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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한국 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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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에 들어가기에 앞서 1~300년경에는 여러 부족들이 성읍국가를 이루고 있었는데, 당시의 주택은 집터와 중국의 문헌을 통해 주택의 형태를 대강 추정해볼 수 있다. 김해 조개더미 등과 같은 유적을 통해 이 시기의 사람들은 구릉지를 중심으로 생활하다가 점차 강어귀의 삼각주지방으로 진출하여 농경과 목축생활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후한서 後漢書〉·〈진서 晉書〉 등의 기록에 의하면 읍루·고구려·옥저·동예 등에서는 심혈이라 불리는 움집에서 생활했고, 변한과 진한에서는 귀틀집[累木式住居]에서 생활했으며, 읍루에서는 여름에 고상식 주거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배계급에서는 낙랑 등을 통해 한나라의 좀더 발달된 목조건축의 영향을 받아 이러한 주택과는 다른 궁실건축을 이루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초가

초가, 용인민속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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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경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은 왕권이 강화된 중앙집권 국가체계를 갖추게 되었고, 여러 곳에서 발굴된 건축지, 출토유물, 관계문헌 등을 통해 건축도 상당히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주택건축은 현존하는 유구는 없으나 〈구당서〉·〈신당서〉 등의 문헌과, 고분벽화 및 출토된 와당과 가형토기 등으로 미루어 상류주택은 기와집이었고, 서민주택은 초가로 그 구조는 기둥과 도리·보를 쓴 목조가구식 구조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구당서〉에 보이는 '장갱'이라는 구절로 미루어 서민주택에는 추위를 막기 위한 온돌난방법이 채택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지안[輯安] 동대자주거지 등의 온돌유적은 ㄱ자형 구들로서 아궁이는 방 안에, 굴뚝은 방 밖에, 그리고 1, 2줄의 구들고래가 ㄱ자로 두 벽체를 따라 돌려져 있다. 또한 동수묘의 벽화에 부엌·푸줏간·차고·외양간 등이 별채로 건축된 것으로 보아 기능에 의한 공간분화가 이루어졌고, 기능을 달리 하는 여러 채[棟]가 모여 큰 저택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는 삼국 중 주택에 대한 자료가 가장 빈약하지만 〈신당서〉 동이전 백제조에 "그 풍속이 고구려와 같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주택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에 '돌석'이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것은 ㄱ자형 구들 유적이 발굴된 것을 감안해본다면 백제 말기에는 온돌이 일반적인 난방구조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와 통일신라는 주택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현존하는 자료로는 확실하게 구분할 수 없는 실정이다. 신라 및 통일신라의 주택에 관한 자료로는 〈삼국사기〉 권33 옥사조에 기록된 신분에 따른 주택의 규모와 장식을 규정하고 있는 가사규제가 있다. 이 가사규제에 의해 귀족계급의 주택은 궁궐건축보다는 못했지만 당시로서 상당히 화려한 주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 11과 〈신당서〉 동이전 신라조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신라 주택의 바닥구조는 마루였음을 알 수 있으며, 신라에 ㄱ자형 구들의 존재여부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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