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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

다른 표기 언어 八萬大藏經 동의어 국보 제 32호,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陜川 海印寺 大藏經板, 고려대장경, 高麗大藏經, Tripitaka Koreana

요약 국보 제32호이다. 1011년에 새긴 초조대장경이 1232년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버렸다. 1236년 몽골이 침입하자 불력으로 물리치고자 하는 호국불교적인 의미에서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1251년에 다시 완성하였는데, 이를 재조대장경이라고 한다. 강화도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하다가 1398년 5월에 해인사로 옮겨졌다.
현재 남아 있는 경판은 1,516종 8만 1,258판인데 고려시대에 간행되었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하고,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현존하는 세계의 대장경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고 체재와 내용도 가장 완벽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불교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을 뿐 아니라 고려시대 목판 인쇄술의 발달수준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국보 제52호)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경남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의 내부. 대한민국 국보 제52호이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처음 지은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해인사의 건물 중 가장 오래되었고, 조선 세조 때에 개축되었다. 정면 15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 건물이며, 남쪽의 수다라장과 북쪽의 법보전과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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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32호. 목판본은 1,516종에 6,815권으로 총 8만 1,258매인데 이 가운데 후대에 판각된 15종의 문헌은 보유판(補遺板)이라고 한다.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과 속장경(續藏經)이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된 뒤 1236년(고종 23) 당시의 수도였던 강화에서 시작하여 1251년 9월에 완성되었다. 이 사업은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주관했으며, 제주도·완도·거제도 등에서 나는 산벚나무를 재료로 사용했는데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먼저 나무를 바닷물에 절인 다음 그늘에서 충분히 말려 사용했다.

이 대장경은 조선 초기까지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해인사로 언제 옮겨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현재 1398년(태조 7)에 옮겼을 것이라는 학설이 가장 유력하며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이때 2,000명의 군인들이 호송하고, 5교양종(五敎兩宗)의 승려들이 독경(讀經)했다"라고 한다.

이것은 현존하는 세계의 대장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체재와 내용도 가장 완벽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보관함의 순서는 천자문 순서대로 배열했으며, 오자(誤字)와 탈자(脫字)가 거의 없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색에 의해서 그 내용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첫째, 인류 최초의 한문대장경인 송나라 관판대장경(官板大藏經)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며, 현재 전하지 않는 거란판대장경(契丹板大藏經)의 내용을 짐작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특히 〈대승법계무차별론 大乘法界無差別論〉 권1은 어느 대장경에서도 볼 수 없다.

둘째, 사전류의 저술들이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법원주림 法苑珠林〉·〈일체경음의 一切經音義〉·〈속일체경음의 續一切經音義〉 등 중요한 전적과 〈대승보살정법경 大乘菩薩正法經〉·〈제법집요경 諸法集要經〉 등 중요한 대승경론이 포함되어 있다. 셋째, 자체(字體)의 예술성이다. 하나의 목판에 대략 가로 23행, 세로 14행으로 310자 내외를 새겼는데 그 정교한 판각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조선의 명필인 한석봉은 이를 두고 "육필(肉筆)이 아니라 신필(神筆)이다"라고 경탄했다. 이 팔만대장경은 뒤에 5차례나 간행·유포되었다는 역사기록이 있는데 고려말에 이색(李穡)이 인출한 대장경 1부가 여주 신륵사에 봉안되어 있으며, 조선 초기까지 왜구들이 빈번하게 침략해와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대장경판을 요구했는데 1389~1509년에 83차례나 요구했지만 대부분 거절하고 간혹 인본(印本)을 주었다고 하며, 1410년(태종 10) 경기도 황해도 충청도 관찰사에게 도내에서 생산되는 인경지(印經紙) 267묶음을 해인사로 보내 인경(印經)하도록 명했으며, 세조는 신미(信眉)·수미(守眉)·학열(學悅) 등으로 하여금 해인사 대장경 50부를 인출하여 각 도의 명산 거찰에 나누어 봉안하도록 했으며, 1898년 용악(聳岳)이 4부를 인출하여 통도사·해인사·송광사 등에 1부씩 봉안했다.

고려 중반부터 장경도량(藏經道場)이라는 이름으로 봄·가을에 6, 7일씩 거의 정기적으로 법회를 열었으며, 현재 해인사에서는 1년에 1번씩 대장경판을 머리에 이고 탑 주위를 도는 행사를 하고 있다.

팔만대장경의 특수성은 첫째, 사상적인 것으로 국토가 유린된 상황에서 이 커다란 불사(佛事)를 통해 경전을 수호한 호법적(護法的) 성격을 띠었다는 것이다(호국신앙). 이규보(李奎報)의 〈군신기고문 君臣祈告文〉은 이 대장경조조의 사상적 의의를 천명한 글로 몽골을 야만시하고 문화적 긍지를 드러내고 있다.

둘째, 경제적인 것으로 대장경의 역사(役事)에 대한 막대한 경비를 정부가 부담하므로 국민에 대한 재투자적인 면이 고려되었다는 것이다. 셋째, 내용적인 것으로 과학적인 배열과 엄격한 자료수집으로 정평이 나 있는 것이다. 고려대장경 이후에 편집된 중국판 빙가장경, 일본판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 등은 모두 이것을 모본으로 하여 판각된 것이다. 즉 이 팔만대장경은 현존하는 한문대장경의 완벽한 '연원'이라고 할 수 있다.

1976년 동국대학교에서는 팔만대장경의 원본을 영인 축소하여 영인본 47권과 전대장경에 대한 내용·주소(註疏)·번역자·연구서 등을 상술한 해제 색인본 1권을 합쳐서 총 48권을 간행했다.

또한 1967년부터 이 한문본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한글판 대장경을 간행하고 있는데 현재 120권이 출판되었다.→ 고려대장경, 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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