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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슨의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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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잡문에 덧붙여 존슨은 셰익스피어로 관심을 돌렸다.

1745년 그는 자신이 편집할 희곡집의 예비 설명과 더불어 〈맥베스 고찰 Miscellaneous Observations on the Tragedy of Macbeth〉을 출판했으나, 영어사전을 편찬해달라는 제안을 받자 셰익스피어 작품에는 더이상 관심을 기울일 수 없었다. 서적상 조합이 그러한 거대한 사업을 위해 존슨을 선택했다는 것은 런던에 9년 있는 동안 그가 담당했던 역할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뜻이다. 같은 시기 내내 데이비드 개릭은 좀더 빠르고 화려한 출세를 했다. 무대를 위해 법률을 버린 그는 1741년 배우로서 재능을 인정받았고 1747년에 드루어리 레인 극장의 경영자가 되었다.

개릭이 경영하던 때 첫 연극의 서막을 존슨이 썼고, 비록 존슨이 보통 배우나 그 직업에 대해 경멸투로 이야기하긴 했으나 우정을 위해 그들의 입장을 기꺼이 옹호했다. 더욱이 이때 존슨은 연극 공연에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을 때였다. 그는 비극 〈아이린〉을 출판하거나 상연할 사람을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개릭이 힘을 갖게 되자 옛 스승을 위해 최선을 다하리라 생각했고 〈아이린〉은 1749년 '동양의 위엄을 보이며' 9일 밤 내내 공연되었다.

근본적으로 도덕군자의 극이었던 이 작품은 보편적으로 칭찬을 받긴 했으나 결코 재공연된 적은 없다.

좀더 오래 지속된 것은 2번째 교훈시 〈헛된 소망 The Vanity of Human Wishes〉(1749)인데 이 작품은 갈릴레오, 울지, 스웨덴의 카를 12세 등의 일생을 보여줌으로써 정치적 야심의 위험, 군사적 정복의 무위성, 글쓰기의 고통을 드러냈다.

출판 당시에는 〈헛된 소망〉이 〈런던〉보다 훨씬 덜 팔렸으나 〈헛된 소망〉이야말로 그의 걸작 시였다. 이 시의 양식은 그당시에 유행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고대뿐 아니라 현대의 학자·철학자·정치가·국왕 등의 진술을 다양하게 그려낸 점이 '고상한 진지함'을 불러일으켜 시에 보편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환멸의 기록만이 시의 목적은 아니다. "가련한 자는 남모르게 주저앉아 운명의 소용돌이를 따라야만 하는가?" 그것은 결코 아니었다. 사람은 그리스도교도의 사랑과 희생과 믿음을 간구해야만 한다고 존슨은 말하고 있다.

1746년 〈영어사전 A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의 계약이 체결되었고, 다음해 존슨은 〈영어사전 계획서 Plan of a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를 출판했다.

그는 서적상들의 제의에 어떤 불평도 하지 않았으나 그것만으로 그를 가두어놓을 수는 없었다. 1750년 그는 1주일에 2회 발행되는 〈램블러 The Rambler〉지에 착수했다. 익명의 수필 1편이 담긴 2페니짜리 〈램블러〉는 존슨의 문학접근방식을 평가하려 한다면 근본적으로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하는 글이다.

이 작업에 착수하기 전 그는 신의 영광과 자신이나 타인의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간단히 말해 만담가라는 의미의 '램블러'는 흥행사가 아니라 교육자여서 19세기의 비평가들은 그의 글을 평신도의 설교라고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존슨은 그의 첫 클럽인 아이비 레인 클럽을 만든 그즈음 술집 의자에 앉아 스스로 '말하는 즐거움'이라고 부른 것에 지대하게 공헌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쇄물은 '좀더 정확한 생각과 좀더 다듬어진 아름다움'을 요구했다. 말이란 당연히 상대방을 이기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인쇄된 낱말에는 도덕가의 책임이 따른다. 세상을 개선시키는 것을 작가의 의무로 보는 것이 바로 존슨의 문학적 신념 중 기본적인 항목이다. 이 책임감이 수필의 문체를 결정했다. 그는 에디슨이나 스틸이 〈스펙테이터 The Spectator〉에서 그려낸 로저 드 코벌리 경과 같은 인물을 창조하지 못했고, 그의 글들은 당대의 사건이나 문학과 거의 관련이 없었다. 반면 그의 글에는 자주 당대의 사회적·문학적 상황들이 반영되어 있다. 그 안에는 대가나 지나치게 가정적인 부인에 대한 경멸, 매춘부 생활에 대한 객관적인 묘사, 강도에게 사형을 내리는 것에 대한 격렬한 저항이 나타나 있으며, 언론인의 운명을 음산한 유머로 그린 것도 불가피한 일이다.

