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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에 비행기 두 대가 꽂히듯이 부딪혔고 건물은 무너져 내렸다. 워싱턴의 국방부 건물이 폭파되고, 대통령 집무실인 백악관은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 알카에다가 저지른 끔찍한 테러로 3,000명 가까운 무고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고, 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테러의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 후 지구촌은 테러와의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다.
반격에 나선 미국은 알카에다의 우두머리인 오사마 빈 라덴을 죽이고, 알카에다 잔당을 잔혹하게 소탕하고 있다. 알카에다를 비호했다는 이유로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고 점령했다. 심지어 9·11 테러와 관련이 없는 이라크에 대해서도 거짓 정보와 명분을 내세워 침략해 망가뜨려 놓았다. 이 기회를 틈타 급진 세력들은 다시 활개를 펴기 시작했고, 테러와의 전쟁이 진행될수록 미국과 그 협력자들을 겨냥한 지구촌의 테러는 늘어나고 있다. 그만큼 미국에 대한 저항과 복수의 골이 깊기 때문이다. 이슬람 세계는 급진주의자들의 테러와 미국의 지나친 전쟁 게임에 또다시 깊은 좌절과 패배감을 경험해야 했다.
9·11 사건으로 인해 ‘테러는 곧 이슬람의 테러’라는 생각이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 이슬람은 테러의 종교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사실을 알고 보면 이슬람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있다. 그런 점에서 지난 15년은 이슬람 세계에서 보면 ‘약자의 설움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서구는 배고픔에 대한 저항이건 빼앗긴 생존권을 찾기 위한 투쟁이건 영토를 둘러싼 분쟁이건 상관없이, 자신들의 이익과 미국에 위협이 되는 모든 무장 투쟁에 테러라는 잣대를 들이댔다. 대테러 전쟁이라는 미명 아래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체첸, 소말리아, 수단 등지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팔레스타인의 합법적인 정치 조직들도 테러 조직으로 분류되면서 그들의 기본적 권리가 심각하게 침해당했다. 그들은 국제법의 보호조차 받지 못한 채 끝없는 고통 속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견디다 못한 일부 과격한 세력들은 무모한 저항과 처절한 복수를 시도했다.
알카에다의 9·11 테러도 그 같은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무고한 시민들을 상대로 한 알카에다나 IS(이슬람 국가)의 반인륜적 테러 행위는 이미 이슬람 법정도 단죄했다. 건강한 무슬림 주류 사회의 공감이나 대중적 지지 기반도 상실했다. 이슬람 율법에서는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을 겨냥한 어떤 폭력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명백한 반이슬람적 범죄 행위다. 그런데 반이슬람적 테러가 왜 이슬람의 보편적인 얼굴로 묘사되어야 할까?
이제는 찬찬히 이성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실체에 근거하여 이슬람 문제와 이슬람 세계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이슬람은 57개국, 15억 명 이상, 즉 지구촌 4분의 1에 달하는 세계 최대 단일 문화권이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이고 세계 3대 유일신 종교가 생겨나 인류의 영성 세계를 밝혀 준 곳이다. 나아가 지금 이슬람 세계는 에너지 자원과 자본을 가진 우리의 중요한 동료이고, 미래에도 서로 협력해야 하는 입장에 있다. 언제까지 서구가 만들어 놓은 오류와 고정관념에 갇혀 그들을 버리고 갈 것인가?
21세기 인류의 역사는 9·11 테러 이전과 이후로 크게 나뉠 것이다. 그만큼 충격적이고, 인류가 안고 있는 온갖 문제점이 집약되어 표출된 사건이다. 이 사건은 가진 자들이 더 많이 갖기 위해 오직 앞만 보며 내달릴 때, 소외되고 착취당한 약자들이 얼마나 오랜 시간 분노하며 원망의 응어리를 키워 왔는지를 보여 준다.
