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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학살사건

다른 표기 언어 提巖里虐殺事件 동의어 제암리 사건, 제암리 학살 사건, 제암리 교회 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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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제암리3·1운동순국유적(사적 제299호, 1982년)
발생 1919년 4월 15일

요약 1919년 4월15일 경기도 화성시 소재 제암리교회에서 일본 군인들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 사건. 1919년 3월 31일 발안 장터에서 있었던 만세운동 후 계속되는 시위에 대한 경고와 보복으로, 일본 육군에 의해 민간인 29명이 학살당한 사건이다. 의료선교사 스코필드와 언더우드에 의해 외부에 알려졌다. 1982년 교회가 있던 터가 사적 제299호로 지정되었다.

제암리학살사건(提巖里虐殺事件)

화성 제암리교회 학살사건 알린 스코필드 박사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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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 배경

1919년 4월 15일 제암리교회에 모인 민간인을 일본 군인들이 학살한 사건. 1905년 8월 5일 건립된 제암리교회(현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소재)는 H. G. 아펜젤러의 전도를 받은 안종후가 개인집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 시초였다. 그후 교인들의 증가로 1911년 교회 건물이 마련되었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던 당시 제암리교회 청년들과 천도교 김상렬 등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은 장날이었던 3월 31일 만세시위를 결의하고 장터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장터에 모인 천여 명의 주민이 만세 운동에 참여하자 이에 당황한 일본 경찰은 위협 사격 끝에 무력으로 시위대를 진압하고 주모자를 체포했다.

격분한 시위 군중은 일본인 가옥과 학교를 파손하고, 이튿날부터 밤마다 산에서 봉화를 올리고 만세시위를 했다. 4월 3일에는 수촌리 주민들이 주동이 되어 우정면과 장안면 면사무소를 부수고 주재소를 불태웠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 경찰은 4월 5일 새벽 수촌리를 급습, 민가에 불을 질러 주민들을 학살했다. 후에 이 사건은 '수촌리 학살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경과

만세시위가 있은지 10일 후인 4월 15일 일본 보병 79연대 소속 육군 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를 중심으로 한 일본헌병들이 제암리와 고주리의 기독교와 천도교 신자15세 이상의 남자들을 제암리교회에 모이라고 했다. 그들은 4·5만세 시위 당시 일본군이 주민들에게 행한 만행에 대해 사과할 것처럼 유인하여 주민들을 교회 안에 모이도록 한 후 총격과 함께 교회당 문을 걸어잠그고 짚더미를 던지고 석유을 끼얹은 후에 불을 질렀다. 밖으로 빠져나오려는 사람들에게는 무차별 사격을 가했으며 남편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여인 2명의 목을 베었고 제암리 마을 32가구에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현황

이 사건으로 숨진 사람은 안종후를 비롯하여 남자 21명, 여자 2명이며 인근 마을 팔탄면 고주리에서 김성렬 등 남자 6명이 학살당했다. 사건 후에도 일본헌병의 심한 감시로 희생자의 장례조차 치르지 못했으며, 4월 17일 의료선교사 스코필드가 유골들을 향남면 도이리 공동묘지 입구에 안장했다. 언더우드는 참사현장을 돌아보고 보고서를 작성해 미국으로 보냈으며, 스코필드는 일본헌병 몰래 현장사진을 찍어 미국으로 보내 일제의 야만행위를 국제사회에 여론화시켜 비판하기도 했다.

문화재 지정

1982년 9월 29일 문화공보부와 경기도 주관으로 합동장례식을 치르고 희생자들을 순국열사로 추서했으며, 교회가 있던 지역인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322-4 지역을 사적 제299호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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