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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

다른 표기 언어 tank , 戰車

요약 트랙으로 불리는 2개의 순환 쇠사슬로 움직이는 전투장갑차량. 원래 교전지역에 군대투입을 목적으로 구상되었으나 전투용으로도 쓰이게 되었다. 자주포, 수륙양용차 등의 특수차량들이 장갑차량의 범주에 속한다. 전차는 트랙식 방호무기 발사대로 기동성과 방호력이 뛰어나다. 전투차량의 역사는 BC 20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지만 20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실용적인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장갑차 개발이 가속화되었고 1950년대 중반의 전술핵무기 개발로 개발이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핵무기의 등장은 장갑병력의 활용을 고취시켰는데, 이는 장갑병력이 기동성이 있고 전투력이 높기 때문이다. 전장에서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세계대전 후에는 중량은 점진적으로 증가했지만 보다 강력한 기관이 갖추어져 전차의 속력과 기동성은 증가했다.

전차

전차, M48A5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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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 외에도 여러 종류의 장갑차량이 있다.

처음에는 군대를 교전지역에 투입할 목적으로 구상되었다. 후에 전투용으로도 쓰이게 된 트랙과 차륜식의 보병 수송차, 경량급의 전차와 비슷하나 차륜으로 달리는 장갑차, 부분적으로만 장갑되었거나 차륜식인 것을 포함한 자주포, 장갑회수차량, 교량파괴차, 장갑 불도저, 수륙양용차와 같은 특수차량들이 모두 장갑차량의 범주에 속한다. 전차는 본질적으로 트랙식의 방호무기 발사대로서 들판을 가로지르는 기동성과 탑승원에 대한 방호력으로 탑재무기의 효력을 높인다.

전차에 탑재되는 무기는 단신(單身)소총 구경의 기관총에서부터 최근에는 구경 120~125㎜인 장총신포(長銃身砲)까지의 총포에 이른다.

전투용 차량의 역사는 이집트인이나 히타이트인들이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달리면서 활과 화살로 싸운 BC 20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방호차량의 개념은 중세의 차륜식 공성탑(攻城塔)과 파성추(破城f) 뿐만 아니라 더 멀리는 BC 9세기에 아시리아인들이 사용한 유사한 장치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전투용과 방호용이라는 2가지 개념은 1335년 기도 다 비제바노가 처음 제안한 전투차에서 통합되기 시작했다. 이 전투차는 1484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그후의 여러 사람에 의해 제안되었으며, 1855년에는 영국에서 제임스 코윈이 증기 트랙터에 입각한 차륜식 무장 장갑차량의 특허를 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20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전투장갑차량이 실용적인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는 견인차와 동력차가 등장하여 장갑전투차량을 제작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900년 영국에서 최초의 자주식(自走式) 장갑차량이 제작되었다.

존파울러사(社)가 보어 전쟁(1899~1902)에서 보급품을 운반하기 위해 자사 제품의 증기견인차 가운데 하나를 장갑한 것이 그것이다. 무기운반차로 이용된 최초의 동력차는 1899년 영국에서 F. R. 심스가 기관총 1문을 탑재한 동력 4륜차였다. 필연적인 다음 단계는 무장과 장갑을 겸한 차량이었다. 그러한 차량이 1902년 비커스선·맥심사의 주문으로 제작되어 런던에서 전시되었다. 2년 후 하나의 포탑과 함께 완전 장갑된 차량이 프랑스에서 제작되었으며, 동시에 오스트리아에서도 제작되었다.

현대적 전투장갑차량의 마지막 발전 단계는 차륜 대신 트랙을 채택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트랙식 농업용 트랙터의 등장으로 인해 불가피해졌지만,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까지 실현되지 못했다. 프랑스에서 일찍이 1903년에 트랙식 장갑차량을 만들자는 제안이 나왔지만 군사당국의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으며, 1908년 영국에서 나온 비슷한 제안도 마찬가지였다.

3년 후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참모부가 트랙식 장갑차량의 제작구상을 물리쳤고, 뒤이어 독일군의 참모부도 같은 조치를 취했으며, 1912년 영국의 육군부에서도 또다른 구상을 기각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상황이 급변되었다. 개전 단계의 기동전은 장갑차의 개발을 가속화하여 벨기에·프랑스·영국에서 많은 장갑차가 급조되었다. 뒤이은 참호전에서 장갑차는 더이상 이용할 수 없게 되었고, 새로 트랙식 장갑차량의 제작 계획들이 쏟아져나오게 되었다.

