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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18. 7. 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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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65. 8. 13, 빈 |
국적 | 헝가리 |
요약
헝가리의 의사.
(헝). Ignc F
l
p Semmelweis.
산욕열(産褥熱)의 원인을 발견하고 소독법을 의술에 도입했다(의학, 방부제). 페슈트대학교와 빈대학교에서 공부하고 1844년 빈에서 의사가 된 제멜바이스는 빈의 조산원에서 조수가 되었다(산부인과학). 그는 곧 유럽 전역의 산과병원에서 두통거리였던 산욕열의 감염 문제에 몰두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산모는 집에서 분만했지만 가난이나 사생아 출산, 합병증 때문에 입원해야 했던 사람들의 사망률은 25~30%나 될 정도로 높았다. 일부에서는 감염이 혼잡, 불량한 환기상태, 수유 또는 '미아즈마'(miasma : 토양이나 대지에서 발산된다고 가상되었던 유독기체)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멜바이스는 유럽 전역의 다른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산욕열은 예방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상관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병의 원인을 조사해나갔다.
제멜바이스는 병원의 제1실 산모가 제2실에 비해 2~3배나 높은 산욕열 사망률을 보이는데 2곳의 차이는 제1실에서는 학생들이, 제2실에서는 조산원이 연수를 받는다는 것뿐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학생들이 그들이 진찰하는 환자에게 분만중에 무엇인가를 전염시킬 것이라는 명제에 도달했다(전염병). 그러던 중 동료가 산욕열로 죽은 여자를 조사하다가 상처가 감염되어 죽자, 두 경우의 유사함을 발견하고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해부실에서 분만실로 곧바로 들어오는 학생들이 병으로 죽은 산모로부터의 병균을 건강한 산모에게 감염시킨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학생들에게 매회 진찰 전에 염소화석회 용액에 손을 씻으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하자 제1실의 사망률은 18.27%에서 1.27%로 떨어졌고 1848년 3월부터 8월 사이에는 그의 병실에서 분만 도중에 죽는 산모가 1명도 없었다. 빈의 젊은 의사들은 제멜바이스가 발견한 사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를 가능한 한 도와주려고 했다.
반면에 그의 상관은 비판적이었는데 그것은 반대하려고 해서라기보다 이해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848년에는 진보적인 정치혁명이 유럽을 휩쓸었고, 제멜바이스도 빈에서 이에 참여했다. 혁명이 제압된 뒤 그는 정치적 활동으로 인해 직업적 활동에 있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849년 병원에서 해고당했고, 그후 대학교의 산과학 교수직에 지원했으나 거절당했다. 그 직후, 빈 의학학회에서 '산욕열의 원인'이라는 제목으로 성공적인 강연을 했으며, 이와 동시에 한 번 더 교수직에 응시하여 취임했으나 굴욕적인 제약이 붙었다.
그는 1850년 빈을 떠나 페슈트로 돌아왔다. 그후 6년 동안 페슈트의 장크트로후스 병원에서 일했다. 이곳의 산부인과에서도 산욕열이 유행하고 있었고, 제멜바이스는 스스로 원해서 산부인과 책임자가 되었다. 그가 사용한 방법으로 사망률은 급속하게 감소하여, 그가 재임하는 동안에는 겨우 평균 0.85%에 불과했다. 반면에 프라하와 빈에서는 그때까지도 사망률이 10~15%에 달했다.
1855년 제멜바이스는 페슈트대학교의 산부인과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결혼하여 5명의 자녀를 두었고, 업무를 확장했다. 헝가리 정부는 그의 의견을 수용하여 모든 지방당국에 제멜바이스의 예방법을 도입하라는 회람을 보냈다. 1857년에 그는 취리히대학교 산부인과 과장직을 거절했다. 빈은 그때까지도 그에게 적대적이어서 〈주간 빈 의학 Wiener Medizinische Wochenschrift〉의 편집자는 염소화석회 용액에 손을 씻는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중지하라고 했다. 1861년 제멜바이스는 그의 주요저서인 〈병인학(病因學), 산욕열의 이해와 예방 Die Ätiologie, der Begriff und die Prophylaxis des Kindbettfiebers〉을 출판했다.
그는 이 책을 모든 저명한 산부인과 의사와 외국의 의학학회에 보냈으나, 일반적인 반응은 비판적이었다. 권위라는 벽이 그의 가르침을 막아서고 있었다. 다른 나라의 의학교수들에게도 여러 통의 솔직한 편지를 써 보냈으나 거의 효과가 없었다. 독일의 의사와 자연과학자회의에서도 병리학자인 루돌프 피르호를 포함한 대부분의 발언자들이 그의 이론을 거부했다. 논쟁은 수년간 계속되면서 점차 그의 정신력에 손상을 입혔다.
결국 그는 1865년 신경쇠약에 걸려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사망원인은 오른손 상처의 감염에 의한 것이었는데 그가 병에 걸리기 전에 시술했던 수술로 인한 것이 분명했다. 즉 그는 자신이 전생애에 걸쳐서 싸워온 바로 그 병으로 죽은 것이었다. 제멜바이스의 이론은 그후에 의학계에서 수용되었다. 현대 소독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조셉 리스터는 제멜바이스가 감염에 대한 지식의 확대와 감염 억제에 끼친 영향에 다음과 같이 찬사를 보냈다.
"나는 그와 그의 업적에 커다란 찬사를 보내며,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존경을 마침내 받게 되어 너무나 기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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