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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마이클 존슨은 리치필드의 명망 있는 시민으로 그가 태어날 무렵 그 도시의 치안판사였다.
서점 주인이었던 아버지는 중요하긴 해도 그다지 돈벌이가 되지 못하는 일을 했다. 새뮤얼은 건강한 아이는 아니었다. 시력이 약했고 당시 널리 퍼져 있던 결핵을 앓기도 했다.
아버지는 프랑스에 망명해 있는 제임스 왕에게 동조하는 고교회파(高敎會派)였고, 어머니 새라 포드는 칼뱅주의에 경도된 경건한 여성이었다. 어머니는 존슨에게 축일 집도문(集禱文)을 외우도록 가르쳤고 천국과 지옥의 차이를 설명했다. 1717년 존슨은 리치필드 그래머 스쿨에 입학해 라틴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동창생 가운데 에드먼드 헥터는 존슨과 평생 우정을 나누게 되는데 나중에 존슨의 '보기 드문 학습능력'을 회상하며, "책에 대한 열의는 그다지 많지 않았으나 남보다 돋보이고자 하는 야심이 대단했고, 계산을 몹시 싫어해서 마지막까지 연습문제를 미루곤 했다"고 썼다. 이러한 성향은 존슨의 오랜 문필활동에서도 계속 남아 있던 것이었다.
상급학교로 진학하면서 존슨은 교장의 지도를 받게 되었는데, 그는 학자였지만 '교수대에서 구해내기 위해' 아이들을 무차별적으로 구타하는 폭군이었다.
존슨은 나중에 "교장은 나를 아주 잘 때렸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무 일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잠시 스타워브리지에 있는 그래머 스쿨의 학생으로 저학년 학생의 교육에 관여했다가 서점에서 아버지를 도왔다. 예비 학자로서의 본능을 가진 그는 아버지의 서가를 돌아다니면서 광범위한 독서를 했다. 1728년 옥스퍼드대학교의 펨브로크 칼리지에 입학할 무렵에는 대학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많은 작품들에 익숙해 있었다.
그가 처음 지도교수인 윌리엄 조던을 만났을 때 그는 라틴어 문법학자이며 철학자인 마크로비우스를 인용하면서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존슨은 조던의 학식을 별로 칭찬하지 않았으나 선량한 마음씨를 높이 샀다. 존슨에게 더 중요했던 인물은 펨브로크의 특별연구원이었고 나중에 학장이 된 윌리엄 애덤스로서 그와는 여러 해 동안 친구로 지냈다.
같은 세대의 학부생 가운데도 좋은 친구들이 있었다. 오랜 교우로 크라이스트처치 애슈번의 존 테일러와 가까웠고, 펨브로크 친구들 가운데 명랑하고 유쾌하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억지로 꾸며낸 명랑함이었다. 가난 때문에 좌절하고 고통스러웠던 그는 권위를 무시하고 '문학과 재치로 싸워나가리라 생각'했다. 학부시절의 학자적 재능이 보이는 예로서 알렉산더 포프의 〈메시아 Messiah〉를 라틴어로 번역했으며, 이것은 1731년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출판된 〈잡록 Miscellany〉에 수록되어 있다.
가난한 마이클 존슨이 어떻게 아들을 대학에 보낼 수 있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아마 존슨 부인이 받게 된 적은 유산이 도움이 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존슨은 13개월 후인 1729년 12월 옥스퍼드대학교를 떠나야만 했다. 그의 미래는 불안했다. 그는 학위도 없었고 다른 자격증도 없었다. 아버지의 사업은 기울어갔고 스타워브리지에 지망한 보조교사직도 얻지 못했다. 1731년말 아버지가 죽었고 이듬해 그는 마켓 보스워스에 있는 그래머 스쿨의 하급교사 자리를 수락했다. 이 직책으로 인해 그는 건강하지도 행복하지도 못했으며, 집주인 울프스탠 딕시 경의 거만한 태도로 인해 몹시 분개했다.
