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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프랑스는 발루아 왕조의 왕 샤를 6세의 아들이며 왕위계승자인 왕세자 샤를과 랭커스터가 출신의 잉글랜드 왕 헨리 6세가 프랑스 왕위를 놓고 다투는 격전장이었다.
헨리의 군대는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선량공)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 북부의 거의 전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왕위 즉위식을 올리던 랭스가 계속 적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에 왕세자 샤를은 부왕 샤를 6세 사후 6년이 지난 1427년말에도 정식으로 왕관을 쓰지 않았고, 이 때문에 그의 왕위주장 명분은 거의 현실성이 없게 되었다.
왕세자 즉위식을 올리지 않은 한 프랑스 왕위주장의 정당성은 언제든지 도전받을 수 있었다.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세력과 샤를 세력의 접경에 있던 잔의 고향 동레미의 사람들은 부르고뉴의 위협 앞에 거의 자신들의 고향을 포기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잔은 1428년 5월 '음성'의 인도를 받아, 왕세자에게 충성하고 있는 가장 가까운 거점인 보쿨뢰르로 가서 그곳 사령관에게 왕세자 군대에 가담하도록 허락해줄 것을 요청했다.
처음에 사령관은 16세 소녀의 초월적 능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1429년 1월 재차 방문한 잔의 굳은 마음과 신앙심에 설득되어 왕세자가 있던 시농으로 가는 것을 허락했다. 같은 해 2월 13일 잔은 남자의 복장으로 6명의 무장한 군인의 호위를 받으며 출발했으며, 적의 영토를 가로질러 11일 뒤 시농에 도착했다. 잔은 도착 즉시 샤를이 머무르고 있는 성에 갔다. 샤를은 그녀를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를 확신하지 못했고 측근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지만, 이틀 뒤 접견을 허락했다.
샤를은 신하들 속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었지만 잔은 그에게 곧바로 가서 자신이 잉글랜드군과 싸우기를 원하며 랭스에게 즉위식을 올리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왕세자의 명령으로 즉시 교회당군에 의해 심문이 이루어졌다. 샤를의 친척인 알랑송 공작도 그 심문에 참석했는데 그는 잔에게 호의를 보였다. 3주 뒤에는 푸아티에에서도 저명한 신학자들의 질의문답이 있었다. 이러한 심문은 1417년 교회의 대분열이 막을 내린 뒤에도 여전히 존재했던 이단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잔은 성직자들에게 자신의 사명을 증명할 곳은 푸아티에가 아니라 오를레앙이라고 말하고 3월 22일에는 잉글랜드군에게 보내는 도전장을 받아쓰게 했다. 성직자들은 당시 잉글랜드군에게 수개월 간 포위되어 절망적인 상황에 있던 오를레앙의 구출에 그녀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조언을 올렸고 샤를도 그것을 받아들였다. 잔은 시농으로 돌아왔고 샤를은 4월중에 투르에서 잔에게 약간의 군속을 붙여주었다.
장 돌롱이 시종으로 따랐고, 오빠 장과 피에르도 그녀를 따랐다. 그녀는 심판일의 예수를 그린 기장과 예수의 이름이 새겨진 기를 들었다. 칼은 어디에서 구할 것이냐는 질문에 그녀는 생트카트린드피에르부아 교회에 있을 것이라고 답했고 실제로 그곳에서 칼이 발견되었다.
1429년 4월 27일 블루아에서 수백 명의 군대가 소집되어 오를레앙으로 향했다.
오를레앙은 1428년 10월 12일 이래로 잉글랜드 요새에 의해 완전 포위되어 있었다. 4월 29일 잔과 프랑스군 사령관 라 이르가 보급품을 가지고 갔을 때 잔은 증원군이 올 때까지 행동을 자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오를레앙 포위전). 5월 4일 저녁 잔은 쉬고 있다가 영감을 받은 듯 갑자기 벌떡 일어나 잉글랜드군을 공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무장을 갖춘 뒤 도시의 동쪽에 있는 잉글랜드군 요새로 서둘러 향했다.
