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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1880년대에 자연주의와 과학을 경멸하는 소설들이 나왔는데, 빌리에 드 릴라당(1838~89)의 〈잔인한 이야기 Contes cruels〉(1883)가 그 한 예이다.
그러나 소설의 주류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후의 가톨릭의 부활과 국가주의의 대두와 관계가 있었다. 처음에 자연주의 소설가였던 위스망스는 〈거꾸로 À rebours〉(1884)를 거쳐 〈대성당 La Cathédrale〉(1898)에 이르러서는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열광적인 가톨릭교도인 레옹 블루아(1846~1917)는 자전적 소설 〈절망자 Le Désespéré〉(1886)를 썼다.
그러나 가톨릭교와 우익 정치가 결합되어 있는 〈제자 Le Disciple〉(1889)를 비롯한 폴 부르제(1852~1935)의 소설들이 시대정신을 더 잘 대변해주고 있었다. 그의 반민주주의적·반공화주의적 견해는 모리스 바레스(1862~1923)와 같은 국가주의 작가들의 견해와 비슷했다. 바레스의 〈뿌리 뽑힌 사람들 Les Déracinés〉(1897)은 드레퓌스 사건과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의 프랑스 우익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아나톨 프랑스(1844~1924)는 부르제와 바레스와는 달리 자유사상과 민주주의를 위해 그의 예술을 사용했다.
프랑스는 드레퓌스파의 입장에서 적극 투쟁한 문인으로서, 그의 〈현대사 Histoire contemporaine〉(4권, 1896, 1897, 1899, 1901)에는 교회, 우익반대파, 부패한 집권층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강렬한 인도주의적 이상이 담겨져 있다. 피에르 로티(1850~1923)는 해군장교로서 세계의 풍경을 우울한 관능주의자의 영혼으로 섬세히 그렸다(〈아이슬란드의 어부 Pêcheur d'lslande〉, 1886). 쥘 르나르(1864~1910)는 간결하고 익살스런 문체로 소설과 희곡을 썼는데 소설로서는 〈홍당무 Poil de carotte〉(1894)·〈박물지 Histoires naturelles〉(1896)가 유명하다.
샤를 루이 필리프(1874~1909)는 파리의 빈민가를 공감을 가지고 그린 민중작가이고(〈뷔뷔 드 몽파르나스 Bubu de Montparnasse〉, 1901), 대하소설 〈장 크리스토프 Jean Christophe〉(1904~12)의 작가 로맹 롤랑(1866~1944)은 국제주의적 인도주의자였다. 마지막으로 알랭 푸르니에(1886~1914)의 〈대장 몬느 Le Grand Meaulnes〉(1913)은 탈출 문학의 대표작으로서 사춘기의 환상적 세계를 그린 자전적·시적 소설이다.
시
프랑시스 잠(1868~1938)과 폴 클로델(1868~1955)은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잠은 전원을 노래하는 데 자유시를 사용했고(〈새벽 미사의 종에서 저녁 미사의 종까지 De l'Angélus de l'aube à l'Angélus du soir〉, 1898), 클로델은 자신의 가톨릭 신앙을 표현하는 데 상징주의적 수법을 사용했다(〈5대 송가 Cinq grandes odes〉, 1899). 안나 드 노아유 백작 부인(1876~1933)은 낭만파의 마지막 시인으로서 삶의 즐거움과 쓰라림을 노래했다(〈헤아릴 수 없는 마음 Le Coeur inombrable〉 1901). 열정적인 시인 샤를 페기(1873~1914)는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조국을 지키기 위해 출정하여 전사했다(〈우리의 조국 Notre patrie〉 1905).
연극
자연주의는 앙리 베크(1823~95)의 희곡을 낳았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까마귀들 Les Corbeaux〉(1882)이다.
1887년에 앙드레 앙투안은 '자유극장'을 창설하여 자연주의 희곡을 상연했다. 이무렵 에드몽 로스탕(1868~1918)은 낭만주의적 표현 양식의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Cyraro de Bergerac〉(1897)를 상연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상징주의는 〈파랑새 L'Oiseau bleu〉(1908)의 작자 모리스 메테를링크(1842~1949)와 〈마리아에게 알림 L'Annonce faite à Marie〉(1912)의 작자 클로델에 의해 프랑스의 연극을 쇄신했다.
문제극의 작가로는 프랑수아 드 퀴렐(〈새로운 우상〉 1895)과 폴 에르비외(〈횃불 경주〉, 1901)가 유명하며, 심리극은 '연애극'의 작자 조르주 드 포르토 리슈에 의해 상연되었다(〈사랑하는 여인 Amoureuse〉, 1891). 이 시대의 많은 희극 작가들 중 몰리에르적 희극미를 보여준 유일한 극작가는 조르주 쿠르틀린(1861~1929)인데, 그의 대표작은 〈부부로슈 Boubouroche〉(1893)이다.
문예비평
제1차 세계대전 전의 비평가로는 장르의 진화를 추구한 페르디낭 브륀티에르(1849~1906), 개인 연구에 뛰어난 에밀 파게(1847~1916), 인상주의의 쥘 르메트르(1853~1914), 상징주의 운동의 위대한 비평가 레미 드 구르몽(1858~1915) 등이 있다.
이 시대에 귀스타브 랑송(1857~1934)은 브륀티에르의 뒤를 이어 문학사의 방법을 확립해 오랫동안 그 권위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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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상징주의 시대에서 제1차 세계대전까지 프랑스 문학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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