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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5. 7. 12, 미국 매사추세츠 밀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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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83. 7. 1, 로스앤젤레스 |
국적 | 미국 |
요약
하나의 완벽한 구조물로서 지면에 직접 세울 수 있는 유일한 대형 돔이며, 구조적 힘이 불충분해진다는 결점을 극복하고 무한대로 크게 지을 수 있는 유일하게 실용적인 종류의 건물인 지오데식 돔을 개발했다. 가장 유명한 지오데식 돔은 몬트리올에서 열린 '엑스포 67'의 미국관이다. 그는 또한 시인이자 철학자로서 전세계적 문제에 대해 이단적인 사상을 지닌 인물로도 유명하다.
풀러는 뉴잉글랜드 비국교도의 유서깊은 집안 출신으로, 2번씩이나 하버드대학교에서 쫓겨났고 정식 교육을 마치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중 미국 해군에 입대해 구난정 소함대의 지휘관으로 복무했다. 특수한 구명장비를 발명한 공을 인정받아 메릴랜드 아나폴리스에 있는 해군사관학교에 임용되었다. 압축 섬유질 블럭을 사용해 규격화된 건물 시스템을 발명한 장인 휼릿과 함께 건설회사를 설립해 이 소재를 사용하여 주택건설을 위한 규격 모듈을 만들었다. 그는 기하학을 이용하여 만들어낸 지오데식 돔을 고안했는데, 그 틀의 전체 하중은 크기에 대한 대수비로 증가한다. 지오데식 돔은 크기에 제한이 없기 때문에 풀러가 제안한 것처럼 도시 전체를 덮는 '천막'으로 쓰일 수 있어, 북극이나 남극처럼 혹독한 지역에서 경제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포괄적인 환경 조절을 가능하게 한다. 수천 가지의 지오데식 돔이 세계 곳곳에 세워졌는데, 가장 잘 알려진 지오데식 돔은 몬트리올에서 열린 '엑스포 67'에서의 미국관이다.
하나의 완벽한 구조물로서 지면에 직접 세울 수 있는 유일한 대형 돔이며, 구조적 힘이 불충분해진다는 결점을 극복하고 무한대로 크게 지을 수 있는 유일하게 실용적인 종류의 건물인 지오데식 돔을 개발했다.
가장 유명한 지오데식 돔은 몬트리올에서 열린 '엑스포 67'의 미국관이다. 그는 또한 시인이자 철학자로서 전세계적 문제에 대해 이단적인 사상을 지닌 인물로도 유명하다.
풀러는 뉴잉글랜드 비국교도의 유서깊은 집안 출신이다. 그 집안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는 선험주의 운동의 기관지인 〈다이얼 The Dial〉의 공동 창간자이자 비평가·교사·문필가이며, 그의 대고모뻘이 되는 마거릿 풀러가 있다.
그는 2번씩이나 하버드대학교에서 쫓겨났고 정식 교육을 마치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중 미국 해군에 입대해 구난정 소함대의 지휘관으로 복무했다. 특수한 구명장비를 발명한 공을 인정받아 메릴랜드 아나폴리스에 있는 해군사관학교에 임용되었다. 1917년 그는 앤 휼릿과 결혼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유명한 건축가·벽화가로 후에 로마의 미국 아카데미 원장이 된 제임스 먼로 휼릿이다. 장인인 휼릿은 압축 섬유질 블럭을 사용해 규격화된 건물 시스템을 발명했으며, 전쟁이 끝나자 두 사람은 함께 건설회사를 설립해 이 소재(후에 셀로텍스 제품 사운덱스로 알려짐)를 사용하여 주택건설을 위한 규격 모듈을 만들었다(조립식 건축). 이 작업중에 풀러는 수백여 채의 주택시공을 직접 감독했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수작업에 의한 건설이 손해막심한 낭비라는 것을 알았다. "이 경험은 수공업적인 건물, 즉 각각의 주택이 다른 곳에는 쓰이지 않는 설계를 위한 하나의 시험적 견본에 그치는 것은 중세에 속하는 예술품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라고 그는 술회했다.