이 계획들은 대부분 장갑차가 도로에서 벗어나 기복이 심한 지면을 넘고 철조망을 뚫고나갈 수 있게 하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최초의 트랙식 장갑차량은 1915년 7월 영국에서 임시변통으로 만들어졌는데, 그것은 킬렌스트레이트 트랙터에 장갑차의 차체를 올려놓은 것이었다. 이 차량은 영국 해군 항공대의 장갑차 사단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이 사단의 구상을 윈스턴 S. 처칠 해군장관이 후원한 결과 해군 상륙함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 위원회에 의한 일련의 실험 결과 1915년 9월 '리틀 윌리'로 불린 최초의 전차가 제작되었다. 바로 뒤이어 '빅 윌리'로 불린 2번째 모형이 나왔다. 넓은 참호를 넘어갈 수 있도록 설계된 이 모형을 영국 육군이 채택하여, 1916년 2월 '마크 Ⅰ'으로 불린 전차 100대를 주문했다.

그와 동시에 프랑스에서도 독자적으로 전차를 개발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프랑스에서 생산된 전차는 3,870대였고, 영국은 2,636대였다. 프랑스의 전차들은 대부분 전후에도 활용되었는데, 이 전차들은 보다 무거운 영국제들보다 용도가 훨씬 다양한 르노 F. T. 였다. 프랑스 육군은 전차가 보병의 보조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론을 채택했으며, 다른 대부분의 나라에서도 프랑스의 선례를 따랐다. 예를 들어 미국과 이탈리아에서는 보병 지원을 원칙으로 하여 르노 F.T.를 복제했다.

미국의 복제판은 M1917 경전차(輕戰車)였고, 이탈리아의 것은 피아트 3000이었다. 그밖에 전쟁말까지 전차를 생산한 나라는 독일뿐이었는데, 약 20대를 제작했다. 르노 F.T.는 1930년대초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대수가 많은 전차였다. 보병의 공격을 선도하기 위해 보다 강력한 차량이 필요했던 프랑스 육군은 우수한 무기를 장비하는 전차의 개발에 앞장섰다. 1917년에 처음 나온 프랑스제 슈네데르 전차와 생샤몽 전차는 보다 무거운 영국제 전차들이 기껏해야 57㎜포로 무장하고 있을 때 이미 75㎜포를 탑재했다. 전후에 프랑스는 최초의 포탑에 싣는 75㎜포를 장비한 68t 무게의 2C 전차 10대를 제작하고, 계속 75㎜포 전차를 개발했다.

그동안 영국은 기술적으로나 전술적으로 전차의 기동성 개발에 앞장섰다. 제1차 세계대전이 채 끝나기 전에 최고시속 32㎞의 미디엄 D를 생산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1930년대초까지는 두 종류의 전차를 개발하여 기동성 있는 전차에는 과거 기병대가 수행하던 역할을 맡기고, 그보다 느리나 중화기를 장비한 전차에는 보병 지원임무를 맡기는 안이 채택되었다.

이러한 기동전차와 완행전차의 구분이 확정되기 전에 다른 여러 가지 설계가 시험되었다.

1925년에 나온 5개의 포탑을 가진 영국의 독립 전차는 다포탑(多砲塔) 중전차(重戰車) 개발 추세를 선도했다. 또 하나의 추세를 선도한 것은 역시 영국에서 처음 나온 소형의 무포탑(無砲塔) 전차였다. 전차의 수는 1929년 이후 여러 나라에서 장갑차량을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급증했다.

가장 효과적인 전차부대는 1939년에 3,195대로 구성된 독일의 전차부대로 밝혀졌다(독일 전차부대). 독일의 전차들이 그토록 강력하게 된 것은 전차를 보병과 기병의 각종 전차부대로 분산하지 않고 기갑사단들에 집중시켜 밀집대형으로 이용한 것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초의 2년 동안 독일의 기갑사단들이 위력을 떨치자 열강의 육군들이 앞을 다투어 보유 전차 대부분을 비슷한 대형으로 재편성했으며, 이것이 전차 생산의 극적인 증가를 가져왔다.

