市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일본의 보복에 의해 일가족 5명과 함께 희생되었다.

향남면 제암리에서는 1919년 3월 10일경 안종린(安鍾麟), 안정옥(安政玉) 등이 독립선언문과 그 외의 격문을 입수하여, 3월 25일 뒷산에 올라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4월 5일 발안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발안장터 만세시위는 수촌리(水村里), 고주리(古州里), 제암리 주민들이 합세하여 전개하였다. 이날 고주리 만세시위를 주도한 백부 김흥렬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31일 오전 김흥렬을 필두로 고주리 마을주민 등과 함께 출발하여 12시 무렵 발안장터에 도착하였다. 이 때 발안장터의 분위기기 심상치 않자, 조선인 순사보 조희창(趙熙昌)은 수원지역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는 발안에 상주해 있던 아리다 다케오(有田俊夫) 중위가 이끄는 수비대가 수촌리로 이동하였기 때문이다.

발안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한 이정근이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시위대가 일제히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행진을 시작하였다. 발안장터에 모인 사람들이 시위대에 합류하면서 규모는 순식간에 8백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시위대는 주재소 방향으로 행진하여 주재소를 포위하고 투석전을 전개하였다.

당시 주재소에 배치된 순사들은 위협 사격을 가할 뿐이었다. 이정근이 “주재소를 때려 부셔라”라고 외치자, 시위대는 주재소로 접근하였다. 그러자 안성에서 응원 파견된 수비대가 칼로 시위대를 위협하였다. 이정근이 수비대장 앞으로 다가서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 수비대장은 칼로 이정근의 복부를 내려쳤다.

이를 목격한 시위대는 ‘조선독립만세’를 열창하며, 주재소에 돌을 던졌다. 수비대는 칼과 총의 개머리판 등으로 시위대를 진압하기 시작하였다. 시위대는 수비대의 폭력적인 진압으로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4월 9일 이후 수비대는 시위 참가자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하였다. 이 과정에 부친 김세열, 형제 김주업 등과 함께 붙잡혔다. 수비대에 의해 발안주재소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수원경찰서로 옮겨졌다. 수원경찰서에서도 계속 가혹한 고문을 당하다가, 가족들에게 인계되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일제는 보복에 나서 4월 15일 제암리에서 학살을 자행하고 옆 마을인 고주리로 이동하였다. 학살 소식을 알고 있던 고주리 주민들은 대부분 산 속으로 피신하였다. 죄 없는 사람들을 마음대로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김흥렬과 가족들은 함께 집안에 머물렀다. 하지만 고문의 여독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던 그를 포함하여 일가족 6명이 수비대에 의해 집 뒤 언덕으로 끌려갔다.

수비대는 김흥렬이 수촌리 백낙열의 은신처를 묻는 물음에 답변하지 않자, 그를 포함한 일가족 6명을 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웠다. 3일이 지난 후 친척과 마을 주민들에 의해 시신이 수습되었고, 월문리 공동묘지에 분묘가 조성되었다.

이러한 일제의 만행은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 4월 17일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F.W.Schofield)는 현장에서 사진을 촬영하고, 「수원에서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본국에 발송하였다. 그리고 일부 일본인조차 일제의 만행에 분노하였다. 재팬 애드버타이저(The Japan Advertiser)와 재팬 크로니클(The Japan Chronicle) 등은 학살사진과 목격자의 증언을 보도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집필자 : 전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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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2권, 1971
  • ・ 김선진,「제암리 고주리의 학살사건 진상」, 『황해문화』 2, 1994
  • ・ 임형진,「동학에서 천도교로의 개편과 3・1독립혁명 –수원지역을 중심으로」, 『동학학보』 4・5, 2017

출처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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