석유가 본격적으로 개발되는 1900년대 초부터 석유파동이 일어나는 1970년대 초까지 석유 시장의 국제 유가는 배럴당 2달러 수준이었다. 석유 1배럴이 약 159리터니, 1리터에 15원 정도였다. 그것도 70년간이나. 지금 휘발유의 소비자 가격이 1리터에 2,000원 안팎인 상황을 고려하면 당시 유통 구조의 왜곡과 서구 석유 회사들의 자원 착취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중동 석유를 거의 헐값으로 가져다가 오늘날 서구는 선진 공업국으로 발돋움했다. 그러는 사이 중동의 아랍 국가 대부분은 서구의 가혹한 식민지를 경험하면서 수탈과 민족적 모멸을 겪었다. 이러한 무슬림들의 울분은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의 정치적 선동에서도 잘 드러난다.
“미국은 아랍 석유의 판매를 대행함으로써 노골적으로 그 수익을 도둑질하고 있다. 지난 25년 동안 석유 1배럴이 팔릴 때마다 미국은 135달러를 챙겼다. 이렇게 해서 중동이 도둑맞은 금액은 하루에 40억 5,000만 달러로 추산된다. 이것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도둑질이다.
이런 대규모 사기에 대해 세계의 12억 무슬림은 1인당 3,000만 달러를 보상해 달라고 미국에 요구할 권리가 있다.”
- 로레타 나폴레오니, 《모던 지하드: 테러, 그 보이지 않는 경제》, 343쪽
이처럼 오사마 빈 라덴의 혁명적이고 격렬한 발언은, 19세기 마르크스가 서구 자본가들이 가난한 나라를 착취하는 것을 맹렬하게 비난한 논조를 연상시킨다. 선동 방식에는 동조할 수 없지만 그의 감성적 호소가 일부 무슬림들에게 먹혀드는 배경은 이해가 된다.
무엇보다 무슬림들은 서구의 식민 통치에 순응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중세 천 년을 압도적인 우위로 유럽을 지배한 기억이 있고, 야만 상태에 있던 유럽인들에게 문명이 무엇인지 가르치며 문화 교사 역할을 해 왔다. 그런데 이제 치욕적인 지배를 받으며 무지하고 미개한 사람으로 취급받는 자신들의 뒤바뀐 입장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750년경 압바스 제국의 성립과 함께 유럽의 노른자위 영토는 이슬람의 수중에 들어오거나 그 위협 아래 있었다. 732년 파리 교외 푸아티에에서 유럽의 뛰어난 지배자 카를 마르텔이 이슬람군을 막아 주지 못했다면 파리를 포함한 유럽 전체는 이슬람화되었을지도 모른다. 압바스 제국은 1258년 몽골에 멸망할 때까지 500년간 세계를 호령했다. 이슬람 제국의 힘은 단지 무력과 정치적인 권위만이 아니었다. 과학과 기술, 문학과 인문학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당시 유럽은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1,000년 가까이 중세의 암흑시대를 보내고 있었고, 이 시기 거의 모든 것을 이슬람으로부터 배웠다.
서구와 이슬람 세계의 힘의 관계가 완전히 뒤바뀐 시점을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점령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이후 거의 모든 이슬람 세계는 200년 가까이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등 서구의 식민 지배를 경험했다. 1,000년 동안 지배자의 입장에 있다가 자신들이 지배한 바로 그 유럽 사회에 지배당하는 처지를 수긍하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도 대다수 현실적인 무슬림들은 불편함을 숨긴 채 서구를 받아들이려 하고 있다. 중세 때 그들이 전해 준 과학과 기술, 인문학적 깊이라는 유산을 이제는 대부분 서구 유럽 사회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과거의 응어리가 너무 커 서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급진 이슬람 세력이다.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끌었던 알카에다 조직도 그중 하나다. 그들을 급진적으로 만든 것은 비열한 서구의 음모와 불공정한 국제 정책이다. 팔레스타인 문제가 불씨가 되었지만 걸프전쟁과 보스니아, 코소보, 체첸, 카슈미르, 아제르바이잔, 동티모르 등지에서 보여 준 미국과 서구의 이슬람 죽이기 정책에 더 이상 앉아서 당할 수 없다는 절박함이 그들을 테러로 내몰았다. 이스라엘 보호라는 절대 가치를 포기할 수 없었던 미국의 이중 잣대와 노골적인 불공정 게임에 대한 불신, 그동안 쌓인 분노도 테러의 주요 원인이었다.
