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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48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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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546년 |
국적 | 한국 |
대표작 | 《화담집》 |
조선 중종·인종 때의 유학자. 황진이,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로 불렸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어렵게 공부했으나 벼슬길에도 나아가지 않고, 일생을 송도 화담에서 초막을 짓고 청빈하게 살며 학문에만 정진하며 살았다. 유학의 근본 입장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기일원론을 주장하여 퇴계 이황의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율곡 이이는 독서에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연구하고 탐구하는 서경덕을 높이 평가했다. 저서에는 시문집인 《화담집》이 있다. 《토정비결》의 저자 이지함과 허균의 아버지 허엽을 제자로 두었다. 1578년 선조는 그를 우의정에 추증하고, 문강(文康)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공자의 묘에 들어가는 꿈을 꾸다
서경덕의 호는 화담(花潭)이며 송도(현재의 개성) 사람이다. 그의 조상은 대대로 개풍군(현재 개성직할시의 한 군으로 재편성됨) 풍덕(고려 태조의 무덤인 현릉과 박연폭포 등의 명승고적이 있음)에서 살았다. 아버지 서호번은 낮은 벼슬에 있었다고 하나, 남의 땅을 소작하여 생계를 꾸려나간 것으로 보아 녹봉도 받지 못한 것 같다. 그럼에도 성품이 정직하여 소작료를 속이지 않고 꼬박꼬박 내어 지주는 확인해보지도 않고 받았다고 한다.
서호번은 개성에 사는 한씨에게 장가를 든 까닭에 개성에 옮겨와 살았는데, 한번은 개성에 큰불이 나서 그의 집에까지 옮겨 붙었다. 이때 그가 향을 사르고 축문(祝文)을 지어 "저는 평생에 감히 의롭지 않은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하고 하늘에 아뢰자, 갑자기 바람이 일어 불이 붙은 초가지붕을 걷어버렸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이 집안사람들이 여러 대에 걸쳐 쌓은 덕에 하늘이 감응했다고 입을 모았다.
그의 어머니가 공자의 묘에 들어가는 꿈을 꾸고 그를 임신했다고 하며,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서경덕은 어려서부터 대단히 총명하고 영특했다. 그러나 집안 형편 때문에 14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유가 경전을 배웠고, 또 정해진 스승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학자가 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종달새가 하늘을 나는 이치
서경덕은 궁리하지 않은 채 책을 읽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라 생각하여 잘 모르는 글자는 벽이나 천장에 써붙여 놓고 하나씩 사색하며 연구해나갔다. 가령 하늘의 이치를 알고 싶으면 '하늘 천(天)' 자를 벽에 붙여놓고 문을 잠근 채 한없이 그 글자를 바라보며 이치를 생각하고, 또 땅의 이치를 알고 싶으면 '땅 지(地)' 자를 붙여놓고 계속 궁리해나가는 그런 식이었다. 그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좋은 스승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하지만 후세 사람이 내 말에 따라 공부를 한다면 나와 같이 힘들이지 않아도 학문에 통달하게 될 것이다."
그가 《상서》(《서경》을 다르게 일컫는 말)를 공부할 때 서당의 훈장은 "선생도 잘 몰라 뒤로 물러앉은 것을, 이 아이는 홀로 깊이 생각하여 십오 일 만에 알아냈도다!"며 탄복할 정도였다.
16세 때에는 《대학》을 읽어 그 뜻을 깨우치고는, 기쁨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공부에 열중할 때면 그는 밥을 먹어도 맛을 몰랐고, 길을 걸어도 어디를 갈지 몰랐다. 어디 그뿐인가? 며칠씩 잠을 자지 않는가 하면, 조금 눈을 붙이는 중에 꿈속에서 풀지 못한 이치를 알아내기도 했다.
한번은 어머니가 그를 불러 밭에서 푸성귀를 좀 뜯어오라고 시킨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돌아왔을 때, 광주리에는 푸성귀가 얼마 들어 있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 이유를 묻자 그는 "종달새가 땅에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하루 종일 그 이유만 생각하다 보니 푸성귀 뜯는 걸 잊어버렸습니다"고 대답했다.
그 후로도 며칠 동안 계속 어두워진 후에야 집에 돌아오자 부모는 재차 그 까닭을 물었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나물을 캐다가 새끼 새가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첫 날은 땅에서 한 치를 날고, 다음 날은 두 치, 그 다음 날은 세 치를 날다가 차차 하늘을 날아다니게 되었습니다. 새끼 새가 나는 것을 보고 그 이치를 곰곰이 생각해보았으나 터득하지 못하여 나물도 얼마 못 캐고 늦게 돌아왔습니다."
