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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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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94경, 영국령 동아프리카 이차웨리
사망 1978. 8. 22, 케냐 몸바사
국적 케냐

요약 케냐의 초대 총리(1963~64)와 대통령(1964~78)을 역임했다. 케냐타는 동아프리카 고원지대의 케냐 산 남서쪽에 있는 이차웨리에서 응겡기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당시 그의 이름은 카마우였다. 키쿠유족의 다른 소년들과 마찬가지로 카마우도 사냥술, 세밀한 관찰법, 기억력 훈련, 사회적 의무와 책임, 가문과 부족의 역사를 배웠다. 1914년 8월 존스턴 카마우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그는 자신의 문화권을 벗어나 더넓은 세계로 뛰어든 최초의 키쿠유족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카마우도 나이로비의 개화된 생활을 찾아 선교소를 떠났다. 나이로비에서 공공사업국의 사무원으로 일하게 되어 제1차 세계대전중에는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했다. 이때부터 케냐타를 자신의 이름으로 사용했는데 이것은 그가 즐겨 사용했던 장식 벨트를 의미하는 키쿠유어였다. 1921년 케냐에서 최초의 아프리카인 정치운동이 백인 정부에 저항하여 발생하자 케냐타도 이듬해 이에 가담했다. 1928년 5월 케냐타는 키쿠유어로 발행되는 월간신문 〈규합자〉를 창간하여 키쿠유인의 모든 계급으로부터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1947년 케냐 아프리카 연맹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63년 5월 KANU는 사전독립선거에서 승리하여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같은 해 12월 12일 케냐타는 독립된 케냐에서 총리로 임명되었다. 1년 뒤 케냐타는 새 헌법개정안에 따라 케냐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케냐타(Jomo Kenyatta)

ⓒ wikipedia | CC BY-SA 3.0 nl

개요

케냐의 초대 총리(1963~64)와 대통령(1964~78)을 역임했다.

초기생애

케냐타는 동아프리카 고원지대의 케냐 산 남서쪽에 있는 이차웨리에서 응겡기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당시 그의 이름은 카마우였다.

그의 아버지는 작은 농촌마을의 지도자였고 할아버지는 의술이나 마술에 정통한 예언자(murogi)였다. 키쿠유족의 다른 소년들과 마찬가지로 카마우도 사냥술, 세밀한 관찰법, 기억력 훈련, 사회적 의무와 책임, 가문과 부족의 역사를 배웠다. 그는 할아버지로부터 약초 사용법 및 예언가의 능력과 영적인 지식에 관해 알게 되었다. 10세쯤 되었을 때 카마우는 모래벼룩이 옮기는 전염병에 걸려 양발과 한쪽 다리를 심하게 앓았으나 스코틀랜드 선교사들이 새로 설립한 교회에서 수술을 받은 후 완쾌되었다.

이때 카마우는 유럽인을 처음 보았다. 회복되는 동안 자신이 본 모든 것에 매료되어 집을 뛰쳐나온 뒤 기숙학생으로 선교소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성서·목공·영어·수학을 공부했고 그 배움의 대가로 유럽 이주민을 위해 집안일이나 요리를 해주었다. 1914년 8월 존스턴 카마우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그는 자신의 문화권을 벗어나 더넓은 세계로 뛰어든 최초의 키쿠유족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카마우도 나이로비의 개화된 생활을 찾아 선교소를 떠났다. 나이로비에서 공공사업국의 사무원으로 일하게 되어 제1차 세계대전중에는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했다. 이때부터 케냐타를 자신의 이름으로 사용했는데 이것은 그가 즐겨 사용했던 장식 벨트를 의미하는 키쿠유어였다. 고등법원에서 통역관으로 잠시 근무하다가 나이로비 시의회 직원으로 전근되었고 결혼도 했다.

그의 동생에 의하면 이무렵에 케냐타는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1921년 케냐에서 최초의 아프리카인 정치운동이 백인 정부에 저항하여 발생하자 케냐타도 이듬해 이에 가담했다(대영제국). 키쿠유족 청년 H. 투쿠가 아프리카 협회를 주축으로 벌인 이 운동의 목적에는 1920년 케냐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빼앗긴 키쿠유족의 땅을 회복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영국의 식민통치 아래 아프리카인의 토지는 몰수당했으며 토지의 임차권은 백인 이주민에게만 허용되었고 원주민의 거주지역이 별도로 지정되었다. 1922년 3월 투쿠가 체포되어 국외로 추방된 이후 공공연한 항쟁행위는 잠잠해졌다. 공무원으로 정치활동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케냐타는 동아프리카 연합(East Africa Association/EAA) 선전담당 사무관이 되어 비밀리에 활동을 계속했다. 1925년 EAA가 정부의 탄압을 받아 해체된 후 케냐타는 키쿠유 중앙연합(Kikuyu Central Association/KCA)라는 이름으로 조직을 재결성하는 데 참여했다.