더욱이 그것들은 인간의 좌절과 폐쇄된 의지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준다. 최근에 지적되고 있듯이 존슨의 작품은 똑같은 언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20세기 이전의 프로이트 이론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

〈램블러〉는 1750~52년에 걸쳐 1주일에 2번 발행되었다. 마지막 호가 나오고 며칠 후 아내가 죽자 존슨의 고질적인 우울증이 더욱 깊어졌다. 그의 결혼생활은 추측에 맡길 수밖에 없다. 일찍이 런던에 살던 때 존슨의 친구 중 누구도 존슨 부인을 만난 적이 없었던 것 같고 그녀에 대해 별다른 언급이 없었으나, 상호 존중과 애정에 근거한 결혼생활이었음이 분명한 것으로 여겨진다.

처음부터 존슨 부인은 남편의 언변을 소중하게 생각했고 〈램블러〉에 대해 특별한 존중심을 가지고 있었다. 존슨 편에서도 그녀의 합리적인 희극 독법을 높이 샀다. 그러나 가정적으로 두 사람은 잘 맞지 않았다. 존슨은 가사에 부주의하고 정리정돈을 못했으면서 음식에 대해서는 까다로웠다. 좀더 심각한 점은 말년에 존슨 부인이 술과 약물에 중독되어 남편의 신체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점이다. 존슨의 기도나 그녀의 죽음에 대한 명상 등을 살펴보면 이러한 내용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슨의 애정은 다소 연민의 정을 띠면서 변함없이 남아 있었다. 1753년 4월 22일 "사랑하는 테티의 기억을 잊지 않으면서 새로운 아내를 찾으려고 애쓰자"라고 쓴 글이 발견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변치 않는 애정은 여전했다. 새 아내를 구하는 그의 탐색이 누구를 향하고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나중에 그가 경험에 대한 희망의 승리라고 표현했던 모험을 생각했다는 점은 흥미롭다. 존슨은 30년 후 브롬리 교구 교회의 묘비 위에 테티를 "아름답고, 우아하고, 영리하고, 경건한 여인"이라고 표현했다. 그가 말했던 묘비명을 쓰는 데 있어 굳이 진실을 서약할 필요는 없다.

1752년 존슨은 외로웠으나 몇 명의 좋은 친구를 사귀었다.

아이비 레인 클럽에서 그는 "자유롭고 편안한 감정적 교류를 나누면서 몇 시간씩 즐겁게 보냈는데, 그렇지 않았더라면 집에서 고통스러운 회상에 빠져 있었을 것"이었다. 10명의 회원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존슨의 전기작가인 존 호킨스, 존슨도 몇 편의 글을 기고한 〈어드벤처러 The Adventurer〉의 편집자 존 호크스워스, 어린 날의 친구로 그의 장례식까지 참석한 존 라이랜드, 〈램블러〉의 발행인 존 페인, 존슨이 가장 사랑했던 의사 리처드 배서스트 등이 있었다.

1747년 존슨은 〈영어사전 계획서〉를 출판했다.