이 어린 소년의 종달새에 대한 관찰과 회의(懷疑)는 훗날 이른바 기철학(氣哲學)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소재로 작용한다.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은둔하다
서경덕은 몇 년 동안 계속된 지나친 독서와 사색 탓으로 과로가 겹쳐 다시는 책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상하고 말았다. 문지방을 넘지 못할 정도로 몸이 쇠약해지자 사색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워낙 천성적으로 탐구심이 강해 스스로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결국 21세 때에는 학업을 포기하고 전국 곳곳의 명산 등지를 찾아다니며 몸을 회복하는 데 힘써야 했다.
서경덕은 25세 때에 이미 전국의 대학자들 사이에서 이름을 날릴 정도였으며, 많은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았다. 조광조는 현량과각주1) 를 신설하여 인재 120명을 선발하면서 서경덕을 제1로 추천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거부했다. 또 조정에서는 과거를 보지 않은 그에게 한때 벼슬을 천거했지만, 서경덕은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쌀이 떨어져 며칠씩 굶고 지내는 판인데도 조정의 녹봉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고려 왕조에 대한 향수가 짙은 개성 사람들을 소외시켰다. 또 문벌을 자랑하는 양반이 주름잡는 시절이었는데 보잘것없는 문벌의 그에게 벼슬을 천거한 것은 보통 대우가 아니었다. 그러나 서경덕은 아예 초야(草野)에 묻혀 산천(山川)과 벗하고 지내기로 작정하고, 34세에 유람을 떠났으며 속리산, 변산을 거쳐 지리산에 올랐다.
얼마 후, 서경덕은 제자 이지함각주2) 을 데리고 지리산을 다시 찾았다. 이때 그들이 만난 사람은 지리산 언저리에서 은거하고 있던 대곡 성운각주3) 과 남명 조식각주4) 이었다. 성운과 조식은 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을 거절하고 철저하게 은둔자적 삶을 살던 선비들이었다. 이들은 서로 어울려 시와 술을 주고받았고, '벼슬에 나가지 않고 산에 묻혀 사는 삶'의 의미를 노래했다.
성균관을 뛰쳐나오다
이렇게 자연을 벗 삼아 은둔 생활을 하던 서경덕도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을 뿌리치지 못해 43세에 과거장으로 나갔다. 참으로 그의 이상에 걸맞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어쨌든 생원시각주5) 에 합격했다. 생원시에 합격하면 누구나 성균관에 들어가 앞으로의 벼슬살이에 대비한 훈련을 받아야 했으므로 그 역시 성균관에 들어가기는 했다.
그러나 그는 성균관에서 별로 인정받지 못했다. 어수룩한 행동과 촌스러운 몸가짐이 세련된 권문세가 자제들의 눈에 좋게 비쳤을 리가 없었다. 개성 무지렁이로 따돌림을 받았는데, 다만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영남의 암행어사가 된 이담이라는 사람이 그에게 호의를 보여 뒷날 칭송을 받았다고 전한다.
결국 서경덕은 성균관에서 뛰쳐나옴으로써 벼슬자리에 나가는 것을 포기했다. 개성으로 돌아온 그는 송악산 자락 화담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 초막을 짓고 못다 한 학문에 정진했다. 이때부터 '화담 선생'이라는 별호가 그에게 붙여졌다. 그의 소문은 널리 퍼져 개성 일대는 물론이요, 서울에서까지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학문에 정진하는 그의 모습은 참으로 성자와 같았다. 어느 날 제자 강문우가 쌀을 짊어지고 가보니 스승이 화담 위에 앉아서 한낮이 되도록 사람들과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열변을 계속하는 데도 얼굴에는 조금도 피곤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강문우는 짚이는 것이 있어 부엌에 들어가 부인과 이야기하는데, 부인은 "어제부터 양식이 떨어져 밥을 짓지 못했습니다"고 말했다.
한번은 제자 허엽이 그를 찾아갔는데 장마가 계속되다 보니 화담의 집으로 건너가는 냇물이 불어나 있었다. 엿새 동안 기다린 끝에 마침 냇물이 조금 줄어들어 건너가니 화담은 태평하게 거문고를 타며 글을 읊고 있었다. 인사를 마친 허엽이 저녁밥을 지으러 부엌으로 들어가자, 화담은 "나도 저녁을 먹지 않았으니 내 밥도 지어라"고 말했다. 허엽이 솥뚜껑을 열어보니 솥 속에 이끼가 가득 끼어 있었다. 허엽이 "왜 솥에 이끼가 끼어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서경덕은 "물에 막혀 집사람이 엿새째 오지 않아서 그랬나보다"고 말했다.
