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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제도적 교육이 이루어지는 장소, 또는 그 기관.
한국 학교의 유래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시대에 학교교육이 제일 먼저 발달한 나라는 고구려이다. 372년(소수림왕 2) 한국 최초의 학교기관으로 볼 수 있는 관학으로서 태학(太學)이 설치되었으며, 사학으로 경당(堂)이 있었다. 태학은 국립교육기관으로서 귀족자제의 관리양성을 목적으로 했던 고등교육기관이었다. 경당은 최초의 민간교육기관으로 거리에 큰 집을 지어 평민의 미혼 자제들에게 오경을 가르쳤다고 한다. 백제에는 학교 형태가 있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오경박사, 의학·역학의 박사제도, 일본에 학문·예술의 전문학자를 보낸 점으로 보아 고구려와 유사한 형태의 교육기관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에는 화랑도를 제외하면 형식을 갖춘 학교교육 형태는 삼국통일 이후에 생겨났다. 화랑도는 정규학교교육 못지않은 신라 고유의 교육조직으로서 화랑 가운데 우수한 인재를 관리로 등용했다. 682년(신문왕 2)에 생긴 국학은 벼슬을 하지 않은 무위자(無爲者)를 대상으로 유교이념과 기술을 가르치고, 우수한 자는 졸업과 동시에 나마(奈麻) 또는 대나마의 직책을 주었다고 한다. 또 개경에 학원(學院)을 두고 6부의 생도를 모아 행정요원을 양성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학교교육제도의 정착은 고려시대 992년(성종 11)에 창설된 국자감(國子監)에서 비롯되었다.
국자감에서는 국자학·태학·사문학(四門學)·율학·서학·산학을 가르쳤다. 국자감은 1275년(충렬왕 1)에는 국학이라 했고, 1298년에는 성균감(成均監)이라 했으며 1308년에는 성균관이라 했다. 1356년(공민왕 5)에는 다시 국자감이라 했다가 1362년 성균관이라 개칭하여 고려말까지 이르다가 조선 초기 이 명칭으로 굳어졌다.
또 지방에는 향교, 경중(京中)의 학당(學堂), 사학으로 12도(徒)와 서당이 있어 인재를 양성했다. 향교의 창설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987년 지방행정단위인 12목에 주현 관리 및 백성의 자제를 가르치게 한 것이 향교 설립의 바탕이 되었다. 교과내용은 국자감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의종 이후에는 국정이 문란하고 학정도 퇴폐하여 향교를 진흥했다. 학당은 관학으로서 1391년 정몽주가 학궁의 책임을 맡아 향교의 진흥과 함께 학당을 증설하여 5부학당으로 했다.
사학교육기관으로는 12도가 있었다. 고려 중기에 이르러 국자감이 부진하자 최충이 문헌공도를 만들었고 그뒤 명망 있는 유신 11명이 각기 문도를 모아 가르쳤는데 이를 12도라 했다. 고려시대의 서당에 관한 정확한 문헌 기록을 찾아볼 수는 없으나 〈고려도경〉에 미혼 자제들이 무리를 지어 스승에게 경서를 배웠다고 한 데서 서당과 비슷한 형태의 교육기관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시대의 학교는 고려 말기의 학교제도를 그대로 계승했다. 관학으로는 중앙에 성균관·학당, 지방에 향교를 두었고 사학으로는 서원과 서당이 있었다.
이는 모두 유교이념을 가르치고 인재를 양성하여 관리로 등용하기 위해서였다. 기술·실업 교육은 각 아문(衙門)에서 관장했다. 건국 초기에는 성균관을 국가 최고교육기관으로 습용했으며, 개화기에 경학원(經學院)으로 개편될 때까지 조선의 인재를 양성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했다. 고려의 5부학당을 계승한 학당은 사원을 빌려서 사용했다.
1411년(태종 11) 남부학당의 설립을 계기로 다른 학당도 건물을 독자적으로 세우게 되었다.
