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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개원 및 원(院)구성 협상에서 첨예하게 대립했던 여야관계는 시작부터 꼬여만 갔다. 명색은 ‘여대야소’ 국회였지만, 여당은 무기력했고 야당은 대안 없이 총체적 난조에 빠졌다. 2008년 9월 1일 문을 열었던 제18대 첫 정기국회는 여야 간의 첨예한 대립과 정쟁 속에서 ‘식물국회’, ‘불임국회’라는 오명을 안아야 했다.
어김없이 예산안 법정 처리시한(12월 2일)을 넘기는 위헌을 반복했고 국정감사와 ‘쌀 소득보전 직불금’ 국정조사 내내 신ㆍ구(新舊) 정권의 책임공방으로 일관하는 등 구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 사이 산적한 민생ㆍ경제법안들은 뒷전으로 밀렸다. 무엇보다 2009년도 예산안 늑장 처리는 부실국회가 낳은 결과라 할 수 있다. 여야는 예산안 법정시한 사흘 뒤인 12월 5일에서야 비로소 예산 부수법안인 종합부동산세와 소득세 등 각종 감세법안을 처리하고 12일 예산안 처리에 가까스로 합의했다.
첫 정기국회의 법안처리 성적도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정기국회 기간 제출된 법안 건수는 모두 2천69건에 달하지만, 이 중에서 본회의에서 통과된 건수는 125건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여야 간의 공동발의로 처리된 양벌규정 관련법안 69건을 포함, 96건은 정기국회가 폐회하기 하루 전인 12월 8일 ‘벼락치기’로 통과된 것이다. 금융ㆍ산업분리 완화와 출자총액제한제 폐지, 사이버 모욕죄 등 쟁점법안에 대해서는 아예 손도 못됐다.
여야의 극한 대립은 최악의 폭력사태를 불렀다. 2009년도 예산안 처리가 끝나자마자 한ㆍ미FTA(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안과 미디어 관련법을 포함한 쟁점법안 처리를 둘러싼 여야 간 ‘입법전쟁’이 본격화된 것이다. 한나라당이 추진하려는 쟁점법안은 한ㆍ미 FTA 비준동의안을 비롯해 신문ㆍ방송 겸영을 위한 신문법ㆍ방송법 등 미디어 관련법, 금산분리 완화를 위한 은행법ㆍ금융지주회사법, 출자총액제 폐지를 위한 독점거래 및 공정거래법 등이다.
또 산업은행 민영화를 위한 한국산업은행법ㆍ한국정책금융공사법, 법질서 확립을 위한 이른바 ‘떼법 방지법’인 불법집단행위에 관한 집단소송법, ‘마스크법’으로 불리는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 등도 포함돼 있다. 이밖에 국가정보원의 직무범위를 넓히는 국가정보원법과 휴대전화 감청을 가능하도록 하는 통신비밀보호법 등도 ‘뜨거운 감자’다.
이 같은 한나라당의 법안 처리에 대해 민주당을 비롯한 야권에서는 ‘MB 악법’으로 규정짓고 결사항전을 외쳤다. 쟁점법안 처리를 둘러싸고 여야 간 극한 대결은 12월 18일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에서 폭발했다. 박 진 위원장을 비롯해 한나라당 소속 의원들이 회의장을 봉쇄한 채 한ㆍ미FTA 비준동의안을 기습 상정하면서 여야가 물리적 폭력으로 충돌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대형 해머와 정이 동원돼 회의장 문이 부서졌고, 감정 대립이 격화되면서 소화전을 끌어다 상대편에게 물대포까지 쏘는 등 국회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급기야는 민주당이 국회의장실을 비롯해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 행정안전위, 정무위 등 상임위 3곳에서 점거농성에 들어갔고,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26일에는 국회 본회의장을 점거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여야 중점처리ㆍ저지 법안
2008년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국회 본청 주변은 김형오 국회의장이 질서유지권을 발동한 가운데 ‘준(準) 전시상태’를 방불케 했다. 이 과정에서 본회의장과 상임위 3곳 등을 점거한 민주당 관계자들과 국회 방호원들 간에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이날 당 대표와 원내대표 회담을 잇달아 갖고 쟁점법안의 절충을 시도했으나, 최종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이에 따라 한ㆍ미FTA 비준동의안과 미디어 관련법 등 쟁점법안을 둘러싼 여야의 ‘입법전쟁’은 2009년으로 유보됐다.
여야 간 극한 대립에 여론은 들끓었다. ‘대화와 타협’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원칙마저 준수하지 못한 ‘폭력국회’에 대해 성난 민심이 폭발한 것. 이처럼 여야가 상생의 정치를 펼치지 못한 배경에는 불신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저에는 여대야소의 ‘모순’이 내재돼 있다는 분석이다. 172석을 가진 한나라당은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힘의 논리를 구사하려 했고, 소수 야당은 이에 극한투쟁으로만 맞서려고 했기 때문이다.
실제 10년 만에 정권을 되찾았지만 한나라당은 ‘172석의 힘’이 주는 영광보다는 역설적으로 ‘172석의 무기력’을 절감한 어느 때보다 힘든 시기였다. 당내 계파 간 갈등, 구심점 상실, 당ㆍ정ㆍ청(黨政靑) 불협화음에 따른 정책 엇박자 등 내부 요인과 쇠고기 파동에서 세계적 경제위기 등 외부 요인이 맞물리며 안팎의 도전이 거셌으나 대응은 무기력했다.
제1야당인 민주당도 ‘견제와 대안’으로서 정체성 확립을 찾지 못하고 총체적 난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선과 총선의 잇단 참패로 사분오열된 당을 추스르는 리더십이 부재한 데다 1년 내내 당내에서 ‘선명이냐, 대안이냐’를 놓고 갈팡질팡하는 자중지란도 보였다. 강경파의 목소리가 득세하면서 합리적인 온건파는 설 자리를 잃어버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집토끼’도 ‘산토끼’도 다 놓쳤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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