1928년에는 KCA의 사무총장이 되었으며 이때 공무원생활을 청산했다.

정치활동

1928년 5월 케냐타는 키쿠유어로 발행되는 월간신문 〈규합자 Mwigithania〉를 창간하여 키쿠유인의 모든 계급으로부터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이 신문은 온건한 논조로 자기개선을 주장했으므로 영국정부도 이를 묵인했다. 그러나 아프리카인은 새로운 난관에 직면했다. 즉 영국정부의 위원회가 동아프리카에 있는 케냐·우간다·탕가니카 등 3개 보호령을 보다 긴밀하게 연합시키는 의견을 제안했다. 자치정부의 수립을 기대한 백인 이주민 지도자들은 이 제안을 지지했다. 그러나 KCA는 이것이 키쿠유족에게 재난을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1929년 2월 케냐타는 이 정책을 반대하기 위해 런던으로 갔다.

런던에서 케냐타는 영국의 식민장관을 만나는 데 실패했지만 식민주의 정책을 비판하는 단체, 특히 반제국주의 연맹의 도움을 받아 1929년 8~10월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이듬해 7월에는 함부르크에서 개최된 국제 흑인노동자 회의에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대부분 피착취계급인 전세계의 흑인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을 촉구했지만, 케냐타의 유일한 관심은 억압받고 있는 키쿠유족의 고통에 있었다. 1930년 3월 26일 케냐타는 설득력 있는 글을 런던 〈타임스 The Times〉에 기고하여 KCA가 주장하는 5개 사항, 즉 ① 아프리카인의 토지소유권 보호와 유럽인 이주민들에게 할당된 토지의 반환, ② 교육시설의 증대, ③ 여성들에 대한 가옥세 철폐, ④ 아프리카인의 의회진출 허용, ⑤ 전통적 관습에 대한 불간섭을 피력했다.

케냐타는 이러한 요구들이 실현되지 않는다면 정상인이면 누구나 피하고 싶어하는 "위험한 폭동사태가 필연적으로 야기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31년 영국 자유당원의 도움을 받아 하원에 출석한 그는 동아프리카 3개 식민지 연합정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영국정부는 이 정책의 실시를 일시적으로 유보했으며 1932년 케냐타는 카터 토지위원회가 개최하는 청문회에 출석하여 키쿠유족의 토지소유권 문제를 증언했다.

카터 토지위원회는 키쿠유족이 빼앗긴 일부 토지에 대해 보상할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영국은 계속 거주지역분리정책을 실시하여 백인만이 고지대에서 살 수 있게 했으며, 키쿠유족의 거주는 인구가 과밀된 보호구역으로 제한했다. 케냐타는 다시 소련을 방문하여 모스크바대학교에서 2년간 공부한 뒤 유럽 전역을 여행했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 그는 음성학에 관한 정보를 런던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연구원들에게 제공했다. 런던경제대학의 브로니수아프 말리노프스키 교수 밑에서 인류학을 공부했으며, 그의 논문은 수정되어 1938년 〈케냐 산을 마주보며 Facing Mount Kenya〉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통찰력과 낭만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키쿠유족의 전통생활을 연구한 이 논문에서 그는 키쿠유족이 유럽 문화에 광범위하게 적응해왔다는 사실은 무시하고 이미 파괴된 전통적 생활양식을 옹호했다. 이 책의 출판 당시 사용한 조모('불타는 창'이라는 뜻) 케냐타라는 필명이 이후 그의 공식 이름이 되었다.

1930년대에 그는 잠시 공산당에 가담했고 흑인 민족주의자나 작가와 교류했으며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에 반대하여 항의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KCA는 위험단체로 간주되어 활동이 금지되었고, 케냐타는 일시적으로 KCA로부터 물러났다. 영국에서는 노동자교육협회에서 강의하고 농장노무자로 일하면서 생계를 해결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키쿠유족의 주장을 담은 홍보책자를 발간했다. 그는 제5차 범아프리카 회의를 조직하는 데 참여했다.