1922년 건설조합인 스토케이트 빌딩 시스템을 세운 직후에 그의 첫 딸 알렉산드라가 4세의 나이로 죽었다.
딸은 연속해서 독감·소아마비·척추뇌막염 등 당시 유행하던 질병으로 고생했는데 풀러는 이런 질병이 만연하게 된 부분적 원인을 부적합한 환경 탓으로 돌렸다. 그는 이러한 부적합성은 무용지물이며, 환경은 인간에게 이롭게 통제하고 '밸브로 조절'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환경을 조절하기 위한 핵심은 포괄적·미래지향적인 디자인이었다. 스토케이드 빌딩 시스템은 1927년 경영난에 부딪혀 소주주였던 풀러는 쫓겨나다시피 했다.
그는 시카고에서 수입도 없이 따돌림당하고 낙담해 곤혹스러워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풀러는 이 시점을 그의 인생에서 '원칙과의 블라인드 데이트'였다고 술회했다. 그는 여생을 바쳐 세계 에너지 자원의 사회적 효용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디자인 유형을 개발하고 종합공업단지를 발전시키는 비영리적인 일에 몰두하기로 결심했다. 발명과 발견, 그리고 뒤이은 경제 전략은 이 목표와 연관된 잠정적인 요소들이었다. 1927년 자신의 포괄적인 전략을 발전시켜나가던 그는 공장이 모여 있고 공기 공급이 가능한 주택을 발명해 선보였다.
후에 다이맥시언(Dymaxion) 주택으로 불린 이 주택은 자체 설비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1928년 그는 완전 자율주택에 필요한 부속물로서 하늘·땅·물에서 모두 쓸 수 있는 교통수단을 연구하다가 1928년에 전방향으로 가동하는 다이맥시언 차의 전형인 육상용 차의 원형을 설계했고 1933년 이를 처음으로 한정 생산했다. 이 자동차는 '최초의 유선형 자동차로 지프처럼 벌판을 가로질러 달릴'수도, 시속 190㎞까지 속력을 낼 수도 있고 차체 길이 내에서 180° 회전이 가능하며, 12명을 태울 수 있는 데다가 가솔린 1l로 12㎞를 갈 수 있었다.
또한 사방에 범퍼가 달려 있어 충돌시 탑승자들을 최대한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 1943년 실업가인 헨리 카이저의 요청에 따라 풀러는 개량된 기술의 장점을 구현한 신형 다이맥시언 차를 개발했다. 이 신형차는 분리된 3개의 공냉식 기관으로 추진되도록 설계했고 각각의 기관은 가변 유체구동장치에 의해 하나씩 바퀴와 연결되었다. 이 연결장치는 최소의 기관 크기로 최대의 토크(torque)를 발생시켰다. 일단 시동시의 관성이 극복되면 하나의 기관만으로도 달리는 속도를 유지했다. 이 차는 가솔린 1l당 평균 17~21㎞를 갈 수 있었고 오염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모든 바퀴의 방향 조절이 가능해 게처럼 옆으로 움직일 수도 있어 자동차 크기만큼의 공간만 있으면 주차할 수 있었다. 1943년형 다이맥시언은 상업적 제품으로 실용화되지 못했는데 급격한 혁신에 대한 자동차업계의 반발 때문이었던 것 같다.
유기체와 금속체의 4면체 격자가 포개져 있는 경우처럼 최소한의 구조로 최대한의 힘을 주는 벡터, 즉 방향성을 가진 힘의 체계가 사실상 있다고 가정한 풀러는 스스로 '에너지 통합 기하'라고 칭한 기하학의 벡터 시스템을 개발했다. 이 시스템의 기본 단위는 4면체(밑면까지 모두 4개의 면을 가진 3각뿔)로, 8면체(8개의 면을 갖는 형태)와 결합해 가장 경제적으로 공간을 채우는 구조를 이룬다.
이 기하학을 이용하여 만들어낸 건축적 소산이 지오데식 돔으로, 그 틀의 전체 하중은 크기에 대한 대수비로 증가한다. 지오데식 돔은 크기에 제한이 없기 때문에 풀러가 제안한 것처럼 도시 전체를 덮는 '천막'으로 쓰일 수 있어, 북극이나 남극처럼 혹독한 지역에서 경제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포괄적인 환경 조절을 가능하게 한다.