버밍엄에서 외과의사가 된 오랜 친구 에드먼드 헥터의 도움을 받아 제롬 로보 신부의 〈에티오피아 여행 A Voyage to Abyssinia〉 프랑스어판을 영역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이 책의 서문을 보면 침략당한 나라의 원주민에게 본능적인 공감을 느꼈음을 알 수 있다. 에티오피아의 침략자들은 손에 칼을 들고 복음을 설교했던 선교사들이었다. 또한 이미 이 서문에서 존슨 특유의 산문체를 맛볼 수 있다.
존슨은 버밍엄에 체류하면서 그의 첫번째 저서로 5기니 남짓의 돈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 포목상 해리 포터의 미망인 엘리자베스를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
그녀는 존슨보다 20세 연상이었으므로 상호간의 애정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나중에 존슨은 아내의 아름다운 금발머리에 대해 말하곤 했다. 아내는 존슨의 외모에 대해 다소 불만이 있었으나 최소한 그의 화술을 높이 샀다. 1735년 더비에서 결혼식을 했으며 신부는 700파운드 상당의 지참금을 가져왔다. 리치필드 교회법정의 힘을 얻은 존슨은 리치필드 교회법정 서기였던 친구의 격려로 리치필드 근처 에디알에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기숙학교를 설립했다.
세심한 교과과정을 준비했으나 데이비드 개릭을 포함한 몇 명만이 입학했을 뿐, 2년이 지난 후에는 실패를 인정해야만 했다. 나쁜 건강과 우울증, 학위도 없고 학교도 망했지만 학자와 작가로서 유명해지고자 하는 욕구는 항상 남아 있었다. 결혼 전 〈젠틀맨스 매거진 Gentleman's Magazine〉의 발행인에게 적당한 시와 논문, 고대 및 현대 작가들에 대한 평론 등을 게재할 용의가 있다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을 뿐더러, 더욱이 에디알에서 시간이 많아 친구들의 격려로 다시 비극을 쓰기 시작했는데, 〈터키의 역사 General History of the Turks〉는 리처드 놀스가 전해주었던 술탄 메메드 2세와 아름다운 그리스 처녀 아이린의 이야기에 근거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끝내 완성하지 못했고, 존슨은 편집자나 서적상이 돈을 지불할 만한 글을 써야 했기에 런던에서 일거리를 찾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1737년 3월 데이비드 개릭과 함께 런던으로 떠났다.
〈젠틀맨스 매거진〉이 처음으로 그에게 사소한 일거리를 맡겼다. 발행인 에드워드 케이브는 재빨리 존슨이 지닌 언론인으로서의 자질을 인정했고, 존슨은 산문과 운문으로 된 일련의 간단한 전기뿐 아니라 송시·경구시·서평 등의 많은 글을 기고했다.
1737년말 다시 리치필드로 돌아와 비극 〈아이린 Irene〉을 끝내고 아내를 런던으로 데려왔다. 그러는 동안에도 일시적인 잡지 기고물 이상의 가치 있는 글을 쓰는 작가가 되겠다는 야심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1738년 최초의 중요한 시 〈런던 London〉이 출판되었다. 이 시는 유베날리우스의 3번째 작품 〈풍자집 Satire〉을 모방하여 씌어진 것으로, 정치적 부패와 런던 거리의 위험에 대한 저항을 표현하고 좀더 예리한 개인적 감정을 담아 가난한 무명작가의 불행을 그리고 있다.
익명으로 출판된 〈런던〉은 즉각 성공을 거두어 곧 3판을 찍었고 알렉산더 포프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존슨의 배당금은 10기니뿐이어서 그는 또 '서적상들을 위해 번역하느라 굶어 죽는' 대신에 교사가 되어볼까 생각했다. 레스터셔의 애플비 스쿨에서 석사학위를 딴다는 조건하에 교장직을 제의했으나, 옥스퍼드에서나 더블린에서는 학위수여를 거부했다. 또한 법학 학위가 없었으므로 변호사 개업도 할 수 없었다. 고통스러운 좌절기에 월폴 정부에 대한 가장 격렬하고 풍자적인 2편의 비평이 나왔다.
