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다음백과

수원 3·1운동

다른 표기 언어 水原三一運動

요약 1919년 3·1운동 당시 수원군 일대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운동. 3월 말부터 4월 초까지 집중적으로 전개되었다. 가장 주도적으로 운동을 이끌었던 면은 송산면, 향남면, 우정면 등이었고, 농민들에 의해 면사무소나 우편소와 같은 관공서가 습격되었다. 각 면의 면민들은 일본 경찰에 의해 피해자가 발생하면 분노하여 일본 경찰을 죽이기도 했는데, 특히 향남면에서는 일본인 경찰부장이 시위대가 던진 돌에 맞아 죽으면서 일제가 파견한 군대에 의해 제암리 교회에 집합하여 밖에서 화재를 저지르는 바람에 2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는 제암리 학살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1919년 3월말부터 4월 초순에 걸쳐 집중적으로 전개되었으며, 면사무소·경찰관주재소·우편소·금융조합사무소를 습격하는 등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송산면·향남면·우정면·장안면 등에서의 운동이 대표적인데, 처음부터 농민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송산면에서는 3월 26일 홍면·왕광연 등의 주동으로 농민들이 사강리 시장에서 만세를 부르고, 면사무소와 주재소 부근을 돌며 3일 동안 시위를 계속했다. 28일에는 1,000여 명의 농민들이 송산면 뒷산에서 대규모 만세시위를 전개했는데, 출동한 일본 경찰이 홍면 등 지도자에게 발포하여 중상을 입히자, 격분한 시위군중들은 일본 경찰 1명을 죽였다. 이에 일제는 대대적인 보복행위를 감행하여, 4월 12일 농민들을 닥치는 대로 체포·구금하고 민가를 마구 불태웠다.

수원군 일대의 3·1운동 가운데 가장 대표적이었던 장면면과 우정면 연대시위에서는 4월 3일 시위농민들이 조암장터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규모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시위군중들은 장안면 사무소에 몰려가 면장에게 만세를 부르게 한 후, 다시 우정면 사무소로 행진하여 서류를 불태웠으며, 화수리 주재소로 행진하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에 일본 경찰이 발포하여 1명이 죽고 2명이 중상을 입자, 격분한 군중들은 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 경찰 1명을 죽이고 주재소를 불태워버렸다. 다음날 수원 헌병대에서 출동하여 마을에 불을 지르고 많은 농민들을 체포했다.

성호면에서는 3월 29일 오산 장날을 이용하여 300여 명이 태극기를 휘두르며 시위운동을 전개했는데, 일본 경찰이 주동자인 유진홍·안동순(安東淳)을 연행해가자, 시위군중들은 주재소, 면사무소, 우편소, 일본인 상점 등을 습격·파괴했다.

향남면에서는 4월 5일 발안 장날을 기하여 안상용·안진순(安珍淳) 등의 주동으로 1,000여 명의 농민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출동한 일제 경찰은 시위군중에게 발포하여, 시위농민 3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에 격분한 시위군중들은 투석전으로 맞서, 일본인 경찰부장이 시위군중이 던진 돌에 맞아 죽었다. 일제는 부대를 파견하여 향남면 제암리 그리스도교도 농민들을 제암리 교회에 모이도록 한 후, 밖에서 문을 잠근 다음 석유를 뿌려 교회에 불을 지르고 불을 피해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총으로 쏘아 23명이 죽었다. 일본 군경은 다시 인근의 고추리로 달려가 천도교도 6명을 칼로 쳐죽이고 석유를 뿌려 시체를 불태웠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다음백과
다음백과 | cp명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

TOP으로 이동


[Daum백과] 수원 3·1운동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