수천 가지의 지오데식 돔이 세계 곳곳에 세워졌는데, 가장 잘 알려진 지오데식 돔은 몬트리올에서 열린 '엑스포 67'에서의 미국관이다. 그밖에 세인트루이스 식물원의 열대 식물관과 1958년 루이지애나 배턴루지에 세워진 유니언탱크카회사의 돔이 있다. 유니언탱크카회사의 돔은 건설 당시 스팬이 없는 가장 큰 건축물이었으며 지름 117m, 높이 35m이다.
그밖에 풀러가 발명하고 개발한 것 중에는 모양을 크게 왜곡시키지 않고 지구의 모든 육지를 그릴 수 있는 지도제작법, 금형으로 찍어내는 조립식 욕실, 4면체형으로 된 떠다니는 도시, 지오데식 돔을 덮은 수중농장, 1회용 종이 돔 등이 있다(지도학). 그러나 풀러는 자기 자신을 발명가나 건축가로 생각하지 않았다.
스스로는 자신이 개발한 모든 것들을 세계 전략을 세우는 과정에서 우연히, 또는 부수적으로 생긴 것으로 여겼다. 그의 세계 전략의 목표는 더욱 적은 것으로 더욱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음으로써 세계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이었다(능률). 그는 다음과 같이 쓴 적도 있다. "나는 막대기에 매달린 집을 설계하거나 새로운 형태의 자동차를 만들거나, 새로운 체계의 지도제작법을 발명하고 지오데식 돔 또는 에너지 통합 기하학을 발전시키려고 (이 일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나는 우주로부터 출발했다. 우주는 우리가 겪은 모든 경험과 겪을 수 있는 경험이 지엽적인 것에 불과한 에너지 체계의 조직체이다. 나는 하늘을 나는 슬리퍼 한 켤레로 끝낼 수 있었으면 한다."
그는 정치학이나 정치적 이론을 제외한다면, 포괄적·미래지향적·독창적인 디자인만이 인간의 주거·영양·교통·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그런 디자인을 통해 현재 비효율적으로 사용되는 재료의 한 조각만 가지고도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더욱이 컴퓨터에 저장된 누적 정보의 지시에 따라 더욱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는 미가공 원료를 합성하거나, 상품을 생산·포장하며 전세계 인구가 필요로 하는 물품을 공급할 수 있게 한다.
그는 1959~68년에 카번데일에 있는 서던 일리노이대학교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했다. 1968년에 교수로 임명되었고 1972년에는 대학교수로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1975년에는 명예교수가 되었다. 영국 왕실건축가 협회의 추천을 받아 여왕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건축부문 로열 골드 메달을 받았다. 또한 국립미술문예연구원으로부터 1968년도 골드 메달을 받았으며 1979년에는 미국 아카데미와 미술문예연구원 회원이 되었다.
풀러에 대한 평가
건축가·공학기사·발명가·철학자·저술가·지도제작자·기하학자·미래주의자·교사·시인이었던 풀러는 20세기 후반에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명성을 쌓았다. 그는 아마 '인류가 우주에서 성공하도록 하기 위해' 지구를 토대로 포괄적·장기적인 기술·경제 계획을 개발하려고 시도한 최초의 사람일 것이다.
그는 인류를 우주선에 탑승한 승객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이 승객의 부(富)는 에너지와 정보에 있다고 생각했다. 에너지는 원자나 분자 구조 같은 결합적인 측면과 방사선과 같은 분열적인 측면 등 2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으며, 열역학 제1법칙에 따라 우주의 에너지는 줄어들 수 없다. 한편 정보는 음엔트로피의 성질을 가지므로, 지식·기술·노하우와 같이 끊임없이 증가한다(→ 정보처리).
연구는 연구를 싹트게 하여 각각의 기술적 진보는 세계 공동체의 생산적 부를 증대시킨다. 결과적으로 '우주선 지구'는 그 에너지가 점차적으로 인간에 유익하게 전환되고 그 부가 기하학적으로 증가하는 재생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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