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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크리소스토모스

다른 표기 언어 Ioannis Chrysostomos
요약 테이블
출생 347경, 시리아 안티오키아
사망 407. 9. 14, 헬레노폰투스 코마나
국적 로마

요약 축일은 서방교회 9월 13일, 동방교회 11월 13일. 초기교회 교부, 성서해석가,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
(영). Saint John Chrysostom.

개요

주로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열정적이고 명쾌한 설교를 함으로써 그리스어로 '황금 입'이라는 뜻의 별명을 얻었다(교부문학). 대주교로 있을 때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냈고, 유배지에서 죽었다.

438년 유골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되돌아왔으며, 훗날 교회학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초기생애

고급장교의 아들로 태어나 미망인이 된 어머니 밑에서 그리스도교도로 양육받았고, 어머니의 뜻에 따라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유명한 이교 수사학자 리바니오스에게 배웠다.

그러나 신학도 함께 공부했으며, 오래지 않아 직업을 버리고 은둔수사가 되었으나, 이 생활에서도 보람을 얻지 못했다. 건강이 나빠진 채 안티오키아로 돌아와 부제와 사제로 임명되었다. 386년부터 12년 동안 사목한 끝에 위대한 설교가로 성장했고, 제1·4복음서, 사도 바울로의 8개의 편지에 대한 설교를 남겼다.

이 기간에 많은 물의를 일으킨 사건은 387년의 폭동이었는데, 안티오키아 시민들은 황제들의 상(像)을 경멸했고 당국으로부터 보복위협을 당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는 〈조상(彫像)들에 관하여 On the Statues〉라는 유명한 설교를 하던 중 청중들로 하여금 사순절과 그들이 처해 있던 위험한 상황에 맞는 마음가짐을 갖도록 했다. 그는 설교가로서 얻은 명성을 재확인했다.

명쾌한 해석과 도덕적인 가르침은 보편성을 띠고 있고, 설교에 사용하는 언어들은 예나 지금이나 독자들에게 강한 감명을 주었으며, 재담들은 옛날 안티오키아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회중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사람들에게도 웃음을 자아낸다. 초기 교부들 가운데는 여러 명이 부의 오용을 비판했고, 개인 재산은 엄격히 말해 개인의 것이 아니라 위탁된 것이라고 가르쳤으며, 적정한 필요를 넘어서는 여분의 재산은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만큼 설득력 있는 웅변으로 구제(救濟)를 거듭 강조한 사람은 없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

398년 내키지 않는 가운데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로 초빙되었다.

그곳에서 민중에게 커다란 지지를 얻었지만, 부의 남용을 신랄하게 비판함으로써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분노를 샀다. 동로마 제국 황제 아르카디우스의 아내 에우독시아와 경쟁교구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인 유력한 테오필루스를 중심으로 요한 크리소스토모스에 반대하는 몰염치한 동맹이 결성되었다. 403년 테오필루스는 보스포루스 강 건너편 오크 궁에서 요한 크리소스토모스에게 반감을 갖고 있거나 자기에게 굴종하는 시리아와 이집트 주교들을 대상으로 교회회의를 소집했다.

이 모임은 수많은 죄목으로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를 고소했는데, 이 가운데 대부분은 하찮거나 성가신 것들이었다. 이 교회회의는 요한 크리소스토모스가 출두하기를 거부하자 그를 단죄한 뒤 대주교직을 폐위한다고 공포했다. 그러자 황제 아르카디우스는 그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추방했고, 한때 다시 불렀으나, 다음 해에 최종적으로 다시 추방했다. 그는 아르메니아의 쿠쿠수스에서 연금당한 채 살았다.

로마의 주교인 교황 인노첸시오 1세에게 호소하자 인노첸시오는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의 도움을 받아 개입을 시도했으나, 요한 크리소스토모스의 정적들 때문에 무위로 돌아갔다.

크로소스토무스는 유배지에 있는 동안 자기를 지지하는 사람들과의 편지를 통해 생생히 의사소통을 유지할 수 있으며 아직도 자신의 진영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머지않아 자신이 더욱 멀리 떨어진 흑해 동편 끝으로 이송될 것이라는 소식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부터 받았다.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는 기진맥진하여 여행을 견디지 못하고서 죽었다.

약 31년 뒤 공식적인 명예회복을 받은 뒤 그의 유골은 코마나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졌고, 당시의 대주교 프로클루스, 아르카디우스와 에우독시아의 아들이자 황제인 테오도시우스 2세가 그 유골을 엄숙히 받아들였다.

중요성과 저서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는 뛰어난 신학자나 신학 저자가 아니었으므로 그리스도교의 신학사에 있어서 언급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뛰어난 웅변가였다. 설교를 할 때 비유보다는 평이한 말을 사용했고, 성서의 뜻을 깊이 통찰함과 동시에 그 뜻을 적용하는 데 뛰어났다. 그의 설교에는 도덕적·사회적 교훈이 담겨 있다. 저서들은 성서에 관한 수많은 설교들과 그외 설교들, 논문 몇 편, 편지들로 구성된다.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그의 저서 모음은 J.P. 미뉴의 〈교부 교훈전집 Patrologiae Cursus Completus〉(47~64권)에 실려 있으며, 이 본문은 사실상 베르나르 드 몽포콩의 것이다.

동방정교회의 3가지 성찬예배 가운데 가장 자주 쓰이는 것을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성찬예배'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가 이 전례와 관계가 있다는 증거는 확실하지 않다. 영국성공회의 〈성공회 기도서 The Book of Common Prayer〉에 실린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의 기도는 이 전례에서 따온 것이며, 이런 이유에서 기도문의 이름이 그렇게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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