작가이며 서적상인 로버트 도즐리의 제안에 따라 그 책은 체스터필드 경에게 헌정되었다. 처음에 체스터필드는 약간 관심을 보이며 몇 가지 수정안도 제시했으나 더이상 그 일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존슨으로서는 기분이 좋았을 리 없었고 이것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1753년 4월 〈사전〉의 제2권에 착수했고 서문, 문법·역사도 써야 했다. 2년 후 작업은 끝났다. 존슨과 그의 서기들이 그 일을 하는 데 모두 8년 반이 걸렸으며, 〈옥스퍼드 영어사전 Oxford English Dictionary〉의 편집장인 제임스 머리 경의 표현대로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사전은 그 양이나 어휘의 정확성뿐 아니라 문학적 인용에 이르기까지 먼저 출간된 사전들을 단연 능가했다. 사실 그 사전의 4만 단어는 그 전의 너새니얼 베일리의 사전의 어휘보다는 적었다. 그러나 존슨의 작업이 두드러진 점은 어떤 단어가 갖는 다양한 의미의 여운을 예증할 만한 인용문이 많다는 것이다. 서문에서 밝혔듯이 그는 "작가들은 열심히 정독하여…… 더할 나위 없이 어떤 단어나 구절을 확인 또는 예시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베이컨의 〈수상록 Essays〉, 사우스의 〈설교집 Sermons〉 등의 책들이 존슨의 인용으로 되살아났다. 존슨의 조수들은 개별 쪽지에 인용문을 베껴 적고 이것들을 존슨 자신의 단어 정의 아래에 붙여두었다. 처음에 존슨은 잡다한 문헌을 열심히 뒤져보고 북유럽의 학문이 지니는 모호하고 은밀한 의미까지도 샅샅이 뒤져볼 시간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곧 이것이 '결국 사전 편찬자를 부추기게 되는 시인의 막연한 꿈'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옮겨 쓰는 일이 지루했을 뿐 아니라 삭제해야 할 고통도 있었고, 작업의 실무적인 면에서도 한계가 있었던 존슨은 그 불완전성을 아주 예리하게 자각했다. 그의 철자법은 논쟁의 여지가 있었으며 어원 역시 불확실했다. 심지어 사전 출판을 서두르는 바람에 어떤 단어들은 그의 말대로 겨우 싹이 트는 정도였고, 또 어떤 단어들은 갑자기 사라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 자신이 서문에서 말했듯이 〈영어사전〉은 "학자들의 도움도 거의 없고 뛰어난 사람들의 후원도 전혀 없이, 편안히 은둔한 상태나 학원의 보금자리에서가 아니라, 불편과 혼돈의 와중에 병약함과 슬픔 가운데에서" 씌어진 명저였다.

오늘날 평범한 독자들은 몇 가지 '거친 실수', '우스운 불합리성', 예를 들어 '귀리'를 '영국에서는 흔히 말에게 주지만 스코틀랜드에서는 사람이 먹는 곡물'이라고 정의하는 데에서 보이는 솔직한 개인적 편견 등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존슨의 세심한 정의와 영국문학에서 언어학적 용례들로 선배들의 사전을 풍부히 만든 것은 사전편찬사의 영원한 기념이 될 것이다.

〈사전〉의 표지에 존슨은 자랑스럽게 옥스퍼드대학교 문학석사라고 표기했는데, 이것은 그의 글의 종교적·도덕적 가치를 고려해서 수여된 것이다. 간단히 말해 '만담가'에게 학위가 수여된 셈이다. 〈사전〉에 대한 반응은 우호적이었고 '외쳐봤자 곧 그 소리가 공중에서 흩어지고 더이상 고려의 여지가 없는 시정의 잡담가'들만이 반대 의견을 나타냈다. 그러나 작품이 나오기 직전 〈월드 World〉에 실린 2편의 글에서 체스터필드 경은 자신의 소홀한 태도를 바꿔 존슨을 최고의 영어 사전 편찬가라고 칭찬했다.

이에 대해 존슨은 유명한 편지로 답했다. "당신이 나의 노고에 대해 표해주었던 말들을 좀더 일찍 했더라면 친절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너무 늦어서 나는 그 말에 전혀 관심이 없고 즐겁지도 않다. 고독하기 때문에 그 말을 나눌 수도 없다. 게다가 이미 유명해져서 그 말을 원치도 않는다."

존슨은 곧 〈사전〉을 축약하는 일에 착수했다.

사전편찬가로서 명성을 얻었다고는 하지만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1756년 3월 그는 5파운드 18페니 때문에 체포되었다. 당연히 인쇄업자들에게 도움을 부탁했겠지만 그들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인쇄업자 겸 소설가인 새뮤얼 리처드슨이 그에게 6기니를 보냈다. 어쩔 수 없이 언론인으로서의 활동을 계속해야만 했다. 그는 토머스 브라운의 〈그리스도교 도덕 Christian Morals〉(1756)을 편집했고, 윌리엄 페인의 〈서양 장기 입문 Introduction to the Game of Draughts〉(1756), 리처드 롤트의 〈상업 사전 New Dictionary of Trade and Commerce〉(1756)에 서문을 썼으며, 잡지에 많은 글을 기고했다.