성균관보다는 하위 교육기관이며 문묘를 두지 않은 것이 차이점이다. 지방의 관학인 향교는, 태조가 지방 수령의 임무 중 으뜸을 향교의 진흥이라 하면서 크게 육성하여 발전했다. 향교의 교육제도나 교과내용은 유교경서를 주요내용으로 했으며, 중앙의 학당과 마찬가지로 무상교육을 비롯한 각종 특혜를 주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국가재정 궁핍, 운영부실, 과거제도의 폐지로 교육의 기능은 거의 상실하고 제향의 기능만 유지하게 되었다.
사학기관으로서 서원은 1543년(중종 38)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이 그 효시이며 당시 쇠퇴해가던 향교의 기능을 대신했다. 서원에는 성균관이나 학당에 준하는 수준이 되어야 입학할 수 있었으며 과거준비를 위한 것이 아니므로 순수하게 학문을 위해 또는 인격도야에 역점을 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붕당의 조성과 면역의 특전을 악용하는 피역자의 도피처가 되어 인조 때 서원 통제가 시작되었고 흥선대원군 때는 47개밖에 남지 않았다. 서당은 상설 초등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는데 서당의 사회적 기능과 교육적 의미가 증대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중기 이후이다. 서당은 기본자산이 있어야 되는 것도, 인가를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어서 누구나 뜻 있는 사람이면 운영이 가능했다. 주요교육내용은 유교경서·강독·제술·습자였다.
서당은 신교육제도가 보급되면서 차츰 쇠퇴하다가 일제강점기에 식민교육이 시작되자 이의 거부 형태로 다시 부흥하기도 했다.
개화기에는 부국강병·근대화의 과제로서 신교육이 절실해지면서 근대학교의 설립이 요구되었다. 한국에서 설립된 최초의 근대학교는 통역관 양성을 위한 동문학(同文學)과 육영공원(育英公院)이다. 육영공원은 국립 학교로 양반자제들만 입학했는데, 이들은 봉건사상 때문에 신학문에 적응하지 못해 오래가지 못했다.
1895년 4월 교사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한성사범학교관제'를 발표해 신학제에 필요한 관제와 법령을 제정했다. 이에 따라 소학교·중학교·외국어학교가 신설되었다. 최초의 소학교는 수하동학교이며, 최초의 중학교는 한성중학교이다. 민간인이 세운 최초의 근대학교로는 원산학교가 있으며 사립학교는 원산학교 이후 민영환이 세운 흥화학교를 비롯해 1908년 전국적으로 5,000개의 사립학교가 생겨났다.
근대교육이 보다 활발해진 것은 서양 선교사들이 서구식 학교를 설립하면서부터이다. 그 효시는 장로파 선교회의 광혜원과 미국의 북감리교 선교부의 배재학당이고 최초의 여학교는 미국 북감리교 선교부의 이화학당이다. 1910년까지 설립된 그리스도교 계통의 학교는 전국에 총 796개나 되었다. 한문을 가르치던 서당도 학당이나 의숙으로 개조되어 새 교육기관으로 개편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학교가 친일우민화 교육을 담당하는 장소로 전락하게 되었다. 특히 '조선교육령'은 한국인을 단계적으로 황민화하기 위한 학제의 개편, 교육내용의 변화를 가져왔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학교는 강제노동의 동원, 학도지원병의 동원을 위한 기관이 되어 정상적인 교육기관으로서의 의미는 상실하고 말았다. 8·15해방 후에는 교육의 기회균등을 바탕으로 한 학제로 개편되었다. 초등학교(6년)-초급중학교(3년)-고급중학교(3년)-대학교(4년)의 단선형학제가 마련되었고 이후 이 학제를 기초로 많은 변화와 발전을 거듭했다.
학교교육의 단계에 대해서 '초등교육', '중등교육', '고등교육' 항목, 세계의 교육기관에 대해서는 '대학', '칼리지' 항목, 세계의 교육제도에 대해서는 '교육제도' 항목, 한국의 교육제도에 대해서는 '학제' 항목 참조(세계의 대표적 대학들에 대해서는 개별 대학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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