황진이의 유혹
세상 사람들이 화담을 존경한 것은 그의 학문상의 업적보다도 고결한 성품 때문이 아닌가 싶다. 황진이가 화담을 여러 번 유혹했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개성 출신의 명기 황진이는 원래 진사의 서녀였다. 사서삼경과 시서, 음률에 모두 뛰어났으며 특히 용모가 빼어났다. 15세 무렵 이웃 총각이 자기를 연모하다가 상사병으로 죽자 기녀가 되어, 시를 짓는 탁월한 재주와 아름다운 용모로 문인들을 매혹했다. 그중 10년 동안 수도에 정진하여 '살아 있는 부처'라 불리던 천마산의 지족 선사를 유혹하여 파계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어 당대의 대학자인 화담을 유혹하기 위해 어느 비 오는 날, 얇은 가사(袈裟)를 걸치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빗물에 흠뻑 젖은 옷이 아리따운 몸에 달라붙어 그야말로 맨몸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온갖 교태를 부리며 화담의 손을 끌어당겼으나, 그는 끝내 요지부동이었다. 이에 황진이가 말했다.
"지족 선사는 나의 농락으로 이전에 쌓았던 공을 하룻밤 사이에 허물어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화담 선생은 내가 가까이한 지 여러 해가 되었건만 그분의 마음과 몸을 어지럽히지 못했다. 그야말로 참 성인(聖人)이시로다!"
이후 개성 사람들은 황진이와 박연폭포, 화담을 묶어 송도의 세 가지 빼어난 것, 즉 '송도삼절'이라 불렀다.
화담의 임종은 실로 도학자다웠다. 그는 2년 가까이 병상에 누워 있다가 죽기 직전 시자(侍者)에게 업혀 화담으로 갔다. 그곳에서 목욕하고 돌아와 세상을 떠나니 때는 1546년 7월 7일, 그의 나이 57세였다. 임종할 때에 한 제자가 "선생님! 지금 심정이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화담은 "죽고 사는 이치를 이미 알고 있은 지 오래다. 마음이 편안할 뿐이다"고 했다.
철학 속으로
서경덕은 북송의 성리학자 장재의 영향을 받아 기(氣)가 만물의 근원이라고 보는 기일원론을 주창함으로써 주리론(主理論)으로 기울어가는 당시의 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서경덕에 따르면, 천지 만물은 모두 기로 말미암아 생성되는 물질적 실체다. 깨끗하게 비어 있는 선천(先天)의 기는 본래 하나이긴 하나 그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그 자체의 능력으로 변화의 작용을 일으켜 나간다. 여기에서 말하는 둘은 곧 음양과 동정(움직임과 정지), 감(坎, 달과 물)과 이(離, 해와 불) 등을 가리킨다. 하나의 기가 나뉘어 음양이 될 때 양이 변화의 극치를 이룬 것은 하늘이 되고, 음이 모이고 응결한 것의 극치는 땅이 된다. 또 양의 정수가 모여 해가 되고, 음의 정수가 모여 달이 된다. 나머지 기운들이 하늘에서는 별이 되고, 땅에서는 물과 불이 된다.
화담은 이처럼 선천(先天)에서 후천(後天)으로 옮겨가는 과정을 기의 운동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이 기의 운동은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기(氣) 스스로 능히 그것을 일으킨다고 보았다. 결국 화담은 모든 운동과 변화의 원인을 기 자체에 두고, 기의 모임과 흩어짐을 통해 현상계를 설명함으로써 이(理)라는 관념적 존재의 실재성을 부인했다. 그에 따르면 이는 기가 취산(모이고 흩어짐)하는 법칙에 불과한 것으로, 기에 부수된 이차적 존재일 뿐이다. 만물의 근원은 기이며, 따라서 인간의 존재와 인간의 정신, 지각까지도 기의 모임과 흩어짐에 의해 설명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 물질적인 기는 시작도 종말도 없으며, 창조나 소멸도 없다. 따라서 구체적인 사물은 소멸되어도 그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인 기는 흩어질 뿐 소멸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은 그의 견해는 이(理)를 기(氣)에 선행하는 1차적 존재라고 주장한 주희(주자)의 견해와는 뚜렷이 구분되는, 독창적인 것이었다. 나아가 그는 귀신이나 죽음의 문제도 기의 모임과 흩어짐으로 설명함으로써 당시 성행하던 풍수지리설과 같은 미신을 배척했다. 결국 기일원론적인 그의 유물론적 사고에 의해 불교의 공(空)이나 도교의 무(無), 기타 미신적인 귀신관 등은 설 땅을 잃게 되었다.
현실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 왕릉이나 기타 묘지가 무분별하게 지정되고 확장되는 데 따른 폐단이나 왕릉의 축조를 위한 돌 채취의 노역 동원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 중종이 죽었을 때에는 생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의 형편에 맞게 삼년상을 3개월로 고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기일원론은 유학의 근본 입장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었기 때문에 퇴계 이황의 격렬한 비판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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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철학자 30인의 알려지지 않은 철학 이야기를 통해 세계철학사의 흐름을 읽다. 철학자의 사상보다는 삶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그들의 삶 역시 평범한 인간과 다..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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