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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1. 10, 동아프리카 보호령 사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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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94. 1. 20, 케냐 키수무 |
국적 | 케냐 |
요약 케냐 독립운동의 대부인 조모 케냐타와의 오랜 연합을 깨고 급진적인 야당을 만든 민족주의 지도자.
다른 많은 동아프리카의 저명한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마케레레대학교에서 공부했고, 본직업은 교사였다. 1957년에 입법위원회 내의 아프리카인 위원협회의 의장이 되었고, 2년 후 원내 케냐 독립운동회의 회장이 되었다. 그는 톰 음보야와 함께 1950년대 후반에 제시된 다민족 정치대의제라는 영국의 정책을 철저히 반대하는 소수의 아프리카인 위원 중 한 사람이었다.
1960년에 신생 정당인 케냐 아프리카 민족연합(Kenya African National Union/KANU)의 당헌 제정위원회 위원으로서 신당(新黨)의 부총재가 되었다. 한편 그는 1950년대 초반 마우마우 반란사건 여파로 조모 케냐타가 수감되어 있을 당시 민족주의 지도자로 케냐타의 이름을 계속해서 내세웠다.
오딩가는 1963년에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그해 12월 케냐가 독립하자 내무부 장관(1963~64)이 되었고, 그후 부통령, 무임소 장관을 지냈다. 그러나 그는 1965, 1966년에 케냐 아프리카 민족연합과 케냐타로부터 떨어져나와 좌익 야당인 케냐 인민연합(KPU)을 결성했다. 그러나 1969년 KPU는 케냐타에 의해 불법단체로 지목되어 오딩가와 동료들은 정부에 의해 구금되었다.
그는 1971년 석방되자 다시 KANU에 가담했다. 케냐타는 1974년 오딩가를 총선에 출마하지 못하도록 했으나 그는 1975년 지구당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977년 짧은 기간 동안 다시 구금되었다. 케냐타의 후계자들은 케냐타의 사후(1978)에도 계속하여 오딩가가 정치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철저히 막았다. 그는 1979년 국가목화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으나, 1981년에 다시 피선거권을 박탈당했다. 그는 끊임없이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신랄한 반대를 계속했으며, 1982년에 KANU로부터 축출되어 그해 11월 가택연금을 당했다.
그는 1982년 8월에 시도되었던 쿠데타를 지원했다는 소문에도 불구하고 1년 후에 석방되었다. 〈자유는 아직까지 Not Yet Uhuru〉를 포함한 오딩가의 저서가 1967년에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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