당시 그곳에는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으나 그녀는 그 사실에 대해 들은 적이 없었다. 잔의 도착은 프랑스군의 사기를 높여주었고 마침내 프랑스군은 요새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다음날 잔은 또다른 도전장을 잉글랜드군에게 보냈다. 5월 6일 아침 그녀는 강의 남쪽 둑으로 건너가 다른 요새를 향해 진격했다. 이에 잉글랜드군은 그 근방의 더 강력한 요새를 방어하기 위해 철수했다. 그러나 잔과 라 이르는 잉글랜드군을 공격해 그 요새마저 삽시간에 빼앗았다. 5월 7일 새벽 프랑스군은 레투렐 요새로 진군했다. 잔은 부상을 입었지만 곧바로 전투에 복귀했고, 그녀의 이러한 본보기에 자극되어 프랑스 지휘관들은 쉬지 않는 공격을 퍼부어 마침내 잉글랜드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다음날 잉글랜드군은 퇴각하려는 듯 보였지만 일요일이기 때문에 잔은 추격을 허락하지 않았다. 5월 9일 잔은 오를레앙을 떠나 투르에서 샤를을 만났다. 그녀는 왕세자에게 랭스로 서둘러 가서 대관식을 올릴 것을 촉구했다. 보다 신중한 태도를 취한 샤를의 참모 몇몇은 이와는 달리 노르망디의 정복을 조언했다. 샤를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결국은 잔의 끈질긴 요구에 기울었다.
그러나 우선 루아르 강변의 여러 마을에 있는 잉글랜드군을 소탕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잔은 프랑스군 중장인 그녀의 친구 알랑송 공작을 만났고, 함께 이동해 도시 하나와 중요한 다리 하나를 손에 넣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보장시를 공격했다. 잉글랜드군은 공격을 받고 성 안으로 후퇴했다. 이어 잔은 샤를 및 그 측근 조르주 드 라 트레무아유의 반대와, 알랑송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궁정에서 의심을 받고 있던 프랑스 사령관 리슈몽을 받아들였다.
잔은 충성서약을 하게 한 뒤 그의 도움을 받았으며 얼마 후 프랑스군은 보장시 성을 함락하는 데 성공했다.
1429년 6월 18일 프랑스군과 잉글랜드군은 파테에서 전투를 벌였다. 잔은 병사들에게 샤를이 그날 최대의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약속했다. 잔의 말 그대로 완벽한 승리가 이루어졌다. 잉글랜드군은 패주했고 무적이라는 명성이 프랑스군에게 뒤따랐다. 잔과 사령관들은 여세를 몰아 대담한 파리 공격에 착수하는 대신 당시 라 트레무아유와 함께 쉴리쉬르루아르에 있던 샤를과 합류하기 위해 되돌아갔다.
잔은 다시 한번 샤를에게 랭스로 신속하게 진군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주저했다. 루아르 강을 따라 여러 도시를 지나는 동안 잔은 샤를을 수행하면서 시간을 끌 것을 주장하는 측근들의 조언과 그의 주저함을 물리치고 결단을 내릴 것을 요구했다. 그녀는 랭스 공격의 위험과 어려움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돌렸고, 마침내 샤를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군대가 집결하기 시작한 지앵에서 잔은 편지 2통을 썼는데, 하나는 샤를에 대한 충성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있던 투르네 주민에게 보내는 권고이고, 다른 하나는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에 대한 도전장이었다.
6월 29일 그녀는 샤를과 함께 랭스로 출발했다. 트루아에 도착하기 전에 잔은 그 도시 주민에게 투항하면 용서해주겠다는 내용의 글을 보냈다. 그들은 잔을 탐색하기 위해 설교사인 수도승 리샤르를 보냈다. 그가 그녀의 사명에 깊은 감명을 받고 돌아왔지만 도시 주민들은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 편에 계속 남기로 결정했다. 샤를은 회의를 열었고 잔은 공격을 제의했다. 다음날 아침 잔은 공격을 개시했고 트루아는 곧바로 강화를 요구했다. 이어 샤를의 군대는 샬롱으로 진군했다. 샬롱의 주민들은 저항을 결의했지만 주교백작은 성문열쇠를 샤를에게 넘겨주었다.
7월 16일 프랑스군은 랭스에 도착했고, 랭스는 성문을 열었다. 1429년 7월 17일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잔은 제단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기를 들고 서서 행사를 참관했다. 식이 끝난 뒤 그녀는 샤를 앞에 무릎을 끓고 처음으로 자신의 주군이 되어줄 것을 요청했다. 같은 날 그녀는 부르고뉴 공작 앞으로 강화와 국왕요새로부터의 철수를 권고하는 서한을 보냈다.
1429년 7월 20일 국왕 샤를 7세에 즉위한 왕세자는 랭스를 떠났고, 군대는 1개월 동안 샹파뉴와 일 드 프랑스 전역에서 행진을 벌였다.