첫 작품은 〈노퍽의 대리석 Marmor Norfolciense〉(1739)인데, 이것은 월폴의 고향 노퍽에서 발견되었다고 여겨졌던 라틴 운율시를 다룬 평론이고, 2번째는 〈무대 감찰의 옹호 A Compleat Vindica- tion of the Licensers of the Stage〉(1739)로, 헨리 브룩의 희곡 〈구스타프 바사 Gustavus Vasa〉에 대한 탄압을 비꼬아 옹호하는 글이었다.
2편의 풍자는 권위에 도전하고, 그가 옥스퍼드에서 분투했듯이 노력하는 성난 젊은이의 저항이었다. 존슨은 결코 감상적인 재커바이트는 아니었으나 하노버 왕가에 대한 경멸을 〈노퍽의 대리석〉보다 더 통렬하게 묘사한 작품은 없다.
존슨 체포령이 내렸다는 이야기는 결코 확인된 적이 없으나, 케이브의 편집위원으로서 당시의 정치를 다룰 때는 좀더 온건한 문체를 사용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젠틀맨스 매거진〉은 1732년부터 의회의 논쟁을 특집기사로 다루어왔지만, 존슨이 런던에 도착한 직후 하원에서 그 잡지의 발간을 금지했다.
그러나 케이브는 〈릴리푸트 대국(大國) 상원의 논쟁 Debates in the Senate of Magna Lilliputia〉으로 출판을 계속하려고 생각했다. 처음에 존슨은 잡지를 편집하고 확충하는 일을 돕기 위해 고용되었으나, 1740~43년 〈논쟁〉은 완전히 존슨의 작품이었다. 그는 현대적 의미의 보도 기자가 아니었고 하원에 가본 것도 단 한번 뿐이었다. 때때로 그는 다른 보도기자들이 보내준 기록을 사용했고 때로는 논쟁의 주제와 연설가의 이름만 알았다. 또한 그는 〈논쟁〉이 단지 자기 자신이 꾸며낸 것이라고 고백했고, 나중에는 마음대로 지어낸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신문기사용 작품으로 그것들은 대단한 걸작들이었다. 그는 세인트 존스 게이트에 있는 케이브의 사무실에 들어앉아 한 시간에 3편의 글을 써서 〈매거진〉에 보냈다. 그는 토리당에 반대하는 휘그당의 앞잡이들이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면 안 된다는 말을 자주 함으로써 그의 활동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그의 보고서는 치고받는 논쟁의 기록이라기보다는 문제의 양면에 대한 주요한 기사라는 찬사를 받았다. 논쟁의 마지막에 자리에서 물러나는 월폴의 입에서 나온 짤막한 연설은 품위와 절도를 가지고 자신을 방어하는 수상에 대한 훌륭한 객관적 기록이다.
런던에서 존슨의 가장 친한 친구는 리처드 새비지였다.
새비지는 배우·극작가·시인이었다. 그는 귀족 출신이라고 주장했으며 신분 높은 친구들도 많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환대를 끊임없이 경멸했다. 두 사람이 공유하던 최소한 2가지 성질은 가난과 월폴 행정부에 대한 애국적인 분노였다. 그들의 형편이 최악일 때 그들은 '두 사람이 벌었던 돈을 모두 합해도 다락방의 더러운 휴식도 구할 수 없을 때는 웨스트민스터 광장을 배회'하면서 밤을 보냈다. 새비지가 죽었을 때 존슨은 즉시 친구를 애도하는 작품을 썼다.
애정과 열광으로 씌어진 〈리처드 새비지의 일생 An Account of the Life of Mr. Richard Savage, Son of the Earl Rivers〉은 1744년 익명으로 출판되었고 존슨의 산문 작품으로는 처음으로 대중을 매료시켰다. 5년 후 〈톰 존스 Tom Jones〉를 발표했던 소설가 헨리 필딩은 그 작품을 인간성의 우수성과 결점에 대해 언어로 씌어진 최고의 글이라고 격찬했다. 영국 최고의 화가인 조슈아 레이놀즈는 당시 21세였는데 그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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