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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과학의 역사적 전개는 이 땅에 한국인의 조상이 살기 시작한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기록과 유물로 분명하게 남아 있는 근거에 의한 한국과학사의 서술은 삼국시대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특히 초기로 갈수록 과학사의 자료가 될 수 있는 기록은 극히 부족하다. 예를 들면 김부식이 12세기에 완성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13세기 일연의〈삼국유사 三國遺事〉의 경우 과학기술의 내용을 전해주는 기록은 극히 적다.
그렇지만 자연현상에 대한 기록은 상당히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당시의 자연관을 보여주는 과학사 자료가 된다. 일식·월식·혜성 등의 천문기록이 있는가 하면, 가뭄과 홍수 등 땅 위에서 일어난 자연의 부조화도 기록해 놓았으며, 흰 노루나 유난히 큰 벼 이삭, 그리고 3쌍둥이의 기록도 있다. 〈삼국사기〉에는 이런 자연현상의 기록만 1,000개가 실려 있다.
이들은 자연현상을 그저 과학적으로 관찰해 보고했던 것이라기보다는 당시 사람들이 갖고 있던 이상한 현상에 대한 외경심, 즉 재이(災異) 사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동양적 기본사상에 의하면 우주는 하늘·땅·인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국시대부터 한국인들은 이 삼재(三才) 중 하늘에 대해 특히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삼국시대부터 가장 일찍 발달한 과학분야는 천문학이라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유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은 경주에 남아 있는 첨성대이다. 그 모양, 돌을 쌓은 단(段)의 수, 쓰여진 돌의 수에 이르기까지 첨성대는 여러 가지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듯하지만, 신라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그 용도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신라의 수도 경주에 첨성대가 세워진 647년 전후에는 신라 천문학 발달의 모습이 단편적이지만 기록에 남아 있다.
대나마 덕복은 당(唐)에서 천문역산학을 배우고 돌아왔고(674), 승려 도증은 천문도를 얻어왔다는 기록이 있으며(692), 물시계를 만든 기록도 있다(718). 또 이를 관장하는 관서로 누각전을 두고 이곳에 천문박사 1명과 누각박사 6명을 배치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749). 누각전의 명칭은 물시계 담당 관서로 되어 있지만 당시의 천문역산학을 담당한 본부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와 백제에 어떤 천문학이 발달하고 있었는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일자(日者) 일관(日官)이 있었고, 일본에 남아 있는 기록으로 보아 그 수준이 아주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세기에 백제의 왕인과 아직기가 일본에 학문을 전한 이래 여러 차례 백제와 고구려에서 천문학·역산학·역학·의학·약학 및 그밖의 여러 가지 기술이 전해진 것이 〈니혼쇼키 日本書紀〉에 남아 있다. 특히 602년 백제의 승려 관륵(觀勒)은 일본에 역(曆)을 전하고 역법을 가르쳤는데, 이는 백제가 6세기까지는 천문역법에 대한 수준이 상당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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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삼국시대의 한국과학사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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