〈리터러리 매거진 The Literary Magazine〉에서는 요나스 핸웨이의 〈차에 대한 명상 Essay on Tea〉을 읽은 후 스스로를 '고집 세고 부끄럼도 모르는 차 애호가'로 설명하기 위해 20년 동안 차를 마셨으나 아무 해가 없었고 그러므로 차가 독약은 아니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고 했다.

좀더 중요한 서평은 소암 제닌스의 〈악의 본성과 기원에 관한 탐구 A Free Inquiry into the Nature and Origin of Evil〉(1757)에 대한 것으로 존슨은 아이러니를 사용하여 우수 인종이 그들의 오락을 위해 사람을 속이거나 괴롭혔다는 생각을 부정했다.

또한 존슨은 보다 나은 건강과 극히 적은 오락만 있어도 가난이 보상되어지리라는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인생이란 개념적으로 알 수 있기 전에 반드시 직접 보아야만 한다'고 그는 반박했다. 이런 태도야말로 그가 특별히 깊이 있는 느낌으로 그려냈던 주제로서 그가 깊이 느낄수록 그의 문체는 더욱 단순해졌다.

존슨의 관심사나 저술은 문학과 윤리의 문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1756년 〈리터러리 매거진〉에 그는 정치상황에 대한 2편의 글 〈대영제국의 정치 상황 개론 An Introduction to the Political State of Great Britain〉·〈현사태 고찰 Observations on the present State of Affairs〉 등을 기고했다. 2편 모두 영국·프랑스의 식민정치에 내재해 있는 권력정치를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미국에서 두 나라가 싸우는 것은 '통행인에게 빼앗은 전리품을 두고 두 강도가 싸우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프랑스가 영국보다 더 뛰어난 총독을 파견하여 원주민들을 더 잘 다스렸다고 스스럼 없이 주장했다.

그의 글에 따르면 국가간의 우정이 문화적이든 야만적이든 그저 친절한 조처에 의해 획득되고 유지될 수 있다는 상상은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바로 식민주의자들의 동기와 방법에 대한 이러한 근본적 불신에서 더 잘 알려진 식민주의 정책에 대한 후기 비판이 나오게 되었다. 이런 일을 하는 동안에 존슨은 자기 나름대로의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는 1756년 셰익스피어 작품집의 편집계획을 발표하면서,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 동기가 명예를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금전이 필요해서임을 강조했다. 1757년 4월 그는 버밍엄에 있는 오랜 친구 에드먼드 헥터에게 예약 상태는 약간 실망스럽긴 하지만 그런대로 만족스럽다고 편지를 썼으나 1758년초 그는 어떤 서적상으로부터 40파운드를 빌려야만 했다.

대략 비슷한 시기에 존슨은 〈유니버설 크로니클 Universal Chronicle〉에 〈게으름뱅이 The Idler〉라는 주간 수필을 기고했다.

그의 이야기는 뛰어났지만 〈영국 시인들의 생애 The Lives of the English Poets〉를 제외한 그의 다른 글들은 읽을 수가 없다는 풍문에 젖어온 독자라면 〈게으름뱅이〉를 읽고 자신의 편견을 수정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채무자 감옥이나 생체 실험과 같은 주제에 대해 도덕가로서, 사회개혁가로서의 모습이 뚜렷하긴 하나 그는 즐겨 인간의 희극적인 면에 관심을 기울였다.

가격인하 판매만 열심히 찾아다니는 여성이나 기복이 심한 출판업자들을 다룬 글도 있는데, 인물묘사로서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소버 씨〉이다.

"소버 씨의 가장 큰 즐거움은 대화다. 그의 이야기나 집중에는 어떤 목적도 없다. 말하는 것이나 듣는 것이나 똑같이 즐겁다. 그러면서 그는 무엇인가를 가르치거나 배우고 있다고 공상하기 때문이다. 그 시간 동안은 자신의 비난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글은 자화상이라고 여겨질 만한 희귀한 글이다.

몇 번 예외가 있긴 했으나 2년 동안 매주 존슨은 〈게으름뱅이〉를 인쇄업자에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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