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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이주민들은 곰이라는 별명을 가진 변경백 알브레히트 1세가 지배하는 브란덴부르크와 슐레지엔에 정착했다. 프리드리히는 1157, 1172년 2차례의 폴란드 원정으로 폴란드 공작들을 다시 종속적인 지위로 떨어뜨렸다. 독일 북부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인 하인리히 공작은 브라운슈바이크를 거처로 삼았다. 그는 사이가 나쁜 다른 군주들에게 되풀이 도전했지만, 마크데부르크 대주교 비히만, 브란덴부르크의 알브레히트, 튀링겐 백작 루트비히 3세, 쾰른의 대주교 라이날트는 굽히지 않고 저항을 거듭했다.
하인리히가 몰락한 원인이 1176년 프리드리히의 지원 요청을 거부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다방면으로 나라의 평화를 깨뜨렸다. 이 때문에 황제는 그를 비난하고 뤼베크를 점령했으며, 1180년에는 겔른하우젠에서 열린 군주 회의를 통해 그를 퇴위시켰다. 하인리히는 공작령을 잃었다. 베스트팔렌은 쾰른 대주교에게 주어졌고 바이에른은 비텔스바흐의 오토에게 주어졌다. 잉글랜드의 마틸다 공주와 결혼한 하인리히는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에게로 망명했다.
하인리히에 대한 재판 결과, 봉건 제도는 제국을 이루는 훨씬 더 강력한 토대가 되었다. 그후로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한테서 직접 땅을 받은 군주들만이 제국 군주(라이히스퓌르스텐)들의 배타적인 집단에 받아들여졌다. 프리드리히는 포메른 군주들을 공작의 지위로 끌어올렸고, 안데흐 백작들은 메라니아(트리에스테 근처) 공작들이 되었으며, 슈타이어마르크는 공작령이 되었다. 프리드리히가 취한 또 하나의 중요한 조치는 1168년에 뷔르츠부르크 주교를 프랑켄 공작의 지위로 끌어올린 것이었다.
프리드리히는 날로 커지는 군주들의 세력을 억누르려고 애썼다. 1152년에 그는 이미 제국의 영토인 부르고뉴 지역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냈다. 그는 체링겐 공작 베르톨트 4세를 부르고뉴 공국에 대한 자신의 대리인으로 삼아 지중해 지역까지 담당하게 했고, 부르고뉴 백작 라이날트의 딸인 베아트릭스와 결혼했다(1156).
프리드리히는 군주들이 지배하는 지역 사이에 자신의 제국령을 세우려고 꾀했다. 이 영토는 성과 도시, 소유지, 성직자의 관구, 그리고 슈바벤에서 튀링겐까지 다소 촘촘하게 흩어져 있는 독립 영토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방대한 영지는 황제의 장관들(미니스테리알레스 임페리)이 다스렸다. 이들은 대부분 황제의 측근이었기 때문에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뮌첸베르크의 쿠노였는데, 그의 성은 오늘날 프랑크푸르트 북쪽의 베테라우에 보존되어 있다. 프리트베르크라는 도시를 세운 사람도 바로 쿠노였다. 영토에 관한 '평화 유지법'은 황제에게 권력을 계속 보장해주기 위한 그의 노력의 일환이다.
기사 제도는 프리드리히 시대에 특별한 성격을 부여했다. 프리드리히는 1184년에 마인츠에서 열린 오순절 축제 때 아들들에게 기사작위를 주면서, 이상적인 생활 방식인 기사도에 대한 열정을 표시했다. 1188년에 열린 '예수 그리스도 의회'는 이 오순절 축제를 능가했다. 이 의회에서는 나무르 변경백령이 제국의 공국으로 바뀌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1189년 봄에 프리드리히가 1187년에 살라딘의 군대에 점령된 예루살렘을 해방하기 위해 제3차 십자군을 소집한 것이었다.
프리드리히는 원정을 떠나기 전에 토스카나 백작 부인 마틸다의 소유지인 교황령의 일부를 교황에게 되돌려주었다. 1190년에 황제는 살레프 강을 건너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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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프리드리히 1세의 후기생애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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