1939~41년의 군사작전에서 장갑부대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자 전차와 그밖의 장갑차량들의 기술개발도 가속화되었다. 독일의 Pz. IV와 소련의 T-34는 1942년 포신이 보다 길고 포탄의 초속이 보다 높은 포로 재무장되었으며, 이 전차들은 곧바로 보다 강력한 무기를 장비한 전차들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1943년 독일군은 팬더 중형(中型)전차를 선보였는데, 이 전차에 장착한 장포신의 75㎜포는 포구 초속이 Pz. IV에 처음 탑재되었던 381㎧인 포의 속도는 물론 그 개량형의 초속 745㎧보다 월등히 높은 936㎧였다. 이 43t급 팬더 전차는 그 이전의 전차보다 무게가 거의 2배나 나갔으며, 그만큼 무기의 성능도 좋았다. 독일은 그보다 훨씬 더 강력한 타이거 전차도 만들어냈는데, 이 전차는 88㎜포로 무장되었다.

타이거 전차의 최종 개량형인 타이거 Ⅱ는 무게가 68t으로 제2차 세계대전중에 동원된 가장 무거운 전차였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소련은 요시프스탈린 JS 중(重)전차를 제작했는데, 1944년에 등장한 이 전차는 122㎜포로 무장되었다. 그러나 이 포의 포구 초속은 독일의 88㎜포의 초속보다 빨랐으며, 전차의 무게도 46t밖에 나가지 않았다.

거의 같은 시기에 소련의 T-34 전차는 85㎜포로 재무장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중전차들이 적진돌파 역할을 맡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타이거 전차와 요시프스탈린 중 전차는 원거리에서 적의 전차를 파괴하여 기본이 되는 중형전차들을 지원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독일군과 소련군은 이 임무를 수행할 다른 중차량들도 개발했는데, 그렇게 개발된 128㎜포의 야크티거(Jagdtiger)와 122㎜포의 ISU 등은 사실상 무포탑 전차들이었다.

그밖에 모든 참전국이 경장갑(輕裝甲)의 자주식 대전차포를 개발했다. 미국은 특수차로 분류되는 전차공격차를 개발했는데, 이것은 경장갑인 점에서는 자주포와 비슷했지만 전차와 마찬가지로 회전식 포탑을 가지고 있었다.

무포탑 전차형의 전차는 독일군이 보병 지원용으로 만들어낸 돌격포인 슈투름게슈츠(Sturmgeschütz)가 시초이지만 나중에 적의 전차를 파괴하는 데 적합한 다용도의 차량으로 바뀌었다. 그런 차량은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전혀 생산되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군은 특수차로 분류되는 처칠과 같은 보병 전차와 크루세이더나 크롬웰과 같은 순항전차를 보유했다.

전자는 장갑이 잘 되었고 후자는 신속했지만, 어느 것이나 독일과 소련의 전차에 비해서는 장갑이 빈약했다. 따라서 1943, 1944년에 영국의 장갑사단들은 대부분 미국의 M4 셔먼 중형전차로 장비되었다. M4의 전신은 M3 중형인데, 기계적으로 M4와 비슷한 이 전차 역시 초속이 중간 정도인 75㎜포로 무장되었다. 그러나 포를 포탑이 아닌 차체에 탑재했는데, 그렇게 해야만 전차가 절실히 필요했던 1940~41년에 대량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M4의 생산은 1942년에 시작되었으며, 궁극적으로 4만 9,000대 이상이 제작되어 미국과 다른 연합군 장갑부대들의 주력 전차가 되었다. 전선에 처음 투입되었을 때는 성공적이었던 이 전차도 1944년에는 무장이 뒤지게 되어 새로운 중형전차로 대체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미육군은 영국과 마찬가지로 장갑사단은 보병의 적진돌파 지원을 임무의 한계로 삼아야 한다는 잘못된 원칙을 고수했으며, 따라서 강력한 화기로 무장한 전차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미군은 독일의 타이거 Ⅰ에 필적하는 90㎜포가 탑재된 신형 M26 퍼싱 중전차를 선보였다.

마찬가지로 영국군도 독일의 팬더 전차에 필적하는 76㎜포가 탑재된 센튜리온 전차의 원형들을 선보였다. 그것을 제외하면 미국과 영국의 전차들은 포의 화력에서 독일과 소련의 전차들에 비해 크게 뒤져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모든 전차는 적의 전차와 싸우기에 충분한 무장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그결과 전차를 총포무장을 적게 하는 특수 보병전차와 기병전차로 나누는 원칙, 즉 영국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 오래 지켜온 원칙이 마침내 폐기되었다.