8월 2일 왕은 프로뱅에서 루아르로 퇴각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러한 결정은 파리공격 계획의 전면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적의 손에 들어갈지도 모르는 국왕편의 도시들은 다소 놀람을 표시했다. 잔은 샤를의 결정에 반대하면서 8월 5일 랭스 시민들을 안심시키는 서한을 썼다. 그녀는 그 편지를 통해, 당시 파리를 점령하고 있던 부르고뉴 공작과 2주일간의 화약을 맺었으며, 그 기간이 지나면 그가 파리를 국왕에게 넘겨 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8월 6일 잉글랜드군은 프랑스군이 브레이에서 센 강을 건너는 것을 막았는데, 샤를의 파리 공격을 원했던 잔과 사령관들에게는 매우 기쁜 일이었다. 잔은 프랑스 어느 곳에서든 환호를 받았다. 15세기 연대기 작가에 따르면 당시 잔은 프랑스인들의 우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의 사명이 완수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8월 14일 프랑스군과 잉글랜드군은 상리스 근처에서 다시 한번 대치했다.
이번에는 소규모 접전만 몇 차례 일어났을 뿐이었다. 잔이 잉글랜드군의 참호 앞에 나가 공공연히 도전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어느 편도 전투를 시작하려 하지 않았다. 한편 콩피에뉴·보베·상리스 등 파리 북쪽에 있는 도시들이 프랑스 왕에게 항복했다. 그 직후인 8월 28일에는 센 강 이북의 전역을 대상으로 4개월의 휴전 기간을 갖자는 데 부르고뉴와 합의했다. 그러나 잔은 점점 초조해졌다.
그녀에게는 파리 함락이 매우 중요했다. 8월 26일 잔이 알랑송과 함께 파리 북쪽 교외 생드니로 접근하자 파리 시민들은 방어망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9월 7일 샤를이 도착했고 9월 8일 생오노레와 생드니 중간지점에서 공격이 시작되었다. 잔은 공격군 맨 앞에 서서 파리 주민들에게 파리를 '프랑스의 국왕'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잔은 군사들을 계속 독려했지만, 결국 공격을 포기해야 했다.
다음날 그녀는 알랑송과 함께 공격을 재개했지만 왕실회의에서는 퇴각을 명령했다.
샤를 7세는 루아르로 물러났고 잔도 그를 따라갔다. 9월 22일 프랑스군은 지앵에 도착한 뒤 해체되었고, 알랑송을 비롯한 지휘관들은 귀향했다. 이제 왕의 곁에는 잔만 남았다. 후에 알랑송은 노르망디 공격을 계획하고 왕에게 잔의 합류를 요청했지만, 라 트레무아유를 비롯한 신하들은 알랑송을 만류했다.
잔은 왕과 함께 부르주로 갔다. 거기서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행과 온정을 베풀었는데 이것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 남았다. 10월에 그녀는 생피에르르무티에로 갔다. 거기서 얼마 안 되는 병력을 이끌고 용감한 공격을 감행해 그 도시를 점령했다. 그 다음에는 라샤리테쉬르루아르를 포위했다. 도중에 탄약이 떨어져 이웃의 여러 도시에 원조를 요청했지만 물자가 너무 늦게 도착해 1개월 뒤 철수해야 했다.
이어 잔은 루아르 강변의 여러 도시에서 겨울을 나고 있던 왕과 재회했다.
1429년 12월말 국왕 샤를은 잔과 그녀의 부모·오빠를 귀족에 임명하는 특허장을 내렸다. 1430년초 부르고뉴 공작은 브리와 샹파뉴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랭스의 주민들은 불안해했으나 잔은 3월에 그 도시에 대한 왕의 관심과, 자신이 그곳의 방어를 맡겠다는 약속을 제시함으로써 안심시켰다. 부르고뉴 공작이 콩피에뉴 공격에 착수하자 주민들은 도시의 수호를 결의했다. 3월말에서 4월초경에 잔은 왕을 떠나 오빠 피에르, 시종인 장 돌롱, 그리고 무장병사 몇 명만을 대동하고 콩피에뉴 원조길에 올랐다.
4월 중순 그녀는 믈룅에 도착했고, 그 도시 주민들은 그녀의 출현에 힘입어 샤를 7세에 대한 지지를 선포했다. 1430년 5월 14일 잔은 콩피에뉴에 도착하여 랭스 대주교 르노 드 샤르트르와, 왕의 친척인 방돔 백작 루이 1세 드 부르봉을 만났다. 그녀는 그들과 함께 수아송으로 갔으나 그곳 주민들은 입성을 저지했다. 르노와 방돔은 마른 강과 센 강의 남쪽으로 되돌아가기로 했지만 잔은 그들과 함께 가기를 거부하고, 콩피에뉴의 '좋은 친구들'에게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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