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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중국 북송의 이학을 철학 학파로 발전시킨 형제 철학자.
(병). Cheng Hao and Cheng Yi. (웨). Ch'eng Hao and Ch'eng I.
정호·정이 형제의 철학은 일반적으로 함께 묶여 생각되지만, 그들의 사상은 각각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정호는 이학의 이상주의학파에 영향을 미친 반면, 정이는 합리주의학파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이 서양에서 잘 알려진 것처럼 중국에서는 "원칙은 하나이지만 그 원칙의 발현은 많다"는 정이의 말이 유명하다.
정호는 젊었을 때 불교와 도교에 관심을 가졌다. 이후 유교를 공부하여 문관시험에 합격했으며 고위직에 올랐다. 그러나 왕안석의 급진적인 개혁에 반대하여 관직에서 파면되었다. 허난에서 동생 정이와 합류했으며, 그들 주위에 문하생이 몰려들었다. 정이는 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잠시 숭정전설서를 지냈으나 엄격한 도덕관념으로 인해 곧 주위의 많은 사람들과 멀어져서 자리를 물러났다.
그는 거의 평생 동안 관직에 나가는 것을 거부했으며,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계속 비판했다. 그결과 1097년 토지를 몰수당하고 강의를 금지당했으며, 중국의 남서쪽에 위치한 푸저우[福州]로 귀양갔다. 3년 뒤에 사면받았으나 1103년 다시 견책을 받았다. 1106년 2번째 사면을 받았으나 얼마 후 죽었다.
이 두 형제는 주로 자신들이 불교나 도교 저작으로부터 성리학에 차용한 사상인 이(理)의 개념에 관한 철학을 확립했다. '이'는 기본 동력, 보편적 법칙, 모든 존재의 기초가 되면서 통제하는 진리 등으로 정의된다. 그들 모두 '이'에 대한 철저한 연구가 정신적인 교화를 위한 최상의 방법이라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 정호는 차분한 내성을 강조하여, 원초적 상태에서 인간은 우주와 일체한다고 가르쳤다. 또한 그는 사색을 강조하여, 육구연과 왕양명(王陽明 : 1472~1529)이 창시한 후기 이학의 이상주의파에 영향을 미쳤다.
정이의 철학은 원래 도학으로 불렸다가 후에 이학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형과는 달리 이를 발견하는 길은 이가 존재하는 우주의 무수한 사물을 탐구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정이는 연역법, 귀납법, 역사와 다른 원칙에 대한 연구, 인간사의 참여 등 많은 탐구방법을 신봉했다. 정이가 죽은 뒤 10년 후 주희(朱熹 : 1130~1200)는 정이의 사상을 확대시켜 정주학파로 발전시켰다(→ 정주학파). 이 사상은 1911년 신해혁명 이전까지 학계에서 그 권위를 유지했다.
정호·정이 형제의 저술은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그들이 쓴 단편들이 〈유서 遺書〉·〈외서 外書〉·〈취언 聚言〉 등에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명도문집 明道文集〉에는 정호의 저작이 한결 완벽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정이의 저작은 〈이천문집 伊川文集〉·〈경설 經說〉·〈이천〉에 수록되어 있다. 현존하는 그들의 저술은 1606년에 출판된 〈이정전서 二程全書〉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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