그러나 전차를 완전 기계화 편대로 집중시키는 방식이 갖는 장점은 충분히 인식되지 않았으며, 그래서 영국과 미국은 여전히 전차를 장갑사단과 기동력이 떨어지는 보병사단 사이에 나누어 배치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전차는 장래성이 없다는 비판을 주기적으로 받아왔다. 로켓 발사기나 무반동소총과 같은 새로운 전차공격무기들과 전차의 가치는 주로 장갑 방호력에 있다는 그릇된 인식이 그러한 비관론을 야기했다. 그러나 소련군은 대규모의 장갑병력을 유지했으며, 이 장갑병력이 냉전의 형태로 서유럽에 가한 위협과 1950년의 6·25전쟁 당시 소련제 T-34/85 전차가 보여준 대량파괴 능력은 전차개발에 새로운 자극이 되었다.

1950년대 중반의 전술핵무기 개발은 전차와 그밖의 장갑차량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작용을 했다.

핵무기의 등장은 장갑병력의 활용을 고취시켰는데, 이는 장갑병력이 취약한 인력에 비해 기동성이 있고 전투력이 높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장갑차량은 폭풍과 방사능에 대한 방호력을 갖추고 있어 핵폭발 현장에 보다 인접해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핵무기를 강조하던 경향이 시일이 지나면서 줄어들고 재래식 군사력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커지면서 전차의 중요성이 유지되었다.

특히 1970년대초부터 가상 침략국이 지상에서 가하는 주된 위협수단인 장갑병력에 대응하기에 전차가 가장 효과적이라는 인식이 그 밑받침이 되었다.

적군 전차를 격퇴할 수 있는 아군 전차의 능력을 중시하게 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차병기가 크게 강조되었다. 그결과 전차로의 구경이 점진적으로 증대되었고 장갑관철력, 즉 철갑력(徹甲力)이 보다 큰 신종 탄약들이 개발되었으며, 전차포의 명중률을 높이기 위한 복잡한 사격통제장치가 도입되었다.

포의 구경을 넓힌 좋은 예가 영국의 센튜리온 전차이다. 이 전차는 1945년 76㎜포로 출발했지만 1948년 83.3㎜포로 재무장되었고, 1959년 다시 훨씬 더 강력한 105㎜포를 탑재했다. 뿐만 아니라 1950년대 영국의 전차부대들은 120㎜포를 장착한 소수의 콩커러 중전차들로 전력이 보강되었고, 1970년대초에는 센튜리온이 120㎜포를 장착한 보다 효과적이고 새로운 치프턴으로 완전 대체되었다.

1960년대에는 전차에 유도탄 발사기를 장착하는 계획이 시도되었다.

이 계획이 실현되면 전차는 대형 형성장약(形成裝藥) 탄두의 철갑력과 유도탄의 장거리에서의 높은 정확도를 겸비하게 되었다. 그러나 비용이 많이 들고 신뢰성이 없으며 미사일의 발사율이 낮은데다가, 신형 탄약 APFSDS(armour-piercing, fin-stabilized, discarding-sabot)가 등장하고, 사격통제장치가 크게 개량되어 1970년대초 그 계획은 무산되었다. 사격통제장치에 있어 전후 최초의 큰 진전은 광학거리계의 채택이었다.

그것은 M47 전차에 처음 장치된 데 이어 레퍼드 1, AMX-30과 그밖의 전차들에도 채택되었다. 1960년대에는 광학거리계가 레이저 거리계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레이저 거리계는 전자탄도(電子彈道) 컴퓨터와 결합해 전차포의 명중률을 크게 높였다. 이것들은 1970년대초부터 제작된 모든 전차에서 표준이 되었고, 이전에 제작된 많은 전차에도 소급해서 장치되었다.

또 하나의 큰 발전은 야간조준기의 개발이었다.

야간조준기를 갖춤으로써 전차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투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최초의 야간조준기는 액티브 적외선 방식이었고, 그것이 맨 처음 대대적으로 채택된 것은 소련의 전차들이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1960년대부터 전차에 영상증폭 조준기를 장치했고, 1970년대부터는 열영상(熱映像) 조준기를 채택했다. 열영상 조준기는 액티브 적외선 장치들과는 달리 에너지를 방사하지 않아 탐지할 수 없기 때문에 패시브(passive) 방식이라 불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동중의 포격을 보다 정확히 하기 위해, 즉 전차가 융기했거나 함몰한 지면을 넘어갈 때도 포신을 일정한 앙각(仰角)으로 유지하기 위해 많은 전차에 포의 안전통제장치를 장비했다.