1945년 10월 15~18일 맨체스터에서 개최된 이 회의의 의장은 미국의 W.E. B. 두 보이스였고, 후에 가나의 자도자가 된 K. 은크루마도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대중 민족주의 운동을 통해 아프리카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방안과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케냐로의 귀국

1946년 9월 새로이 결성된 케냐 아프리카 연맹을 이끌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온 케냐타는 1947년 6월에 연맹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국립교육기관을 대체할 목적으로 설립된 케냐 아프리카 사범대학을 기반으로 대중민족당을 조직했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가시적인 성과를 제시해야 했으나 케냐의 식민정부는 여전히 강경한 백인 이주민의 이익에 봉사하고 있었다. 1930년에 그가 예측했던 '위험한 폭동사태'는 1952년 마우마우 반란으로 나타났다. 1952년 10월 21일 경찰은 가툰두에 있는 자택에서 케냐타를 체포하고 증거서류들을 압수했으며, 98명의 다른 아프리카인 지도자들도 구속했다.

형사사건으로 처리하려는 케냐 당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케냐타의 재판은 정치적 소송절차를 밟아 처리되었다. 1953년 4월 케냐타는 마우마우 테러 조직을 지휘한 죄로 7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케냐 아프리카 연맹의 정치활동과 마우마우 폭력사태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역설했다.

영국 정부는 아프리카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케냐를 점차 아프리카인들의 다수집권당체제로 전환시켰다.

1960년 1인1표원칙이 채택되었다. 톰 음보야와 오깅가 오딩가와 같은 케냐의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케냐 아프리카 민족연합(Kenya African National Union/KANU)을 조직하고, 케냐타를 의장으로 선출했다. 당시 케냐타는 형기가 만료되었지만 여전히 구금상태에 있었으며, KANU는 케냐타가 감금되어 있는 한 영국 정부와 협상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케냐타는 한 기자회견에서 "만약 유럽인들이 평범한 시민으로서 케냐에서 머물고자 한다면 그들의 생활은 앞으로도 보장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케냐타는 1961년 8월 석방되어 1962년초 런던 회의에서 케냐의 독립을 가져오게 될 헌법조항을 놓고 협상을 벌였다. 1963년 5월 KANU는 사전독립선거에서 승리하여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같은 해 12월 12일 케냐타는 독립된 케냐에서 총리로 임명되었다.

1년 뒤 케냐는 야당의 자발적 해체로 1당체제의 공화국이 되었고, 그 해에 케냐타는 새 헌법개정안에 따라 케냐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 집무기간중 그는 강력한 중앙정부를 이끌었으며, 그가 판단하기에 공공질서를 위태롭게 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나 정적들을 체포·구금할 수 있는 헌법개정안들을 채택하여 이를 효과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그의 권한을 강화시켰다.

또한 케냐타는 특정 종족에 기반을 둔 반대세력이 형성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그의 정부에 다양한 종족 출신의 인사들을 등용했다. 그가 가장 많이 의존했던 부족은 그의 동족인 키쿠유족이었다. 이데올로기적 차이와 부족간의 경쟁심리 때문에 KANU 정치지도층 내부에 종종 분쟁이 발생했지만, 일반적으로 케냐는 케냐타의 통치기간중 괄목할 만한 정치적 안정성을 보여주었다.

소유권의 국유화를 부르짖는 사회주의자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대신에 개인과 기업인의 노력에 역점을 둔 케냐타의 정책은 '힘을 내자'(Harambee) 또는 '협력하자'(Pulling Together) 등과 같은 구호로 대변된다.

그는 자유시장경제에 치중했을 뿐만 아니라 서유럽 및 외국 국가들의 투자 유치에도 힘썼다. 그의 정책은 1971~81년 케냐의 국민총생산(GNP)을 거의 5배 정도 증가시켰고, 독립 후 20년 동안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경제성장이 대다수 국민들에게 혜택을 가져다준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엄청난 부의 불균형을 가져왔다.

막대한 부의 대부분이 케냐타의 가족과 측근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극에 달한 높은 비율의 인구성장과 부의 집중은 케냐 국민들에게 케냐타의 집권기간중 그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게 했다. 외교정책면에서 케냐타 정부는 서방과의 우호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했다. 한때 영국 정부에 의해 투옥되기도 했지만 그는 항상 친영국적인 아프리카 지도자로서 처신했으며, 케냐를 블랙아프리카 국가 중에서 가장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활기찬 국가로 만들었다.

1978년 몸바사에서 그가 죽자 다니엘 아라프 모이가 그의 뒤를 이었다. 다니엘 아라프 모이는 케냐타의 정책 대부분을 그대로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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