9·11 테러는 우리 사회에 독과 약을 동시에 가져다 준 사건이었다. 이슬람은 곧 테러라는 고정관념을 다시 한 번 뚜렷이 인식시켰다. 한편 일부에서는 편견 없이 이슬람 세계를 이해하고 무슬림들의 집요한 저항 의식과 반미 정서의 뿌리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을 던졌다. 이슬람 관련 책이 수백 종이나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고, 관심을 끌었다. 9·11 테러는 일회성 테러를 넘어 세계 질서와 가치관에 변화를 가져다준 기폭제가 되었다. 세계의 지성은 9·11 테러를 여러 측면에서 정리하고 있는데, 필자 나름대로 사건의 성격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첫째, 인류가 복지와 평화를 위해 발전시킨 첨단 기술과 문명의 이기가 적대심과 복수심을 만나 행동으로 분출될 때, 얼마나 큰 위협과 폭력을 가져올 수 있는지 9·11 테러가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둘째, 아무리 작고 힘없는 민족이나 국가라도 절대 강자에게 치명적 피해와 위협을 줄 수 있음을 9·11 테러는 분명히 보여 주었다.
셋째, 9·11 테러는 소련 붕괴 이후 미국의 일방적이고 패권주의적인 태도에 대한 인류 사회의 경고였다. 공존과 다양성에 대한 존중만이 대국으로서의 위상과 역할을 지켜 나갈 수 있다는 역사의 교훈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준 사건이다.
넷째, 9·11 테러는 서로 다른 가치관이 맞서는 국제사회의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 주었으며, 명분 없는 비도덕적 전쟁을 몰고 왔다. 테러를 뿌리 뽑고 테러 조직을 없앤다면서 아프가니스탄을 상대로 시작한 무차별 공격은, 결국 테러와 관련이 없는 무고한 시민들의 희생을 낳았다. 9·11 테러로 숨진 3,000여 명의 몇 십 배에 달하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무고한 민간인이 미국의 침공으로 희생되었다. 그리고 5,000여 명의 탈레반 전사들을 없애기 위해 수천억 달러의 전쟁 비용을 지불했다. 민간인 희생자에 대해서는 전쟁 중에 일어날 수 있는 불가피한 오폭이라며, 그 가족들에게 형식상 몇 백 달러를 보상금으로 쥐어 주었다. 모든 인류의 생명 가치는 동등하다는 기본적인 명제에 충실하지 못한다면 또 다른 9·11 테러를 막을 수 없다. 미국과 이슬람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두 개의 인권과 두 개의 불공정한 기준이, 가진 자의 횡포와 빼앗긴 자의 저항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다섯째, 미국의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에 대한 전쟁을 통해 볼 때 9·11 테러는 실질적인 위협이 아닌 잠재적인 테러 위협에도 선제공격과 전쟁이 가능하다는 선례를 남겼다. 이전처럼 국제사회의 협의와 유엔의 절차를 거치지 않고, 미국의 일방적인 결정만으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
여섯째, 9·11 테러는 서구 사회에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아랍-이슬람권 내부의 개혁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심정적으로는 아랍권의 반미 감정이 확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 주류에서는 내부의 개혁과 변화를 통해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마지막으로, 9·11 테러는 우리의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지금까지 우리의 세계화는 정확히 서구화, 나아가 미국적 기준과 거의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지구촌 전체를 꿰뚫는 균형 있는 시각과 정보는 부족했다. 반쪽 세계화였던 셈이다. 9·11 테러는 이런 반쪽 세계화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기회가 되었다. 우리에게 진정한 세계화, 균형 있는 세계화 인식이라는 선물을 가져다준 것이다. 해방 이후 지난 반세기 동안 서구와 미국을 향한 지적 편중에 대한 반성과 함께 지금까지 방치해 온 다양한 세계를 우리 입장에서 재조명하자는 대중적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슬람 사회를 이해하는 데 균형 감각이라는 화두가 어느 때보다 강하게 퍼져 나갔다. 세계는 지금 저마다 9·11 테러의 의미를 진지하게 되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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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세계가 중세에 이룩한 화려한 문명과 과학적 업적을 살펴봄으로써, 세상을 바꾼 이슬람 문화의 가치와 업적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계기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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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이슬람을 다시 돌아보게 한 9·11 테러 – 세상을 바꾼 이슬람, 이희수,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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