처음에는 T-54를 비롯한 몇 종의 전차가 포의 앙각만을 안정시켰지만, 센튜리온은 이미 앙각만이 아니라 횡회전(橫回轉)도 안정시켰다. 이것이 1970년대부터는 표준이 되었다. 이후로 전차들은 차장(車長)의 조준기뿐만 아니라 포수(砲手)의 조준기까지도 독립적으로 갖추었고, 그럼으로써 이동중의 과녁 포착이 보다 향상되었다.

1960년대까지 전차의 장갑은 균질의 강판 또는 캐스팅으로 이루어졌다.

이 장갑의 두께는 다양하여 초기의 전차에서 8㎜에 불과했던 것이 1945년에 나온 독일제 야크티거의 정면 두께는 250㎜에 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장갑방호의 가치에 대한 의견이 분분해졌다. 레퍼드 1과 AMX-30 같은 전차들은 중량을 줄이고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 장갑의 두께를 비교적 얇게 했다. 그것이 전장에서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치프테인과 같은 다른 전차들은 장갑을 보다 두껍게 하여 정면의 두께가 최고 120㎜에 달했다.

1967, 1973년의 아랍-이스라엘 전쟁은 중장갑의 변함없는 가치를 증명했다. 그와 동시에 특히 형성장약 탄두에 대비하여 균질의 강판보다 훨씬 더 효과적인 신형 장갑들이 개발되었다. 신형들은 다층성(多層性)이었으며, 강판만이 아니라 세라믹스나 다른 비금속 재료까지 합체했다. 최초의 신형 장갑으로는 영국에서 초브험 장갑이 성공적으로 개발되었다.

이 장갑은 1970년대초에 M1과 레퍼드 2에서 처음 채택되었으며, 이후 강판만으로 된 장갑 대신 널리 사용되었다.

1982년의 레바논 전투에서 이스라엘의 전차들에 폭발반동 장갑이 처음으로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2개의 비교적 얇은 강판 사이에 1층의 폭발물을 심어 넣은 것이었다. 밖을 향해 폭발함으로써 형성장약 탄두의 폭발 관통력을 분산시키도록 설계되어 반동 장갑은 강판 장갑이나 복합 장갑의 방호력을 증대시켰다.

전차의 방호력이 커지면서 전차의 중량도 커졌다.

T-54와 AMX-30 등 1950~60년대에 나온 일부 전차들은 36t에 불과했지만, 치프테인은 54t에 이르렀다. M1과 레퍼드 2를 비롯하여 1980년대에 나온 전차들도 대부분이 50t을 초과했으며, 챌린저는 62t이나 되었다.

중량의 점진적인 증가에도 불구하고 전차들에 보다 강력한 기관이 갖추어져 전차의 속력과 기동성은 증가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전차의 기관들은 출력이 500~800마력이었지만, MBT-70부터 출력이 1,500마력으로 증가했다. 이런 출력의 기관들이 M1과 레퍼드 2에 설치되어 t당 20마력 이상의 출력을 냈다.

또한 대부분 V자형의 12기통식으로 되었으며, 처음에는 불꽃점화 가솔린 기관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소련의 전차들은 이미 디젤 기관을 갖추었으며, 1960년대부터는 거의 모든 전차가 디젤 기관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디젤의 열효율이 크기 때문에 전차의 작전범위가 커졌고, 적의 무기가 장갑을 뚫을 경우 일어날 수 있는 치명적인 화재의 위험도 줄었다.

1960년대에 가스 터빈이 개발되면서 스웨덴의 S전차에 디젤 기관과 겸용으로 가스 터빈이 처음 사용되었다.

그후 1,500마력의 가스 터빈이 단독으로 M1과 M1A1에 채택되었다. 1980년대에 나온 소련제 T-80도 가스 터빈으로 움직였다. 1980년대에 나온 그밖의 신형 전차는 모두 변함없이 디젤 기관으로 추진되었는데, 그것은 디젤의 연료 경제성이 더 나았기 때문이었다.

기복이 심한 지면에서의 속력은 기관의 출력과 차대버팀 장치의 성능에 의해 좌우되었다. 그에 따라 전후 기간에 차대버팀 장치가 상당히 개선되었다. 거의 모든 전차가 각각 독자적으로 노면의 위치 선정을 하는 차륜들로 되었으며, 그 차륜들의 스프링 장치는 대부분 가로로 작용하는 토션 바(torsion bar)였다.

예외적으로 센튜리온과 치프테인 및 머카버에는 코일 스프링이 사용되었다. 울퉁불퉁한 지면을 달릴 때 탑승원이 받는 진동의 충격을 줄이기 위해 1980년대의 전차들에는 대부분 금속 스프링식 대신 액기압식(液氣壓式)의 차대버팀 장치가 채택되었다.

전후에 나온 전차들은 조종석을 차체의 앞쪽에 배치하고 기관실은 뒤쪽에, 회전식 포탑은 중앙에 배치하는 전통적인 형태가 유지되었다. 포탑으로는 주포가 탑재되었고, 전차의 차장·포수·장전수(裝塡手) 등이 조종했다. 이런 형태의 전차로는 1934년에 설계된 비커스-암스트롱 A-10이 있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 거의 보편화되었으나, 1960년 이후에는 더러 새로운 형태로 바뀌었다.

포탑은 제자리에 두었지만 장전수 대신 자동 장전기가 설치되었다. 강과 물을 건너야 하기 때문에 수륙양용 전차들이 개발되었는데, 1918년에 최초로 영국제 미디엄 D가 설계되었다. 1920~30년대에 제작된 수륙양용 전차들은 체적비(體積比) 중량을 줄이고 그럼으로써 충분한 부양력(浮揚力)을 얻기 위해 병기와 장갑을 줄였다. 그결과 수륙양용 전차의 용도는 정찰임무로 한정되었다.

가장 최근의 것으로 1950년대에 소련의 PT-76이 만들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중반 이후 많은 전차들이 접는 식의 부양 스크린에 의해 수륙양용화되었다. 이 스크린은 상당히 무거운 전차도 물 위에 뜰 수 있게 하는 장치이다. 이 방식은 1944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중에 활약한 M4 중형전차들에 처음 이용되었다.

그후 부양 스크린은 스웨덴의 S전차, 미국의 M551 셰리던, 1969년 영국 육군이 선보인 정찰용의 스콜피온 경전차에 항구적으로 장치되었다. 강을 건너는 또 하나의 방식으로 잠수도섭(潛水渡涉)이 있는데, 이것은 1940년에 영국의 A.9 순항전차와 독일의 팬서 Ⅲ호 및 Ⅳ호에 의해 처음 시도되었다.

한편 공해로부터의 상륙과정에서 또다른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해병대에서는 무한궤도식 착륙선(LVT)을 개발했다.

무한궤도식이나 차륜식의 차량에 장착, 발사되는 야포·대공포 등 자주포의 개발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계속되었는데, 자주식 대전차포만은 예외였다. 이것은 모든 전차가 적의 전차와 싸울 수 있는 충분한 무장을 갖출 필요가 있다고 인식됨에 따라 불필요해졌기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 독일군과 소련군이 선호했던 무포탑 돌격포도 없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장갑병력 수송차가 전투용 전차 다음으로 중요한 장갑차량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영국에서 몇 개의 실험적 모형이 제작되기는 했지만 장갑수송차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초 팬서 보병사단용으로 채택되면서부터였다. 전후 기간에 미육군은 표면 전체를 장갑으로 방호한 완전무한궤도식 수송차를 개발하는 데 앞장섰다.

이름제작국연도무게(t)주포의 구경(mm)속력(km/h)
마크 Ⅰ영국191630576
슈네데르프랑스191715756
르노 F. T.프랑스191871/23710
판처캄프바겐독일19387~2037, 4764
T-34소련193926~327640
M4 셔먼미국1942337539
팬더독일1943457546
타이거독일1942~4455~688838
요시프스탈린소련19444612237
센튜리온영국1945527634
T-54, T-55소련19483610051
M47, M48미국1951~5344~489040~48
M60미국19594810548
T-62소련1963361/211550
치프테인영국19635212040
레퍼드 1서독19654010565
AMX-30프랑스19663610565
T-64소련19754012560~70
메르카바 Mk.1이스라엘19796010546
레퍼드 2서독19795512072
T-80소련19824212575
챌린저 1/2영국1983/946212056
M1A1미국19855712067
메르카바 Mk.3이스라엘19606112055
르클레르프랑스19925512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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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M. Ogorkiewic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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